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onseul Dec 27. 2023

타본 거라곤 그네뿐인데

14시간 비행이요?

 주변에서 다 가는 교환학생, 몰아치는 파도에 왠지 나도 몸을 맡겨야 할 것만 같았지만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해외에 대한 로망도 야망도 없었다. 남들 다 타고 있는 파도 위에서는 서핑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이 들었을 때는, 모두가 맞다고 끄덕일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니!라고 외친 것만 같은 기분에 빠졌다. 어딘가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지만, 두려움을 뒤로하기 위한 같잖은 핑계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향형 인간에 얌전하고 안정적인 걸 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여 자극적인 무언가를 나로부터 끌어내길 반복했다. 작은 규모였지만 생중계로 유튜브에도 출연해서 말도 해보고, 대학교 동아리 회장도 맡아해 보고, 이왕 하는 거 무대를 찢어보자며 장기자랑에서 걸그룹 춤도 췄던, 그런 인간이다.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도 어두웠던 곳을 밝히고 두려움이라는 벽을 뚫어내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

 

 슬픔에 담담해지기까지 아무도 모를 눈물을 수없이 쏟아내듯, 난 언뜻 보면 자신감 넘쳐 보이지만, 고작 수업 중 교수님께 질문하기 위해서 허벅지를 꼬집어 두려움을 고통으로 승화시킨 그 순간에야 손을 위로 뻗쳐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14시간 비행? 내가 타본 거라곤, 360도까지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궁금해하던 놀이터 그네와 수학여행으로 탔던 제주도 비행기뿐이었다. 그렇게 차례차례 두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고통으로 바꿔내다 보면, 귀국할 때는 관에 실려 수화물로 보내질 게 분명했다.


 

 공부는 둘째 치고, 친구는 셋째 치고, 비행기도 눈 딱 감고 탄다 쳐도 내가 유럽에서 정말로 먹고살 수는 있는 걸까? 진심으로 걱정됐다. 눈 딱 감으면 다시 안 떠질 것 같았다. '두려움' 지역에서 레벨 1짜리 잡몹들을 신명 나게 사냥하다가 갑자기 레벨 10짜리 보스 몬스터가 튀어나온 격이다. 극한의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합리화하며 나 스스로 교환학생을 가고 싶지 않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교환학생? 허벅지를 꼬집기는 개뿔, 이 정도 두려움을 깨부수려면 해머로 내 뚝배기 정도는 깨야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렵지 않았다면 관심조차 없었을 거다. 나에게는 그 두려움이 가장 큰 장애물이자 원동력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죽기야 더하겠어?라는 문장이 진심으로 의심됐다. 그럼에도 가기로 결정한 이유는, 만약 교환학생을 가지 않아서 나중에 후회한다면, 그 후회로 생긴 죄책감과 나로부터 오는 나약함은 그때 가서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 마음속에 발견된 두려움은, 가슴속 딱딱한 응어리가 되기 전에 그때그때 해치워야 한다. 비행기표도 끊을 줄 모르던 놈이, 해외라고는 한 번도 나가본 적 없는 놈이, 불어에 ㅂ자도 모르는 놈이 영미권도 아닌 프랑스에 가서 6개월 살고 오겠단다. 유럽 여행도 다니고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올 거라며 외쳐댄다. 아주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하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내 교환학생 생활의 막이 열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