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적

루이스 어드리크의 <밤의 경비원>으로 만난 '기적을 기억하는' 나

by 새벽녘 연필소리

아빠, 어떤 게 할머니고 어떤 게 할아버지야? 아빠는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가 묻힌 쌍분 앞에서 코를 훔쳤다. 그리고 내 질문에 곧, 게가 아니고 어떤 쪽이라고 말해야제, 분이라고 해도 맞겄고. 우리나라에서는 무덤 앞에서 보았을 때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모신다. 하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아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디 그렇게 외우지 않아도 될 거여. 잔디를 심은 지 꽤 됐는디. 어무니 쪽은 잔디가 길게 자라고, 아부지 쪽은 잔디가 짧게 자라는 거이 보이제. 두 분 머리 모냥 기억하냐?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는 왼쪽, 할매는 오른쪽 하고 되뇌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분들의 머리 스타일이 봉분에 난 잔디의 길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렸던 나는, 환경과 얼마간의 우연 때문에 잔디가 자라는 속도가 다르고, 따라서 길이가 다른 것일 뿐이라고 믿었다. 세월이 지나 그분들이 떠나신 지 2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두 분의 묘역 왼쪽에는 키가 작은 잔디가, 오른쪽에는 키 큰 잔디가 자란다. 덕분에 두 분을 바라볼 때마다, 아빠 말을 못 믿고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을 찾아본 기억을 더듬지 않고도, 용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구분해 낸다.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고 성숙해져서일까. 두 분을 찾아뵐 때마다 전혀 다른 공간 같은 풍경들의 공존을 바라보며, 사랑이 무엇인지, 한( 恨) 이 무엇인지, 왜 두 분이 끝끝내 완전히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잔디로라도 남아계시는지, 사는 동안 서로에게 가는 흠집을 남겼던 두 분이 어찌하여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셨는지에 대하여 종종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는 첫 죽음은 7살, 8살이나 되었을까, 유독 추위가 매서웠던 어느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머니는 나에게 어렵고 무서운 존재셨다. 할아버지는 마당을 뛰어놀던 우리 자매가 가까이 다가가면, 해바라기 하며 앉아 계시다 흔쾌히 까까머리를 내어주시는 자상한 분이셨다. 할아버지 정수리에 손을 모아 대고, 손 끝에 까슬함을 느끼며, 할아버지 까까머리래요. 하면서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 할아버지는 금방 아가. 어지럽다. 하며 웃으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처럼 우리를 놀아주실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긴 시간 병석에 누워계셨다. 큰아버지 댁 할매방에 들어가면 느껴지던 희미하게 코를 찌르는 누르스름한 냄새와 보일 듯 말듯한 할머니의 희미한 손짓이 싫어서 그 문턱을 넘은 적이 좀처럼 없었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딱 한 마디. 말없이 묵묵한 아빠의 뒤통수를 보며 계단을 내려가면서 할머니에게 버릇없이 굴고 멀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혹시 천벌을 받을까 봐 벌벌 떨며 아빠 차에 올랐다. 그날따라 달이 크고 둥그렇고, 손에 잡힐 듯, 시야에 가득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달이 발그스레했다. 철없던 손녀는 누워 있던 할매가 아빠에게 삶의 젖줄과도 같은 의미였다는 사실을, 아빠와 고모, 그리고 큰 아빠들이 병풍 뒤에 누운 할매를 향해 목 메 곡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빠도 엄마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할매도 누군가의 소중한 엄마였다. 그때만 해도,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기보다 집에서 장을 치르는 일이 많았다. 큰아버지 댁은 삽시간으로 사람으로 가득 찼다. 잔치도 아닌데 정신없이 시끌벅적한 가운데, 할아버지는 홀로 중간방에 오도카니, 말없이 앉아 계셨다. 심부름하다가 꽝꽝 언 손을 호호 불며 방에 숨어 들어가도, 할아버지는 그저 옅게 웃기만 하셨다. 밥상은 방에 들어간 그대로 부엌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가 입고 계신 한복에 달린 호박이 금방이라도 바닥에 첨벙 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모시 삼베로 지은 상복을 입은 상주들은 손님이 오면 곡을 하고, 시간이 되면 또 곡을 하고, 막둥이었던 아부지는 자꾸 까무러쳤다.



