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유령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가여운 것들>로 만난 '유쾌하고 우아한' 나

by 새벽녘 연필소리

수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는 잔인하리만치 엄하고 각박하다고 할 만큼 흔들림 없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태산 같이 강인하고 눈 덮인 산천처럼 평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뚝뚝, 떨림을 떨어트리며 요동쳤다. 악은 참으로 이상하다. 악의 본질은 평범성에 있다. 한나 아렌트가 강변했던 것처럼 악은 평범하다. 평범함은 일상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모아 우주를 만들 만큼 힘이 세고, 악은 이 평범함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악은 일상의 얼굴을 하고 인간의 주변을 맴돌다, 일상이 삶의 두께로 쌓여갈 때, 사고(事故)로, 비극(悲劇)으로, 사소하더라도 어떤 계기만 있으면 일상을 잠식시킬 수 있을만한 크기로 점점 자신의 몸집도 키워나간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은 과거의 자신에 대해서 당이 시키는 바를 충실히 해내는 공무원이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생각의 무능, 삶에 수동적인 자세, 수단으로써 폭력의 보편화, 게으르기 때문에 선택한 직관적 범주화.



그는 공무원으로 은퇴했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 지 불과 한 분기 만에, 센터장으로 취임한 준공공기관에서, 그와 함께 일하는 직원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사고를 겪었다.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소리 죽여,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요하게 울었다. 그는 드센 세월에 얇아진 온몸이 화분, 명패, 의자 등으로 내려 찍히는 무차별 폭행에 속수무책으로 노출 됐다. 흰머리를 감싸 쥔 왼팔 뼈에 그어진 금처럼. 그날 내 영혼에는 쩌적. 겨울이면 얼어붙은 계곡에 산천이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전화를 끊으면서 이야기했다. 용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들도 있고, 먹고살아야 하는데, 내가 젊은 사람 앞길 망칠 수도 없고. 그런데, 용서가 잘 안 된다. 그날부터 내리 열흘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보냈다. 악의 평범성. 밤마다 나는 한나 아렌트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복수의 충동에 시달렸다.



복수(復讐). 돌려보낼 복, 원수 수. 원수에게 받은 상처를 되갚겠다는 의지, 깨트릴 수 없는 정념.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퍼런 색깔로 차디 차고, 유빙 한가운데에서도 활활 타오르는, 가장 순수하지만, 가장 깊고 크게, 피로 얼룩진 감정. 암막 커튼 뒤로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까지 신열이 오르는 사람처럼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그 밤들 속에서 내 얇은 외피 안에 숨어 있었던 평범한 얼굴을 한 악마를 보았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못 되어도, 부끄러운 삶도 아니었다는 울먹임이 이명으로 맴돌았다. 아버지를 때린 누군가의 아버지. 그에게 복수하고 싶은 심장 때문에 매일 밤 열병을 앓고, 실핏줄이 곤두서 시뻘게진 눈으로 출근했다. 아침마다 거울 속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물었다. 복수해 줄까.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복수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중요하지 않은 그것을 원할 뿐.



