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으로 만난 '운명보다 위대한' 나
차가운 상공의 기운이 두터운 기체를 뚫고 책장이 넘어가는 새벽을 동그랗게 껴안는다. 문득 여행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한다. 여행은 삶과 비슷하다. 인간은 안정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여행할 때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사고를 겪으며 자신이 미처 통제하지 못한 여과되지 않은 면모를 세상에 내보이고 스스로도 발견하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은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여정들의 총합이다. 인간은 많은 자아를 가지고 있고 시기에 따라 주된 자아로 발현하는 자아가 달라지기에,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베트남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여행의 끝을 유예할 수밖에 없는 애처로운 운명들을 지켜보며,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으면서도 그렇다고 여행을 쉬이 끝내지 못하고, 그저 길을 연장하고 싶다는 정처 없는 충동에 이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시내가 즐겨 쓰는 강의 제목인 '여행 같은 삶, 삶 같은 여행'처럼, 삶과 여행은 닮아 있다. 삶의 끝은 삶 같은 여행의 끝과 어쩌면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이십 대 초반. 한 번도 실패를 겪어 본 적 없는 인생에서, 사법시험과 부동산 투자라는 큰 프로젝트에서 실패했다. 무작정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고, 로마, 아씨시, 베로나, 피렌체, 베니스 같은 이국적 이름들은 실패에 다친 내 마음을, 긴 세월 그래왔듯이 무심히 지켜보았다. 발아래 흐르는 운하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충동. 그러나 동시에 영원히 여행하면서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다는 욕망이 아직 내 삶은 더 흐르고자 함을 반증했다.
종종 여행을 하다 보면,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떤 부분이 불쑥 튀어나오는 경험 한다. 아름다웠던 순간은 사라지는 법이 없는데도, 성장을 유예하면서 그 찰나를 박제했다고 믿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지난 연휴에 함께 베트남을 여행했던 S와 L에게 미안하게도, 나 역시 그런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대학 생활 중에 얻은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고, 가장 철없고 젊은 모습을 공유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통과해 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젊고 철없는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해서 대학시절 모습 그대로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부끄럽게도 덥다고 쉬이 짜증 내거나,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목소리에 날을 세우거나, 애써 세운 계획에 반박당하면 우울해하거나, 말을 예쁘게 하지 않는다고 홀로 상처받아하거나, 의견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것에 소외감을 느끼거나. 평소였다면 의사소통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지점들이, 여행 위에서는 예민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 여행의 끝도 끝내 유보시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내게 무척 소중한 존재고, 여행 중에 내 잘못을 이야기하고, 더 단단한 관계로 여행 끝에 있을 일상을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나는 베트남 여행을 통해, S, L과 함께 있으면 튀어나오는, 성장을 유보한 과거에서 꺼내 온 불안한 스스로를 마주했고, 날 것 그대로의 상태에서 오는 아름다움에 남은 미련과 작별해야 함을 깨달았다. 돌아보면 뒤늦은 깨달음이긴 하지만, 어쩌면 밀려 있던 관계 속에서의 자아의 성장은 비행기에서 읽었던 세르브 언털의 <여행자와 달빛>의 덕분에 그나마 일찍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본 작은 미하이와 에르지 부부가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에 올랐다가, 뜻하지 않게 미하이의 과거와 현재의 일부를 지배하는 기억과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미하이가 네 명의 친구와 함께 했던 과거는 탐욕, 질투, 집착, 광기, 소유욕, 충동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여과되지 않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기도 하다. 젊음이 아름다운 이유,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너무 예쁘다!” 탄성을 내뱉는 이유는, 미성숙하고 불완전해서 위태로운 그 모습이 미하이와 친구들이 했던 연극에서처럼, 다음 장면으로의 도약을 위해 꼭 필요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한 씬으로 남아야지만이 아름다운 한 시절의 화룡점정으로 귀결될 수 있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처럼 바보 같은 말은 없지만, 푸르른 시절의 아픔은 온전하게 겪어낼수록 단단한 실존의 밑거름이 된다. 미하이는 야노시를 시작으로 아직 생존해 있는 친구들을 차례로 만나게 되면서, 아름답지만 시한폭탄 같은 과거를, 두렵다는 이유로 자주 닦아 들여다보지 않고, 그래서 덩달아 미루고 말았던 성장을 한꺼번에 경험한다. 그리고 청소년부터 청년 초반기에 이르는 삶의 1막에 온전한 마침표를 찍기 위해, 여행의 끝을 유예하며 이탈리아를 떠돌아다닌다.
