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석조를 기다린다.

조예은의 <만조를 기다리며>로 만난 '내일로 나아가는' 나

by 새벽녘 연필소리

대지의 질척한 아가미가 썰물을 벗고 뻘로 반짝였다. 뺨과 무릎이 닿으면 사정없이 여린 살을 헤집어 놓을 기세로 따개비가 딱딱한 아가리로 바위 위에 동글동글 무늬졌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와 단둘이 보낸 최초의 순간 속에서, 나는 넘어지면 회색빛 석회질이 온몸에 붉은빛으로 맺힐까 두려워 아빠의 길쭉한 정강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나래야, 쩌 굴 있은게 잠깐 놔봐라. 아빠가 따줄게. 작은 몸에서도 가장 여리게 여문 오금에 기대, 차 키로 굴을 따는 아빠를 지켜보았다. 휘청휘청. 굴등이가 가득 맺힌 바위를 지나와 차 키에 매달린 알찬 굴을 딸에게 떠먹여 주며 아빠는 달처럼 웃었다. 마시따. 나도 달을 마주 보고 달처럼 웃었다. 서로를 보살피는 것이 서툰 부녀를 두고 잠깐 자리를 비웠던 엄마는 나중에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어린 딸에게 함부로 그것도 비위생적인 방식으로 날것을 떠먹인 남편에게 그 날 봤던 따개비만큼 잘고 날 선 잔소리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굴을 먹을 때마다, 따개비가 바위틈에 둥글게 몸을 구겨 넣은 바다의 풍광에 닿을 때마다, 채석강의 풍경 안에서 아빠와 단둘이 나눈 짭조름한 추억을 선연히 눈앞에 그려보다 소중히 접어 품속에 챙긴다.



아빠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지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에게, 내 손으로 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전에 없이 새롭고도 행복한 기억을 떠먹여 준, 철없던 시절의 나의 아빠를 가장 사랑한다. 얘네. 안 보이다가 왜 갑자기 나타나써. 바다 어디가쩌. 아빠는 작은 입으로 초장도 없이 날것의 비릿함이 생생한 굴을 오물거리는 딸에게 조약돌 몇 개를 땅에 올려 조수간만의 신비에 대해 가르쳤다. 밤에 뜨는 달님이 우리가 사는 지구를 돌고 있는데, 우리가 사는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고 동시에 스스로도 빙글빙글 돌고 있다. 때문에, 달과 지구가 가까워지면 원심력과 인력 때문에 바닷물이 달을 향해 모여 부풀어 오르게 되고, 그 반대편도 바닷물이 바깥쪽으로 쏠려 부풀어 오르게 된다. 이 때문에 대륙 쪽으로 물이 밀려오는 만조와 물이 빠지는 간조가 발생하며, 천체의 자전주기와 공전주기 때문에 조석(조수 조 潮, 조수 석 汐)의 주기도 비교적 일정하다. 그리고 아빠가 나에게 굴을 따 주고 조석의 신비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던 그날의 바다가 전세계적으로 만조와 간조의 차이가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한 서해바다였다. 대단한 것을 설명하고 그 설명을 이해한 기분에 부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나는 썰물이 좋았다. 간조에 무방비로 세상에 드러난 바다의 밑바닥이 좋았다. 이름을 다 외울 수도 없는 신기한 존재들이 하늘을 향해 동그랗게 파놓은 숨구멍들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그 신비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철없는 아빠의 까만 눈이 좋았다. 만조의 순간이 돌아오기 전에, 오랜만에 만난 공기에 허파를 열어젖히는 자연의 무구함에 매료되었다.



어리고 여렸던 딸은 자라 아빠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단단해졌으며, 연인들 혹은 친구들과 함께 수많은 바다들을 보았지만, 어릴 적 아빠와 함께했던 바다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바다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의 바다는 늘 가득 차 있었지만 충만한 만조 속에서도 인간의 숙명은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내내 외로웠고, 물이 밀려들어와도 가득 차지 못한 채로 기어이 고독했다. 간조를 기다렸다. 차라리 내 밑바닥을 훤히 들여다보며, 물리적으로 나와 나 자신만이 남을 순간이 간절했다. 나는 그렇게 서울을 떠났다. 밀물이 들어찬 순간이 관계와 시간의 밀도를 의미한다면 정해와 우영은 나와 같은 목적으로, 그러나 석조를 기다리는 나와는 반대로 만조를 기다린다. 나는 만조를 기다리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태 석조를 기다려와서가 아니라 한 번도 정해와 우영의 기다림과 외로움을 겪어보지 못했으므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것과 일치하는 상태와 태도를 겪어보았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조예은의 <만조를 기다리며>는 정해와 우영이 각각 혼자가 되기 위하여 만조를 기다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해는 소녀였던 시절, 어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정념에 사로잡혀 썰물 때를 틈타 만조가 되면 물이 가득 차는 바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달이 인력이 바닷속 깊이까지 닿는 순간을, 영영 혼자가 되기 위하여 만조를 기다린다. 우영은 어른으로 자라지 못해 영영 소녀인 상태로, 만조를 타고 믿음을 떠나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믿는 삶을 살기 위하여, 삶의 의미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결정하는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하여, 그리하여 자신의 바다에서 역시 영영 혼자가 되기 위하여 만조를 기다린다.