당신은 한복에 새초롬하게 노란빛으로 빛나는 호박을 달고, 소가 먹을 여물을 썰고, 볕바라기를 하고 있으면 할아부지 머리 까까머리라며 당신의 머리를 짚고 빙빙 도는, 막내아들이 낳아다 준 버릇없는 늦손주들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셨다. 내가 사리를 분별할 줄 알게 된 어느 날, 나는 그것이 비단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이 새까맣게 타버려 바람결에 날아가버렸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작은 두메산골 마을에서도 차례로 젊은 청년들과 처녀들을 징발해 갔다. 그는 전답을 모두 팔아, 우는 누이 둘을 모두 시집보내고, 남은 돈을 챙겨 만주로 떠났다. 그는 오직 살고자 했으며, 살 길을 트자 비로소 뜻을 찾았다. 그 뜻 끝에 보상과 위로가 달려있지는 않았지만, 삶은 계속되었다. 살만 해지자 전쟁이 터졌다. 난중에도, 난이 끝나고 쑥대밭이 되어버린 땅에도, 새 새명은 속절없이 태어났다. 딸을 시작으로 아들을 셋이나 낳고도, 느지막이 아들이 하나 더 생겼다. 그에게 실존은 생존과 동의어였고, 가장이 짊어진 무게는 점차로 막대해졌다. 그는 바구니에 담겨 언제 터질지 모르면서 부풀려지는 풍선 같았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농사를 짓는 일 밖에 없었던 그는 제비새끼들처럼 자신을 바라보며 까악 거리는 아이들과 가냘픈 아내를 바라보며, 시시각각 망가져갔다. 돈이 없으니 누군가는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흔한 신파 드라마가 집에 깃들었고, 막둥이가 자라 학교를 갈 때가 되자 할아버지는 막둥이가 학교에 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막둥이의 국민학교 등교를 막는 완강한 남편을 피해 아내는, 새벽마다 막내아들의 신발을 품에 안고 자다가 새벽녘 댓돌에 고무신을 내려놓고, 비몽사몽 정신없는 아이를 깨워 학교에 보냈다. 아내가 자신의 의견을 따라주지 않자 남편은 아내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 그런 초가지붕 아래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잃어버렸다.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당신이 평생 삶을 꾸렸던 집안 곳곳에 관을 돌려 마지막 인사를 하시게 하고, 당신을 꽃 상여에 태워 장지로 떠나려 하자,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할머니의 꽃상여는 장정들이 여럿 달라붙어도 들리지 않았다. 스님의 목탁 소리와 어무니, 걱정하지 말고 가. 조심히 가. 하는 자식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상여는 간신히 들려 집을 떠났다. 할머니의 마지막 걸음을 뒤따르던 남매들은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면서 엉금엉금 그들의 어머니 뒤를 밟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하셨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소를 돌보며 부지런히 하루를 가득 채우고, 멀리 뒤란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니시던 당신은, 평생을 서로 애증 했던 반려자가 세상을 떠난 지 꼭 한 달 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봉분에 난 잔디의 길이, 좀처럼 들리지 않던 할머니가 타고 계셨던 꽃 상여, 전쟁이 말려 놓은 할아버지의 마른 영혼이 할머니의 뒤를 따른 일과 같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갖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한다. 정( 情), 뜻(뜻 의 意), 악( 惡), 사랑( 愛), 증오( 憎), 한( 恨) 은 모두 마음( 心, 忄)에서 비롯된다. 누군가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현상을 보고 무슨 감정( 感 情) 이 피어오르는지에 대하여, 인간은 말로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초자연적인 영역의 일에 대하여 설명하기에, 자연의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은 너무나도 아는 것이 없다. 루이스 어드리크의 은 인간이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범주까지 미치는 마음의 영향력에 대하여, 누군가가 떠나도 오래 한 곳에 남아 깊이 생각하고 남겨두고 떠나온 이들을 배려하는 사유( 思 惟)와 정령( 精 靈)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본 작은 터틀마운틴 지역에 뿌리내린 치페와족이, 부족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운영되던 원주민 지원의 '종결'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자, 이를 막기 위하여 투쟁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원주민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가꾸던 땅을 이주민들과 공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 생활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을만한 땅과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고 땅을 공유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최소한의 자립의 기틀은 마련되었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른바 종결 법안이 상정되고, 몇몇 부족의 지원에 대한 종결 법안은 시행되는 데에 이른다. 미국은 원주민 국가와 풀이 자라고 강물이 흐르는 한 유효할 조건으로 맺은 협약을 파기했다. 태초부터 그 땅의 주인이던 사람들은 철저한 계획 속에서 내쫓기기 시작했다. 태초가 없다면 현재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는 쉽게 잊혔다. 실제로 종결법안이 시행됨에 따라 총 110여 개의 부족 공동체 중에서 30여 개의 부족 공동체는 땅을 모조리 잃었고, 20여 개의 부족 공동체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본 작은 이 종결법안의 악몽에서 살아남은 치페와족의 공동체를 배경으로, 비단 1950년 대의 치페와족 뿐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역사에 기록된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이 언제든 겪을 수 있고 자행할 수 있는 인간의 실패를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의 극복을 기록하고 있다. 본작이 모든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를 인디언 부족체의 투쟁기를 빌어하고 있음은, 본작이 2021년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치페와족이 겪었던 일은 유럽의 열강의 지배 아래 수탈 당했던 많은 국가들, 일제의 침략을 받았던 조선, 그리고 현대에도 계층 내에서 상대적으로 강자 혹은 다수에게 억압받고 차별받는 약자 혹은 소수가 직면한 문제상황으로 치환해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이 폭력적 사태들의 빈도와 정도가 줄어드는 것을 발전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본 작은 이 구조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구조를 뜯어고치는 것보다 구성원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에 방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마음이 있고,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치페와족은 이른바 지원 종결 법안 때문에 즉각 종결 위기에 처한 부족이었지만,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한데 모으고, 공동체와 터틀마운틴을 떠나 타향에서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구성원들이 시련의 극복을 위해 먼 길을 짚어 돌아와 힘을 보태거나 멀리에서나마 마음으로 응원한 덕에, 그리고 원주민은 아니지만 그들의 공동체를 아끼는 외부자들의 마음 덕분 문제 상황을 타개하고, 나아가 의회에서 종결법안을 몰아낸다. 요컨대 존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치페와족을 아끼는 모두가 모은 마음의 힘으로 지원 종결을 저지해 낸다. 그리고 산 자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힘을 보탤 수 없는 존재들도, 춤추는 정령이 되어 그들을 돌본다.



