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베르타 이슬라>로 만난 '정의를 말하는' 나

by 새벽녘 연필소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그만둔 순간부터 내 꿈은 검사 혹은 국제변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법학과 행정학을 전공하고 사회에 그 적용을 행하는 것이 직업이었던 아빠의 영향도 컸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정이었던 것도 장래희망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실제로 불의에 대항하는 것은 내가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사실과는 엄연한 별개의 문제였다. 현실에서 불의에 실질적으로 대항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무력한 스스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격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내 가녀린 한 몸을 지키는 것만도 자주 버거워했다. 아직도 이름과 얼굴이 뚜렷이 기억나는 누군가들이 이유 없이 손톱으로 내 얼굴을 할퀴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루나가 그 애들을 찾아가 혼내줬다. 무력(武力) 앞에서 속절없이 무력(無力) 한 시간들이었다. 그것이 내가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였다. 꼭 나의 일이 아니더라도 무력함에 노출된 여림에 힘이 되고 싶었다. 어린 마음이 늘 그렇듯 결심은 견고했기 때문에,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의(바를 정 正, 옳을 의 義)란 결코 한 가지 모습 만을 띄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꽤 크게 나를 절망하게 했다. 옳은 것마저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까마득히 아연해졌다.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르고 그렇다고 모든 부분이 완벽히 다르지도 않으므로 올바른 뜻이 때로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당연한 문제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꿈을 품은 시간만큼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 형님, 무슨 일이래? 전화를 다하고. 그래, 신혼 깨공장은 이상 없이 고소하고? 발신인에 선배의 이름이 찍히는 것을 확인하고 영락없이 부장님 식으로 전화를 받자 이미 모 대기업의 부장이 된 그의 목소리가 술에 젖어 있다. 야, 나 이혼해야 할 것 같다. 뭔 소리여. 갑자기 왜 이혼을 해? 그는 회식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청담 소재의 가라오케에 갔던 상황과 한 점 부끄러움 없었지만 그 사실을 아내에게 숨길 수밖에 없었던 마음, 그리고 아내가 우연히 휴대폰과 연동된 태블릿을 쓰다가 회식과 관련된 카톡을 보게 된 정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는 밤새도록 최선을 다하여 항변하였으나, 그가 핏대 세우며 쏟아내는 항변도, 회식하기 하루 전부터 접대 목적으로 가라오케에 가는 것에 대하여 극구 불가하다고 설명하는 내용의 선배의 카톡도, 배우자에게는 어떤 납득할만한 이유도 제공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네.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기 어렵고, 그게 어떤 무게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니까. 어, 니 티세요? 네 말이 맞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이게 좀 과하다고 느껴진다. 카톡으로도 나를 비롯한 몇 명은 남자끼리만 모여 앉고 여성분들도 부르지 않은 게 다 나타나 있거든.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지 모르겠다. 선배는 자신의 행위가 정의라고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내분의 정의에 끝끝내 동의하지 못했다. 내가 봐도 선배의 만류와 이제 그만 집에 가보겠다는 아우성은 절박에 가까운 최선이었지만, 종종 최선에도 불구하고 비극의 결말이 맺히는 것이 삶이다. 선배는 결국 이혼에 합의했고, 회사에서는 더 이상 선배가 참석하는 회식에서 선배에게 술이나 원치 않는 업장에서 자리를 지키도록 강제하지 않는다고 한다. 먹고사는 일이 아무리 질기다 한들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와 나도 굳이 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의인가에 대해서도 오래도록 의문했다.