광적인 믿음, 광적인 그리움, 광적인 사랑. 너무 강력한 마음은 때로 아무리 믿고,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게 한다. 영산은 엄마 없이 홀로 남겨진 우영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우영과 엄마가 만날 수 있도록 해주지만, 그녀는 엄마를 또 만날 수도 있다는 욕심과 믿음 때문에 죽은 엄마와의 조우가 영산의 마지막 배려임을 알지 못하고 영산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 사랑과 기다림이 너무 깊은 나머지 자신이 그 안으로 침잠하여 스스로를 망가트리면 다시 엄마를 만나도 떳떳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쩌면 다시 엄마를 만날 수도 없을 만큼 망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급기야는 영산이 우영의 온전함을 위하여 우영의 부모를 다시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고, 깊은 그리움과 작별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세월의 증표인 정해와도. 정해는 어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강력한 열망에 사로잡혀 바위틈에서 만조를, 죽음을 기다리지만, 애처롭게도 죽음의 목전에서 정작 자신은 살고 싶어 함을 깨닫는다. 정해를 구하러 간 우영은 정해는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을, 정해가 얻은 살고 싶다는 마음을 눈치챈다. 우영은 정해에게 삶을 찾아주고자 했고 성공했지만, 정작 자신은 죽은 엄마와의 만남이 없다면, 자신을 영산에 묻어 줄 아버지마저 없다면, 그래서 혼자 외로이 쓸쓸히 영산에 남아야 한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정해와 우영이 했던 숨바꼭질은, 세상에 혼자 남아야 한다면 기어이 죽고야 말겠다는 우영의 외로움에 대한 선전포고의 순간이자 삶의 자세를 상징하고, 동시에 정해가 어떻게든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물론 정해는 이 결심 후에도 주체적으로 삶을 꾸리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가 본작에서의 현재를 겪고 나서야 실존을 이룩하지만-을 상징한다.



우리 숨바꼭질 기억해? 우영이 미처 보내지 못한 질문에는 등껍질바위의 어둠 속에서 죽어가던 순간을, 숨바꼭질의 기억을 섬에 남겨놓고 떠나기로 결심하며, 우영이 마음먹었을 미래가 묻어 있다. 죽어도 좋아 그러나 너만은 살아. 정해에게 보냈던 마음을 우영은 자신에게도 허락하기로 한다. 그 질문에는 새로운 삶을 꿈꾸며 배가 선착장에 닿는 순간을, 만조를 기다리며 우영이 마음먹었을 미래가 묻어 있다. 우영의 유일했던, 평생의 단짝에게 쓰였다가 끝내 보내지지 못한 물음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맺혔을까. 둘이 만났다면 어떤 이야기가 이어졌을까. 너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있어서 영산에 남았던 것, 너무 믿었던 마음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것, 너무 욕망한 탓에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 너무 그리워했던 탓에 서로 빗나간 마음들. 이제라도 더 넓은 세상에서 조금 덜 믿고, 조금 덜 욕망하고, 조금 덜 그리워하더라도, 빗나가지 않은 채로 마음을 맞추면서 천천히. 숨바꼭질은 그만하고 곁에 있는 이와 2인 3각으로 걷고 싶다고. 만조가 오면 영산에 닿은 달의 인력을 타고 바위 밖으로, 영산 밖으로, 미세기가 없는 어떤 바다까지 나가보고 싶다고. 아스라이 작게 빛나는 별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만을 위해서 사랑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마저 외롭고 슬픈 것만은 차마 허용할 수 없었던 정해가 차마 쓰이지 못한 그 마음을 이어받기로 한다. 숨바꼭질 덕분에 살게 된 이 삶을, 어떤 마음으로 살기로 했는지, 어떻게 살기로 했는지. 절벽에 혼자 앉아 만조를 기다리며 정해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오래전 등껍질바위에서 미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삶의 향방을, 그녀는 비로소 스스로 결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산은 정해가 실존을 이룩하는 순간, 정해에게 이미 실존을 상실한 우영을 보여준다. 다시 혼자가 되어 만조가 되면 배를 올라 석조를 타고 떠나겠지만, 평생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이것이 마지막이겠지만, 그래서 정해에게는 우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순간의 연대는 영원으로 연장된다. 정해에게 그날의 바다는 평생 다시없을 장면이 될 것이다.