공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생활을 영위하는 부족 의장 와샤스크는 순찰을 돌다가 하얀 부엉이와 하늘을 수놓은 정령들을 목격한다. 그는 질기고 퍽퍽한 먹고사는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동시에, 부족을 지키는 일도 진심으로 대한다. 그렇게 그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면량을 견디면서, 치페와족의 밤도 지켜내고야 만다. 픽시는 집을 떠나 대도시에 정착했지만 연락이 두절된 자신의 언니 베라를 기다린다. 며칠이나 계속 그랬을까. 픽시 모녀는 동시에 같은 꿈을 꾼다. 베라는 보호의 울타리가 없는 낯선 대도시에서, 인디언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에 담을 수 없는 폭력과 혐오범죄에 맞닥뜨리지만, 베라가 집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녀의 애타는 마음을 느끼고 끝끝내 살아내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망가진 몸과 산산조각 난 영혼으로도,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아들 아킬레를 보듬는다. 자신의 우주에 거의 남지 않은 사랑을 그러모아 작은 생명에게 쏟아붓는다. 본작은 와샤스크와 픽시(퍼트리스)를 중심으로 치페와족의 여러 구성원들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자기 자신을, 가정을, 나아가 한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지켜내는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 세상에는 우리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인간이 구축한 지식체계로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기적과 과학이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기적( 奇 跡) 이 그것을 기다리는 모두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이 필요한 어떤 우주는 종종 기적을 경험한다. 할아버지는 두 번의 큰 전쟁을 살아냈고, 끝끝내 가족 모두를 지켜냈다. 막내아들은 공중에 학사모를 공중제비시키며, 새벽의 눈길을 어머니의 가슴이 덥혀줬던 그 옛날을 기억했다. 산다는 것만큼 완벽한 기적은 없다. 사랑하는 마음만큼 위대한 기적은 없다. 위대한 일들은 일상이라는 단단한 기적의 굴레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1953년.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이 벌어지고, 작은 땅에 폭음이 가득했던 시절. 성별, 피부색깔, 향유하는 문화, 나이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가득했던 시절. 점령이 종결되자 유럽으로 흘러든 이민자들이, 폭력과 학대에 속절없이 노출되어야 했던 시절.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2023년. 우리는 여전히 극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삶의 일상성이 무차별적 혐오 범죄에 위협당하는 시절을 살고 있지만, 다르다는 이유가 더 이상 죄가 될 수 없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갈 길이 한참 남아있다고 해서, 걸어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법은 더 이상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좌시하지 않는다. 인디언 여성은 더 이상 백인 남성이 가득한 어선에서 성을 갈취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디언은 마음속에 삼각형이 있고, 그것이 마음을 찔러서 아픈 것이 양심의 작용이라고 믿는다고 한다. 희미해지던 믿음은 비로소 윤곽을 되찾았다. 원주민 국가는 더 이상 자신의 지위를 보장하는 약속이 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여성도 지도자를 뽑는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민자도, 교육을 받지 않은 자도, 태초부터 땅을 지켜왔던 원주민도, 소수라는 이유로 자신의 삶에 연관된 체계를 운영하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게 되었다. 70년간의 기적은 앞으로도 쌓여 우리의 우주가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할 것이다.