미하이가 여행 중 마주한 친구들은 어린 미하이의 삶을 빠른 맥박으로 추동했던 희로애락의 조각들이자, 그러나 온전히 겪어내지 못해 그의 삶을 더 이상 원동 하지 못했던 계단들을 표상한다. 미하이가 이탈리에서 만난 야노시, 에르빈, 에버, 그리고 세상에 없는 터마시까지. 세계는 거대한 메타포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애써 지면으로 옮기기 힘들 만큼 많은 메타포가 가득한 본 작에서, 미하이를 포함한 이 또래 집단은 저마다, 불안하고 마구 흔들렸던 시대를 채웠던 순응, 반항, 사랑, 충동, 죽음 등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하는 다양한 순간들의 거대한 은유다. 그리고 마침내 미하이 또한 온몸으로 우주라는 메타포를 관통해 그 의미를 체화하게 된 것이다. 특히 에르빈은 자신의 과거와 타인이 기억하는 자신의 모습, 주변인이 부여하는 자신의 존재 의미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향성과 의미를 강력히 추진하며 결국 자신이 결정한 자신의 의미대로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렸을 때부터 헤비 스모커였던 그가 담배를 완전히 끊은 것은 성직자가 되겠다는 그의 의지를 상징하는 사건이자,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 살아내고자 하는 의미를 스스로 선택하고 삶의 궁극적 목표 지점에 도달함으로써 평온을 얻었음을 표상한다. 그는 삶이라는 긴 여행에서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고 마침내 그것과 화해하고 합일하여 실존을 이룩하고, 그리하여 이제 막 본격적인 여행에 나선 미하이에게 실존적 존재로서의 지표가 된다.
본 작은 오롯이 지나와야 했던 감정과 시간을 온전하게 겪어내지 못했던 미하이가, 자신의 텅 비어버린 영혼을 채워나가는 긴 과정의 시작 부분에 불과하다. 남은 여정은 고통스럽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겠다는 결심, 자신의 과거와 헤어질 결심, 그 마음은 마음가짐만으로도 이미 위대하다. 이는 신혼여행 중에 남편과 이별해야 했던 에르지의 결정과 상반되어 더욱 도드라진다. 미하이는 성장을 유예한 대가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나, 하고 싶어 했던 공부와 무관하게, 가업을 물려받는 길을 걷게 되고, 이 진로 역시 그가 그의 영혼이 텅 비어버린 상태를 극복을 저해한다. 에르지는 당시 유럽에도 여성의 해방과 자아 성취를 위한 고등교육을 수학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했으나,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기 보다 남성이 주도하는 체제 안에서 강력한 남성에 의존하는 방식을 삶의 방식으로 채택한다. 이런 면에서 두 사람은 비슷한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결혼은 필연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결별 이후 자신의 과거를 찾아다니며 미래로의 방향성을 모색한 미하이와 달리, 에르지는 자신의 허영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남성과의 결합을 고수한다. 물론 페르시아인의 비인격적인 구에 방식을 거부하는 등 자신의 인격을 지키기 위하여 용기 내기도 하지만, 결국 부다페스트로 돌아가 전 남편과 재결합한다. 서글프게도 그녀는 남편의 경제력을 빌려, 미하이와 그의 가족의 경제적 편의를 위해주는 방식으로, 자신이 자신의 진심과 자신이 원하는 인생의 향방을 애써 외면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미하이가 자신의 진심과 본질적 자아를 마주하기 위해서 심정적, 경제적인 압박을 부담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과 또렷한 대비를 남긴다. 그리고 그 또한 선택이며, 에르지를 안타깝게 지켜본 독자라 할지라도, 그 선택에 대하여 가치판단 할 수 없고 이 여정은 삶의 주인인 각자만의 것임이, 피렌체 두오모에 묻은 달빛처럼 은은하게 가슴에 남는다.
새벽 한 시 반. 퇴근을 한다. 호수 근처의 대기에 낀 특유의 묵직한 안개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느라 허약해진 몸을 휘감아 치고 지나간다. 일천보. 평소라면 이 시간대에 이미 걸음 수에 만보가 찍혀있어야 하므로, 건강 관리 앱이 걸을 시간이라며 천근만근인 몸을 채근한다. 여행에서 떠나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나는 그곳을 그리워하고야 만다. 현대인, 특히 현대의 직장인에게 여행(나그네 려 旅, 다닐 행 行)은 더 이상 나그네처럼 자유롭게 타지를 방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차곡차곡 모아놓은 휴가와 미래의 자유를 담보로 하는 시한부(때 시 時, 한할 한 限, 붙을 부 附) 자유다. 남은 자유를 계산하며 치열해야 하는 순간들. 그래도 현대인에게 시한부 자유나마 자유의 조각들이 필요한 이유는, 그 여행의 기억들이 직(직분 직 職)을 영위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먹고살기 위해서, 그리하여 또다시 제한적으로나마 자유를 얻기 위해서, 생 앞에 선 이들의 연료가 되기 때문이다. 원치 않았으나 떠밀려 마주한 경쟁의 순간이나, 이유를 불문하고 원해서 임하는 투쟁의 순간에, 돌아보며 에너지를 얻기 위해 축적하는 잠시나마 정규(정할 정 定, 법 규 規)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자기 자신이었던 순간들.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는 짧은 여정(나그네 려 旅, 길 정 程) 위에서 나는 여정에 대하여 생각한다. 불과 며칠 전 사진을 톺아보며 생각한다. 또 떠날 날이 오겠지. 그렇다고 먹고사는 일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을 때 나는,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매 순간 자기 자신이었던가. 인스타그래머블한 여행을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몇 달 전 발리에 여행 갔을 때, 나중에 발리에 또 오면, 그때는 정말 찐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어서 람푸양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현지인에게 물었다. 