조예은 작가의 작품에는 연대와 사랑이 있다. 그리고 권선징악. 본작에서 정해와 우영이 사랑으로 연대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영산교의 현교주 최양희가 죽는다.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에서는 화영과 도하가 사랑으로 연대하여 비극을 극복하고, 악령과 한정혁이 생을 비참하게 마감한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에서는 블루와 썸머가 사랑으로 연대하고, 블루는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수도 없이 차원을 건너며 영주를 도끼로 벤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에서는 주인공 모자가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되돌리고, 자신의 연인과 어머니를 괴롭게 하는 존재들을 세상에서 베어낸다. 벤 것이 악이라고 하여 죄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화영과 블루, 그리고 모자는 모두 시스템이나 운명이 내리는 형벌을 받는다. 정해는 배가 뭍에 닿자마자 경찰에 우영의 피살을 알릴 예정이고, 그 수사 과정에서 정해 또한 최양희의 죽음에 대한 죄책을 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정당방위가 인정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감형의 여지가 있으나, 정해의 결혼식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조예은 월드의 연대는 약자를 중심으로 하고, 약자라고 해서 늘 선한 것만은 아니다. 악인에게도 나름의 서사가 있지만, 그 이야기가 악인의 악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그저 모든 우주는 하나의 이야기이므로, 악인이라는 우주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일 뿐. 따라서 약자가 악인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불가피하며 정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들은 연대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진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결정하고, 자신이 선택한 대로 오늘을 살아내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이 만든 미래를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감당해 내야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고, 나는 그것을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선택적 숙명이라고 부른다.



나는 여전히 간조를 기다린다. 바다는 단 한 번, 아빠와 내가 방파제 근처의 바위에 위태롭게 서있던 어느 날, 가장 아름다운 석조의 한 장면을 허락했다. 쉬이 바다가 다시 그 장면을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지만, 미련한 미련으로 그날만큼 아름다운 간조를 기다린다. 다시 오지 않을 미래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절대 불변의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아빠의 어깨에 기댄다. 도래하지 않은 악에게 우리의 연대에 대한 위협을 가한다면 가차 없이 베리라고 일갈한다. 어떤 책임도 달게 지리라 생각한다. 정해에게 바다가 우영과의 두 번째 일출을 허락하였듯이, 나에게도 아빠의 손을 맞잡고 지켜볼 두 번째 석조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그때의 그 바위를 지키는 바위지기는 되지 않기로 한다. 저 멀리 밀물이 넘실대는 것이 보인다. 인력과 척력이 지나치고, 간조와 만조가 만나는 순간이다. 달의 움직임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마법적인 순간이다. 어느 날 영산이 내게도 아빠의 어깨와 내 어깨가 만조와 석조의 경계에서 빛나는 윤슬 때문에 나란히 빛나는 마법 같은 순간을 한번 더 허락하리라. 그러나 너무 믿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나는 나를 들여다보며 오늘의 나를. 살 것이다.



엄마는 부처님께서 중생이 보잘것없어 보일까 걱정하며 법당 한구석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올려놓은 과일 한 알도 너른 마음으로 찬찬히 굽어보신다고 했다. 가족의 품을 떠나 만조의 등에 넘실넘실 몸을 싣고 혼자 세상에 나와 신앙도 돈으로 일군다는 냉엄한 현실을 배우고 나서도, 조계사 주차장에 가득한 외제차를 지나쳐 법당 앞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말씀 덕분이었다. 성균관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오면 꼭 조계사 앞을 지나가야 했는데, 마음이 어지럽고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날이면 절 앞에 내려 경내로 들어갔다. 만 원을 시주함에 넣으면서 부처께서 내가 과외로 벌어서 내놓는 작은 돈도 외제차에 실려 오는 큰 액수의 공양만큼이나 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심을 느꼈다. 믿음과 그에 대한 신의 답변을 담보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잔인한 세상사 한가운데에서도, 사랑이 존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기적이 존재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내 기도를 들어줄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내게 특별한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환승을 위해서 안국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탔고,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책에 매달렸다. 때로는 진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믿음보다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들여다보는 것에서 의지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너무 강한 믿음은 믿음의 주체가 믿음 없이 설 수 없게 한다. 사랑하는 것을 돌볼 수 없게 한다. 우리는 감정과 관념, 믿음의 주체이고, 그것들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래서 아빠와 살뜰히 굴을 노나 먹었던 어느 늦여름의 바다를 그리워하면서도, 만조가 띄운 배를 타고 더 넓은 바다로 나가볼 생각이다. 내 힘만으로 노를 저으며. 내가 정한 방향으로 힘차게. 만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끝에 맺힐 석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