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의미

티파니 D. 잭슨의 <그로운>으로 만난 '느슨한 연대의 일부인' 나

by 새벽녘 연필소리

아야. 나래야. 조금치라 날이 쌀쌀할 것인 게 나래 두꺼운 옷 입혀라잉. 할아버지는 노란 호박을 대롱대롱 매단 한복 저고리를 입고, 대청마루에 서서 엄마의 육아에 한마디 보태시고는 했다고 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의 힘이 필요하다. 사람이 품은 이야기는 우주와 같고, 우주를 만드는 것이 쉬이, 저절로 이루어질 리 없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팔 할이 엄마의 가르침과 사랑이었지만, 나머지 이 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온전하다 부를만한 모습이 아닐 것이다. 나머지 이 할은 엄마가 아닌 다른 가족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스쳐 지나온 많은 인연들이 만들어주었다. 돌아보면 가끔씩 오래 보자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에게서마저도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받았다. 끈끈하다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기꺼이 시간의 한 귀퉁이를 공유하며 누군가의 삶 속에 남는 이들과의 관계를 느슨한 연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요컨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의 힘이, 느슨한 연대가 필요하다.



느슨한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은 나이 차이가 열 살 넘게 나는 동생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에 가까워졌다. 물론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아이를 둘러싼 온 환경이 아이의 성장에 관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관계는 이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안타깝게도 모든 관계가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만은 없다. 악의 본질은 평범성에 있다. 악은 일상성의 얼굴을 하고 인간의 주변을 맴돌고, 사고는 불현듯 찾아오며, 비극은 호시탐탐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해 백스테이지를 지키고 있다. 노새의 등을 부러지게 하는 것은 주인이 올려놓은 한줄기 지푸라기일 때가 많다. 그러나 또한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을 버티게 하는 힘이 작은 나사에서 올 때도 있다. 때로 어떤 비극은 순전히 주변 인물 때문에 생기기도 하지만, 때로 어떤 비극은 순전히 주변 인물 덕분에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극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느슨한 연대는 인종, 성별, 나이를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존재의 생물학적 특성을 대변할 뿐인 이러한 요소들을 취약점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이들에게 맞서는 데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대한 방패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장에 이런 위기가 수반되지 않도록 보호가 필요한 이들의 안전을 선제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성하고, 피치 못한 사고로 위기를 겪더라도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을 모으기도 한다. 티파니 D. 잭슨의 <그로운>은, 흑인 소녀 인챈티드가 유명 가수인 코리를 만나서 겪게 되는 비극적 상황, 성범죄 피해자가 겪는 2차 피해, 그루밍 범죄가 피해자와 주변인들에게 미치는 악영향과 긴 그림자, 그리고 인챈티드가 이 피해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럼으로써 악은 평범하기에 누구나 악에 부지불식간에 노출될 수 있고, 중요한 것은 위험에 대처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가 무너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구성원들이 주의 깊게 주변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작은 보살핌에서 위험을 막고 이미 발생한 위험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하는 일이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악의 평범성만큼이나 구원 역시 평범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코리는 가수가 되겠다는 인챈티드의 꿈을 볼모로 잡고 서서히 그녀의 인생에 침투해서 인챈티드를 느슨한 연대로부터 고립시키고, 사랑과 보호, 커리어적 성장을 빌미로 그녀가 더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유도하며, 인챈티드를 무방비로 극단적인 외로움과 상실감에 노출시켜 그녀를 학대하기에 더 용이한,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우여곡절 끝에 지옥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가스라이팅의 전형이라고 부를만한 시간 속에서 인챈티드의 정신 건강은 피폐해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녀의 극복은 더뎌지며, 수사당국과 학교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에게 2차 가해를 가한다. 본 작이 독자에게 경악스러운 깨 달음과 반성을 전해주는 착점은, 인챈티드 사건의 가장 중요한 참고인이자 조력자인 ‘갭’ 이 마치 상상 속의 존재였던 것처럼 연출하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시점을 삽입하여, 인챈티드가 스스로가 미친 것은 아닌지,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이 다 사실인 것인지를 의심할 때, 작품을 내내 숨죽여 따라오던 독자마저도 혹시 이 모든 이야기가 코리가 인챈티드에게 준 마약 주스 때문에 인챈티드가 겪는 환각의 일부는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는 점이다. 본작에서의 코리의 행동은 절대악에 가깝고,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인 것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사실이지만, 인챈티드가 마약에 중독되어 있고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만으로, 독자는 순간적으로나마 인챈티드의 비극을 방어적으로 대하게 된다. 혹시 수사당국의 태도가 옳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챈티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며 그녀가 겪은 모든 일을 알고 있고,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이 거짓이고 이것이 다 피해망상은 아닌가 의심하는 바로 그 순간, 독자는 2차 가해를 간접 경험한다. 언더 도그마.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인식을 경계하는 태도는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가 불분명한 상태에서나 유효하다.