인간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다면 우주는 조금 더 납작해질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이 서로소 상태라면, 혹은 공통인수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들은 사라지고 세계는 한 가지 모양으로 규격화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저마다 타인과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어지럽게 혼재하는 집합체고,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어 한 가지 자아로 그를 규정할 수 없으며, 규정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자아는 여전히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규정이 정확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존재다. 요컨대 인간은 서로 같기도 다르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다른 존재로 변모할 수 있고, 이에 연동된 감정, 이성적 판단, 가치관도 변동 가능한 불안정한 존재다. 따라서 특정 이벤트나 특정인에 대하여, 그에 관련된 모든 이해 관계인의 입장은 교집합을 가지면서도 다를 수밖에 없고,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자의 판단 역시 마찬가지다. 선배의 이혼은 정의와 그에 따라 용인 가능한 행위의 범주가 명백히 다른 이들의 관계에서라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사고였고 비극이었다. 이제 3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술을 마실 때마다 선배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기함을 토한다. 내가 누군가를 억울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혹은 억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면서도, 나는 기어이 떠난 그녀의 입장을 대변한다. 정의는 저마다 다르므로. 나의 정의는 그녀의 것을 이해하므로.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베르타 이슬라>를 읽으면서 아직 3년의 세월의 골을 건너오지 못한 선배의 기구한 결혼이야기와 좁히지 못한 정의의 거리를 생각했다. 본 작은 결혼에 대한 고찰, 사랑의 진실을 그린 작품이라는 평이 많은 작품이지만, 내게는 이 이야기의 본질이 정의의 대립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작품의 요점은 서로에게 진실해야 사랑이 성립할 수 있다거나 결혼이 순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는다. 본 작은 사랑과 그 제 도적 현화인 결혼은 인간관계의 특별한 사례일 뿐이고,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진실한 태도가 있어야 평화롭게 유지되고, 서로가 다른 정의를 추구할 때 각자의 정의가 보편적 진리와 상식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야 더 높은 차원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본 작은 여러 개의 외부의 이야기를 축으로 삼고 베르타와 네빈슨의 실체 없는 갈등을 견주며 나아간다. 특히 이 부부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내는 이야기는 단연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5세>의 일부다.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하비에르 마리아스가 셰익스피어를 차용한 것은 작품 외적으로도 무척 흥미롭다. 헨리 5세는 전쟁 직전 병사들의 틈에 몰래 숨어 들어가 병사들이 전쟁의 대의(큰 대 大, 옳을 의 義)를 궁금해하고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전쟁을 위해 바친 자신의 목숨의 가치가 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에 대하여 가벼운 험담을 나누는 것을 듣게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병사를 만나게 되어 병사에게 오래전 새벽 전장에서 대화했던 사람이 자신, 즉 왕임을 밝힌다. 네빈슨은 헨리 5세의 이야기에 대하여 관심 있어하면서도 자신과 헨리 5세가 상당히 비열한 방법을 채택하는 스파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나아가 자신과 자신의 조직이 '왕국', 즉 영국의 대의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싸우고 있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의미에서의 정의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자신이 조직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조직에 배신감을 느끼고 조직을 떠나고자 하고 나서야, 왕국과 정의를 위해서 헨리 5세와 MI6가, 그리고 그 자신이 선택한 방식이 배신 그 자체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반면 베르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헨리 5세와 토마스의 애국이 절대적인 정의는 아니라고 일관되게 생각한다.



국가가 내세우는 대의는 권력자의 가치관에 따라 운신(움직일 운 運, 몸 신 身)한다. 천문학적 비용을 소모하는 국가사업이 대선과 총선으로 예시되는 패권 다툼의 결말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현대인은 이를 충분히 체감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는 어떠한가. 우리는 모두 다르고 따라서 정의는 온전히 한 가지의 모습일 수 없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옳은 뜻이 TPO에 맞춘 옷차림처럼, 끝없이 변동하는 상황에 따라 마구 흔들린다면 한 사람 안에서 양립 불가능한 정의가 충돌을 빚는 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토마스는 권력의 향방에 따라 흔들리는 국가적 대의를 자신의 정의로 삼았다가, 남은 평생 동안 말없이 발코니에 멍하니 서서 자신의 게을렀던 과거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게 된다. 어떤 관념이 정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중요 줄기만은 흔들림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요컨대 정의가 정의이기 위해서는 그 뜻을 둘러싼 공동체의 컨센서스를 요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보편타당한 선의를 침범해서는 안되고, 차라리 유연한 상태를 유지할지언정 정의가 정의가 될 수 있는 정의가 정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부지런한 검토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뜻을 정의로 승인한 사람의 이야기 안에서는 일정한 항상성을 요한다.