메리 셸리가 한국 나이로 22살이 되었을 때 발표한 <프랑켄슈타인>의 본질은 복수다. 프랑켄슈타인은 '실수로' 괴물을 창조하고, 괴물은 박사를 창조주라고 부르면서도 그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에 불탄다. 영리하게도 메리셸리는 작품 내 절대악을 만들지 않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지만 독자가 이 복수도, 저 복수도,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납득하면서부터, 독해의 방향이 다양화됨에 따라 읽는 사람의 심정도 점점 복잡해진다. 특히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만든 괴물 사이의 논쟁은 종교, 인문학, 과학, 심리학, 사회, 제도, 윤리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여 정답 없는 토론 속에서 독자들이 스스로는 그 화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답하게 함으로써 대립구도가 팽팽해지게 만든다. 독자의 어떤 화두의 가치관은 프랑켄슈타인에게 가깝지만 다른 화두의 가치관은 괴물에게 더 가까운 식으로 갈팡질팡하게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본능적으로 '누구를 응원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어떤 복수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하고 스스로의 판단을 저울질하면서 이야기는 다양한 단면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초반 <프랑켄슈타인>이 발표된 지 150여 년 후에,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가여운 것들>이 발표된다. 본 작은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트모던적 재해석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가디언 소설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과 일반 독자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는다. 프랑켄슈타인이 그러하였듯 저명한 외과의사 콜린은 모종의 실험을 통해 아들을 얻는다. 아들 벡스터는 콜린의 사후에도 콜린경의 실험실을 물려받아 실험을 계승한다. 고드윈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몸집이 눈에 띄게 거대하고 추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소화기관에 심각한 문제를 앓고 있는 등 누군가에게 사랑받기에 열악한 조건 속에 있다고 진단하고, 따라서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성을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비교하건대 드디어, 본 작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아들(피조물)은 그토록 원하던 반려자를 자신의 손으로 '조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이 프랑켄슈타인, 아버지 콜린경의 입장을 겪게 된다. 추측건대 그가 벨이 어떤 짓을 벌여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싸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벨의 입장을 겪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콜린 박사가 자신의 연원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벡스터는 자신이 실험실에서 태어났음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에서 구해주고, 생존의 조건을 만들어주고, 보살피던 여성 벨은 유독 지독한 사춘기를 겪게 된다. 벨은 고드윈을 갓(God(win))이라고 부르며 따르지만, 고드윈의 대학동기 맥캔들리스와 약혼을 선언한다. 약혼 후 그녀는 자발적으로 벡스터의 변호사와 야반도주를 하고, 신혼여행을 겸하여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성착취, 성매매, 경제활동 등 극단적인 경험을 두루 하고 돌아온다. 돌아온 탕아는 맥캔들리스와 결혼을 마음먹고, 맥캔들리스 역시 그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사랑하기로 한다. 그러나 결혼식장에 그녀의 아버지와 전남편이 불청객으로 찾아들면서, 그녀가 고드윈 손에서 다시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자신이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게 된다. 충격 속에서 모두가 당황하지만, 그녀는 홀연히 자신의 삶과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여 선언한다. 그리고 고드윈의 축복 속에 맥캔들리스와 결혼한다.



본 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벨이 자아를 탐구하여 그것을 발견하는 심오한 과정과, 나아가 성별과 나이 등을 이유로 자신의 의미를 제한하려는 인간들에게 굴하거나 스스로 구애받지 않고 자아를 선언한다는 진지한 내용을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유머와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벨은 비극적 상황의 원인제공자를 눈치 보지 않고 서슴없이 비꼬고, 자신에게 여자다움이나 처녀다움 등 일방적 기준을 강요하는 인간이 되려 남자답지 못하거나 직업적으로 프로의식이 부족한 경우 그를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이런 모습을 형식상 거대한 부조리극이자 내용상 아주 웃긴 블랙코미디로 그린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본 작은 앨러스데어 그레이가 버려진 서류더미에서 발견한 맥캔들리스의 책의 내용을 옮기고 살짝 손보아 펴낸 것으로 설정하고 있어, 형식적으로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미 버려진 책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자신의 현대적 재해석을 버려진 책에 주석과 그림을 삽입하고 약간의 편집을 가하는 버려진 책의 편집행위로 빗대고 있다. 요컨대 본 작은 기득권이 억지로 다양성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강력히 반대하고, 일정한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는 편협한 사고에 일갈하되, 그것을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괴물은 부르짖는다. 나를 창조하였으니, 복지와 행복을 책임지라고. 벨은 거대한 벡스터를 감싸 안는다. 시체가 된 자신을 인간으로 재창조한 것이 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직접 갈등을 겪게 한 반면, <가여운 것들>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힘을 합쳐 외부와 갈등하게 함으로써 강력한 결속을 도모한다. 유연하고 복잡한 감성과 사고를 타고난 인간이라는 존재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모르던 낯선 면모를 발견하였을 때, 그리고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잣대로 보아 특수한 것일 때, 스스로를 용서하거나 벌하거나 파편을 없애버리는 선택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부분은 그 발견을 외면하고 모르는 척 한 채로, 혹은 정말 지워버린 상태로,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에게서 툭 튀어나오는 잊고 지내던 자신의 조각과 비슷한 누군가의 단면 앞에서, 그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그의 단면을 이해하기보다 그 특수한 면모를 통제하지 못함을, 그리하여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손가락질한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채로 툭. 튀어나올 어떤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프랑켄슈타인과 갓의 결정적 차이는 여기에서 발견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서 흉측한 자신의 편린을 발견하고, 그 계기를 제공한 괴물을 증오한다. 그러나 고드윈은 벨에게서 현격하게 저하된 지능, 문란함,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주관 등 혼란을 발견하고, 그 혼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런 벨을 인정하고 안아줌으로써 자신의 한계와 단점도 함께 인지하고 안아주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이고, 다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고,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의 행적은 무상하다. 인생은 거대한 농담이고 모순이다. 인간은 무력하고, 그래서 가여운 존재들(Poor Things)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규명하고 선언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의 의미를 섬세하게 세공하는 이 과정에 진지하게 임하되, 그렇다고 늘 심각하고 슬프게 존재를 짊어질 필요도 없다. 본 작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쿤데라식 실존주의와 일맥상통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떠올리게 한다. 어둡고 처연하며, 늘 같은 곳으로, 시작점으로 돌아와야 하는 곡의 운명이 괴물의 슬픈 운명과 비슷하고, 위대한 연주가였던 호로비츠와 2022년 클리번에서 금메달을 딴 악마적 재능의 소유자 임윤찬의 곡 해석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3악장으로 넘어가면서 속도가 현저히 빨라지는 임윤찬식 라흐마니노프는 헌걸스러운 몸짓으로 그러나 비참한 심경을 안고 준엄한 산맥을 넘나 들며 자신이 누구인지 울부짖는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본 작은 볼컴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지은 곡, Graceful Ghost Rag를 연상하게 한다. Graceful Ghost은 애도와 추모라는 작곡 의도에 비해 처연하면서도 때로는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로 4분의 4박자 싱커페이션 리듬을 리드미컬하게 이끈다. 이 곡은 에튀드들, 예컨대 쇼팽의 나비 op. 25 no.9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4분의 3박자의 왈츠를 생각나게도 한다. 1980년대 흑인 피아니스트들의 스타일에서 발전하여, 1990년대 재즈의 핵이었던 래그(타임) 스타일의 이 곡이, <프랑켄슈타인>의 재해석으로 평가받는 본작과 느낌마저도 비슷하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 양인모의 Graceful Ghost는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의 뇌와 몸의 간극에서 오는 고통을 오롯이 홀로 겪으면서도, 씩씩하고 유쾌하게 웃으며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규명해 내는 벨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연원이 철저한 미궁 속에 있다는 점에서 유령과도 같고, 그녀가 자신을 유령으로 여기고 방황하는 순간은 유쾌하면서도 비극적이고 무상하지만, 마침내 과거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순간, 자신을 천박한 것으로 여겼던 모든 타인의 시선을 타파하고, 품격(Graceful)을 되찾는다.