본 작은 이 외에도 상당히 많은 지점에서 간접 체험을 유도한다. 회의록, 대화방, 조서 등 다양한 형태로 장(章)을 구성하여 현실감을 꾀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자연스럽게 독자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까마득한 상공. 미성년으로 보이는 소녀와 유명 가수가 나란히 일등석에 앉아 있다. 소녀의 드러난 허벅지 위에 성인 남성의 손이 올려져 있다. 난기류가 비행기를 덮쳐 기체가 흔들린다. 승무원 니콜은 소녀에게 묻는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가수의 매니저가 뛰어와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며 협박한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백인 승무원이 이내 니콜을 만류한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승무원들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기내방송이 들린다. 손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이내 인챈티드는 자신의 꿈을 놓아주며 말한다. 그녀가 깊게 사랑했던 눈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음을 뼈 아프게 실감한다. 네 도와주세요. 친한 친구가 톱스타에게 납치, 감금되었다. 매니저 측은 인챈티드에게 접근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해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차별이 두려워서 이름을 백인식으로 바꾸고, 하얀 피부 때문에 본의 아니게 외모적으로도 ‘패싱’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가장 친한 친구 인챈티드에게도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부채감을 고려하더라도 그녀를 도와주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너무도 두렵다. 그러나 갭은 인챈티드를 찾아온다. 작은 도움이라도 절실할 친구를 위해. 코리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 연대는 인챈티드를 사무실로 초대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 윌앤드위로우 구성원들은 그녀를 오해한 것이 너무 미안하다. 기분이 너무 엿 같아. 네 잘못 아냐.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다른 지부들에도 연락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모든 성장에 상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런 성장도 있다는 사실이 성장에 동반하는 상처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허락하지 않는다. 언젠가 엄마가 티비를 보다가 무심코 이야기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 싫더라. 엄마는 아픔이 청춘의 선제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주장을 사뭇 진지하게 반대했다. 아프지 않고도 빛날 수 있는 존재고, 충분히 청춘인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청춘이 아픈 것은 당연하다는 말 같잖아. 인챈티드가 겪은 일은 당연하지 않다. 인챈티드는 바다에서 태어나 꿈을 위해 무대에 섰다가 짙은 비트주스가 흐르는 심연을 건너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바다에서 태어난 에리얼은 꿈과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바치고 다리를 얻지만, 목소리 없이는 자신을 지킬 수 없고 자신의 자유는 목소리에 기인함을 깨닫는다. 비트주스는 각 챕터에 서두에 위치하며 의도적으로 작품 전반에 비트주스의 이미지가 흐르게 한다. 비트주스는 학대를 상징하는 오줌과 꿈과 사랑을 인질로 삼고 권력을 휘두르는 코리의 범행을 상징하는 마약 주스, 그리고 그 결말을 상징하는 피의 이미지를 요약한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안정적으로 회복기에 접어든 인챈티드는 비트주스를 마신다. 인챈티드를 구원한 것은 팔 할이 그녀 스스로다. 물론 나머지 이 할이 없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구조한 것은 그녀와 일면식도 없었던 승무원이다. 죽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으니 돕겠다고 대답했던 또 다른 소녀, 갭이다. 나무에서 멀리 덜어지지 못한 사과, 데릭이다. 코리의 대저택을 떠나면서 끝까지 인챈티드를 바라보았던 여경의 가느다란 눈빛과 관심이다. 한 존재가 Grown이 되기 위해서 져야 하는 수많은 위험부담과 극복해야 하는 시련들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비극이 누군가에게 찾아왔다면,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기도, 그리고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집 마을에 노란 스레트 지붕을 이고 있는 단정한 단층 가옥이 있었다.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갈 때 그 집 손주를 종종 마주쳤는데, 파마머리에 하얀 얼굴이 무척 인상적인 꼬마였다. 내가 일곱 살, 그 아이가 다섯 살쯤 됐을까. 세발자전거 바퀴를 신나게 궁굴리던 아이가 도로 아래로 쑥 사라졌다. 달려가 보니 또랑 돌바닥에는 피가 흐르고, 세발자전거는 패대기 쳐져 있고, 아이는 까무룩 쓰러져 있었다. 그때 즈음 큰아빠 허리가 안 좋아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내게는 여전히 태산 같은 분이라 자동 반사적으로 큰아빠에게 뛰어가 구해달라고 소리 질렀다. 큰아빠는 거침없이 비탈진 도랑 양쪽 경사면을 따라 구르듯 내려가 아이를 껴안았다. 119 구급대가 오기 먼 시골이라 마을 주민 누군가가 급하게 차를 댔고, 아이는 동네 사람들의 비호를 받으며 병원에 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큰아빠는 그제야 툇마루에 몸 져 눕듯 쓰러졌다. 누구라도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위험한 일에 처하면, 게다가 그 피해자가 아이라면, 큰아빠처럼 주저 없이 도랑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곳이 도랑이 아니라 악의 일상의 한가운데라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그 용기가 아무나 마음먹을 수 있는 단순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 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이가 그럴 수는 없으며, 그렇다고 용기 내지 못한 이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저 선택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질 뿐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가 아니라, 누군가는. 이라도 쓰여야 맞는 문장이 되겠다. 존재는 조금씩이 나마 서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일부의 성장이나 정체가 전부를 대변할 수도 없다. 동시에 모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장단점과 성장의 속도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상호 보완이 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혼자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혼자만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하나가 모두, 경계 위에 서있는 고독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경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를 지탱하는 것은 경계 위에 있는 고독한 존재들이 결성한 느슨한 연대다. 우리는 생과 죽음의 거대한 교차 속에서 가느다란 한줄기 포물선일 뿐이다. 모진 운명 앞에 무기력하고 가느다란 몸짓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멈춰 있을 수는 없다. 한 줌 미약한 힘들이 모여 세계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내 역할을 다 해내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느슨한 연대가 공동체를 구원한다. 이 틈이 벌어져 무너지고 나면, 누군가의 세상에는 괴물의 심연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의 끝에 남은 것이 더 깊은 절망일지라도. 홀로 남아 외롭게 큰 골조를 견디고 있는 나사 옆에, 작은 나사가 되겠다. 작은 관심이 되겠다. 그 작은 마음들이 가끔 누군가의 구원이 될 것이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우리 오늘의 의미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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