베르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정의(정할 정 定, 옳을 의 義)한 정의가 진정한 정의 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끝없이 자신이 확보한 정보의 진위를 가늠하고, 자신의 사고의 타당성을 검열한다. 반면 토마스는 갑작스러운 비극 앞에서 중심을 잃고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타인에 의해 강요된 정의를 정의로 승인한다. 갑작스레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몰린 상황에서 혐의를 말끔히 해소해 줄 수 있는 방안을 제안받으면,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타는 아들이 죽을 뻔한 상황을 겪고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이 가진 극히 일부의 정보로라도 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베르타와 토마스는 자신들의 관계 밖에 애인을 두고 주기적으로 혹은 불특정다수와 단발적으로 섹스를 한다는 엄밀한 배신행위를 큰 죄책감 없이 행하는 공동의 유책을 지고, 성생활에 있어서는 보편적 의미에서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형성에 공동 합의하고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는 관계 자체에 대하여 베르타가 토마스보다 정의로움에 있어 우위를 점하는 이유는, 그녀가 관계에 있어 진실한 태도의 중요성을 믿으면서도 그것의 중요도를 입증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자신이 믿는 정의가 타인의 정의와 대립할 때 상대의 정의관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서로 존중하는 상태 그대로 병립 가능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허용 가 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독자는 베르타의 사고를 따라가면서 토마스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한 그녀의 인고를 함께 겪는다. 네빈슨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자는 그의 선택에 돌을 던질 수 없다. 다만 베르타의 시선을 따라서 자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자문하게 되고, 자문에 자답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정의를 살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실존적 자아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삶의 주체임을 포기하고 타인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 것인가. 그것이 정의라고 합리화하면서. 혹자는 그 선택에 공감하겠으나,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상처받은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도, 자신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덜 가치 있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던 수많은 다른 정의들을 반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 작은 정치적으로 격동하는 시대의 유럽과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전지적 작가시점도 감히 다룰 수 없는 드러나지 않은 역사와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비극적 선택들에 대하여 입장 바꿔 생각해보게 한다. 결과적으로 불의에 가까운 것들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입장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면 함부로 그 사연에 돌을 던질 수 없다(물론 이 이야 기 안에서 폭력성을 포함한 보편 불타당한 뜻은 늘 논외로 한다). 이런 배경은 서로 다른 생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본작의 주요 줄기를 전개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스페인은 특히 파시즘, 독재, 공산주의 등 한 시대를 유린한 이념들의 열병 같은 유행과 이를 불의로 정의하고 맞선 상대 진영과의 갈등이 과격하게 일어난 땅이므로, 뜻의 대립과 그것의 화해 과정을 베르타와 토마스의 관계에 고스란히 투영한 것으로 읽기에 큰 무리가 없다. 베르타는 자신이 불의로 일축하고 배격한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자신의 정의를 보호하는 대의의 어불성설을 꼬집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것과 다른 정치관을 틀린 것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자신의 흔들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나아가 때로는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유혹에 투신해보기도 한다. 이는 그녀가 투프라에게서 관능적 매력을 발견하고 그와 짧게나마 섹슈얼한 관계를 경험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사무치게 외로워하면서도 어떤 다른 남자와도 안정적이고 긴 관계를 맺지 않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베르타는 자신의 성적 첫 경험을 공유한 투우사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결국 그를 찾아내 만나기로 약속하기까지 하지만,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것으로 추억을 정리한다. 때로 어떤 의미는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이는 베르타가 타인의 가치관과 정의를 존중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지만, 그 기반에 사랑이 전제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베르타의 기다림과 토마스의 그리움은 닮아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거나, 그래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렇지 않게 되거나. 실컷 정의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생각, 정의, 뜻이 나란히 걷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랑. 발코니에서 몇 년을.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끔 오래 깜깜이 잊으면서도 또다시 한참을. 그렇게 지워져 버린 오래 그린 얼굴과 식탁에 마주 앉는 것. 말없이 멍하게 앉아 있는 얼굴에 빛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 어떤 정의가 다른 정의를 침해할 수 있는가. 인간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정의라고 불려도 괜찮을까. 어쩌면 정의는 바르고(正) 또 옳은(義)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진실된(정 정 情) 마음과 뜻(뜻 의 意)이 아닐까. 이 글을 쓰다가 외할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90여 년의 시간이 남은 자리에 그 기억을 다독이며 좋은 길로 모시고자 많은 이들이 모였다. 할머니는 지독한 남아선호사상 신봉자셨다. 엄마는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수원이라는 이름 대신, 남아의 잉태를 암시하는 용꿈 태몽을 타고 태어났으나 나고 보니 여아였다는 이유로 거의 평생을 서운이라고 불렸다. 서운하다는 뜻이었다. 당신은 첫 손자이자 장손보다 나이 많은 맏손녀에게는 가이내가 쓰잘데기 없이 공부하지 말고 얼른 시집이나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가이내는 자라서 장손보다 월등한 학업성적을 자랑하며 명문에 진학했지만, 당신은 손녀를 만날 때마다 얼른 시집이나 가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남긴 몇십 억대의 유산은 모두 외삼촌에게 상속되었다.



할아버지의 폐암 투병을 위해 민들레를 캐러 다니던 큰 딸 서운과 이모들은 친정의 가계에 어떤 기여도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의 모든 딸들은, 우리의 정의와 다른 뜻으로 살았던, 보편타당하지 않고 편협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냈던 외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눈물 흘렸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아내를 원망하는 선배에게도, 자신과 다른 정의를 살아내는 남편을 용서하지 못한 그의 아내도, 부디 점점 사랑 안에서 서로의 정의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삶 속으로 나아가길 기도한 다. 여전히 외할머니의 뜻(옳을 의 義, 뜻 의 意)이 정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모진 세월을 살아낸 인생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그녀의 마음이 누군가를 베던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이 행복이었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 그 그늘 아래에서 자란 모든 삶들이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타인의 뜻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오늘을, 인생을 살아내기를.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유산(남길 유 遺, 낳을 산 産, 앞 세대가 물려준 정신)에서 자유롭기를. 자신에게서 찾기를, 정의란 무엇인가의 정답(바를 정 正, 해답 답 答)이 아닌 정답(정할 정 定, 해 답 답 答)을. 평생을 베르타 네빈슨이 아니라 베르타 이슬라로 살기로 하고 그 이름으로 살아낸 그녀처럼,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기를. 내가 믿는 정의로 살아가기를. 그것이 사랑에 기댄 따뜻 한 정의이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나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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