인디언은 그들이 낳은 아이의 이름을 자연의 섭리를 본떠 지어준다. 치페와족을 이끄는 부족 의장 와샤스크의 이름은 사향쥐를 본떠 만들어졌다. 사향쥐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습지를 정비하는 역할을 하는 동물이니, 부족 의장의 이름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나의 이름 나래와 동생의 이름 루나는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함께 지었다. 나의 이름은 설나래다. 나는 날개이기도, 배를 젓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농기구 나래이기도 하다. 독립과 땅을 일구는 일 밖에 몰랐던 할아버지가 논밭을 반반하게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인 나래처럼, 이 땅을 평화롭게 고르는 데에 쓰이라는 의미에서 손녀에게 이 이름을 골라주셨다. 내가 이름처럼 살고 있다는 것. 내가 오늘도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자답하며 오늘을 살아낸다는 사실. 내 삶을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나라는 우주는 그 마음만큼 더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 그 기적. 풀이 무성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누워 계신 곳을 생각한다. 오래 그곳에 남아 장성한 아이들이 당신처럼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을 상상한다. 그 기적을 마음으로 기린다. 가끔 어떤 사랑은 참 지독하다. 그 활활 타오르는 마음이 담금질되어 기적이 될 만큼.



엄마는 가끔 내 몸이 마르고 유연성이 없는 것이 꼭 할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아현이가 키가 크고 말랐으면서도 글래머러스한 몸매인 것도 꼭 할머니 같다고 한다. 흑백 사진 속에서도, 컬러 사진 속에서도, 할머니는 마르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에 키가 크다. 이제 돌아가시고 안 계신 할머니의 멋쟁이 오빠-남동생이실까 혹시-도 마르고 키가 컸다. 그렇게 멋있게 늙은 할아버지는 작은 외할아버지 다음으로 처음 봤다. 그분은 누이의 장례에도, 매부-혹은 매형-의 장례에도, 멋지게 차려입고 와서 오랫동안 우셨던 것 같다. 누이에게 잘해주지 못했던 그를 원망하면서도, 그의 마지막 길에 진심으로 슬퍼하며-그것이 용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눈물 흘리는 모순적인 마음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배고프고 어렵던 시절에 양산을 들고 꽃신을 신었던 멋쟁이 할머니가 가난한 집에 시집와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폭력과 체념에 닳을 대로 닳아져 버린 할아버지 곁을 지킨 강인함에 대해, 막둥이가 학교를 갈 수 있도록 새벽잠을 설치고 고무신을 품고 기다렸던 모정에 대해, 나는 가끔 생각하고 마음 아파한다. 폭력적인 할아버지를 평생 원망하고 증오했으면서도 그를 사랑했던 복잡한 마음을 생각하며, 외로워할 그를 생각하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깊은 마음을 상상하며, 가슴 졸인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전에 스스로에게 가혹했던 자기 자신부터 용서하였기를 기도한다. 할아버지 마음의 주인은 할아버지였고, 갑자기 찾아든 악의에 그 자리를 내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내 바람대로, 할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으셨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할머니 가는 길을 따라 걷지 않으실까 한다. 두 분이 걷는 길 위에서, 이제는 할머니가 당신 마음의 온전한 주인이 되셨기를, 그래서 발걸음이 조금은 더 가벼워졌기를 기도한다. 우리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숨결을 불어넣은 누군가의 삶이 들어와 있고, 우리 삶은 또 다음 생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먼 땅을 태초부터 지켰던 치페와 족과 와샤스크의 삶이 퍼트리스의 삶으로, 또 아킬레와 루이스 어드리크의 삶으로 이어졌듯이. 불쑥. 삶은 계속될 것이다. 마음의 주인이 삶에 찾아온 불운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 닿은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나와 우리 남매가 할머니 남매를 닮은 것처럼, 다른 누군가들이 품었던 그 마음들도 이어 닮았으면 한다. 눈치채지 못했지만 실은 기적인 이 하루들이 오래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그럴 수 있다고 벌써 믿고 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고 싶은 이야기 말고, 우리의 진짜 이야기가. 오늘 밤도 두 분이 누워 계신 곳에는 잔디가 짧고, 또 길게 성성이며 밤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밤을 지키는 사향쥐의 몸을 덥히는 잉걸불이 비 오는 여름밤 풍경에 타닥타닥, 소리를 튕기며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