그는 그 큰 광대뼈에 시퍼런 멍을 얹고, 몇 날 며칠을 말을 잃은 채 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유령 같은 그를, 그가 우리 가족에게 갖는 의미를, 그가 생각하는 그의 존재 의미를, 그가 살기로 결정할 삶을, 그의 침묵을 인정하고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유령처럼 텅 비어 있는 그의 동공을 보면서, 큰 딸은 시큰한 정념 속에 있었다. 살면서 파괴에 대한 욕망에 그토록 심하게 시달려 본 적이 없었다. 악의 씨앗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욕망 또한 마찬가지였다. 복수심은 점점 까맣고 단단하게 구체화되었다. 만약 그가 오래지 않아 정신과를 찾아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잠을 자지 않았더라면,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음계를 따라 건반을 끌려다니며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 속에서 흔들리는 노년 남성이었다가, 이내 곧 품격 있는 어른으로 돌아왔다. 진심 어린 사과. 그는 딱 한 가지만으로도 자신을 죽이려던 몸짓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그는 힘 없이 희미하게 웃고 때로 자신이 나약해졌음을 슬퍼하지만, 딸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범죄도시 3>을 보고 박장대소하고, 가끔 카톡으로 소소한 농담을 건네고, 새로 시작할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담담하지만 유쾌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다행히 내가 겪었던 병(病)도 품격 있는 어른과 래그의 리드미컬한 리듬에 맞춰 왈츠를 추는 동안 조금씩 나아졌다. 아직도 나는 나의 아버지를 때린 누군가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다. 일련의 사고를 부덕의 소치라고 자책하는 나의 아버지가 가여워 견딜 수 없다. 그러나 60여 년간 함께 살아온 자신의 모습과 작별을 고하면서도, 그 가지런한 하얀 이를 내놓고 웃는 그를 응원하는 것이, 그가 스스로 선택한 존재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품격을 인정하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벨이 그랬던 것처럼, 아빠의 삶도. 그리고 나의 삶도. 센 박과 여린 박이 자리를 바꿔 당김음이 울려 퍼져도, 스스로가 정한 발걸음에 맞춰 춤을 추면서 이어져 갈 것이다. 운명 앞에서 우리는 유령처럼 무력하고, 우리 존재는 한없이 가엾지만, 그 흔들림 없는 단려(끝 단 端, 고울, 아름다울 려 麗)한 발걸음 속에서 기품(기운 기 氣, 품격, 품위 품 品)을 지키리라. 유쾌하고 우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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