그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사진 찍는 것도 경쟁이어서, 램푸양에 가서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은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네시면 출발해. 최상의 사진을 위해 한 번에 한 명씩만 서서 찍을 수 있도록 시스템화했거든. 얘기를 듣던 나와 매튜는 고개를 저었고, 드라이버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자고 일어난 수영은 나중에서야 그 이야기를 듣고 누웠던 자리에 다시 퍼져 누웠다. 아니, 그건 자유가 아니잖아. 그렇다고 램푸양에서 최고의 사진을 얻기 위해 새벽 네시에 출발하는 관광객들의 선택은 '과연 나쁜가', 혹은 '진정한 여행의 정신에 기반한 것이 아닌가'. 찐한 특별한 경험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인가. 특별한 경험이 경험의 희소성, 여유로움, 겉으로 보기에 힙함, 같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면, 그 또한 결국 타인의 기준에 스스로의 경험을 재단 맡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나는 여행의 순간 정말 오롯한 나였나. 네시에 일어나 지프를 타고 달려가 바라본 무이네의 사막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었던가. 사진 속의 자유의 순간을 돌아보며 생각한다. 나의 여행은 남들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 달라야 한다는 압박, 남은 시간을 세며 자유롭기 위해 안간힘 쓰고, 아름다운 어떤 순간들 속에서 스스로를 갈무리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삶이라는 더 큰 여행에 있어서도 그러하였음을.
여행은 사는 것처럼. 하루를 머물러도 꼭 현지인처럼. 다행하게도 나에게 있어 여행에는, 아직 그런 로맨틱한 의미도 남아 있다. 누군가 베트남에서 가장 특별했던 순간들을 묻는다면, 가장 특별했던 순간을 사진으로 꼽아달라고 한다면. 셋이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더위를 뚫고 카페를 찾아 헤맸던 순간, 아침에 눈곱도 안 떼고 수영장에 뛰어들면서 이유 없이 깔깔거렸던 순간,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들어선 바가 너무 좋아서 이틀 연속 칵테일을 마시러 갔던 기억, 여행 마지막 날 호텔 바닥에 모여 앉아 용과를 까먹었던 순간, 홀로 한밤의 수영장에 배를 까고 누워 달무리를 잔뜩 머금은 달을 올려다본 순간, 핸드폰이 꺼졌는데도 그랩 택시 기사님이 혼잡한 롯데마트 앞에 나타나자 온 세상이 느닷없이 사랑스러워졌던 순간을 이야기하겠다. 여행의 사소하지만 행복한 순간이 여행의 기억을 대표하듯이, 삶의 사소한 부분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두고두고 이 거대한 이야기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여행 중간중간 본 작을 떠올리며 문득 생각하기도 했다. 인간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 이 역시 실존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새벽 두 시 반. 늦은 퇴근을 하고, 긴 샤워를 하고, 글을 쓰니까 여행의 기억으로부터 또 하루 멀어져 있다. 여행지에서 떠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여행지를 그리워한다. 여행이 시한부 자유이자, 일상의 연장전이자 경쟁의 일부라고 해서, 여행이 덜 소중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여행이 다른 누군가의 여행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행지가 해외인지 국내인지 헷갈릴 만큼 한국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해서, 그 공간과 순간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이네 사막의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네시에 숙소를 나서는 관광객들은 부지런한 것이지, 경쟁에 미치거나 인스타그램에 지배당하거나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삶과 여행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있다. 그 수많은 순간들을 한마디로 축약하거나, 한 가지 형태로 모델링 할 수 없다. 여행의 순간 나는 오롯이 나이기도 했고, 아무렇지 않게 풀잎에 앉아 아침의 흔적을 남기고 폭염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슬처럼 더없이 자유롭기도 했고, 그러지 못하기도 했다. 여행의 동의어인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삶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존재하고, 어떤 삶의 가치와 그 특별함을, 삶을 살아내지 않은 자가 판단할 수는 없다.
rojo. 빨갛다가. negro. 새까매졌다가. 온 어깨의 껍질이 얇게 벗겨지고 있다.
마치 관통해 온 여행의 어떤 시간들 때문에,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사르트르는 말했다. 규칙도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고. 인간은 실존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 선택지들 중에서 무엇이 '내게 맞는가'하고 묻고 대답함으로써.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음에 저마다 결과가 따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면서 산다. 자신의 신념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딩동댕, 맞추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고유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입증하며, 존재 자체로 의미가 된다. 인생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답하고, 본질적 자아를 발견하여 그와 합일하기 위해 걷는, 모범답안 없는 긴 여정이다. 그러니 여행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 정답 없는 문제를 풀기보다. 나는 오늘을 살기로 한다. 여행의 기억을 연료 삼아서. 삶도 마찬가지다. 절체절명의 죽음의 충동 안에서, 조금만 더 베니스를 여행하고 싶었던 마음으로. 미하이는 여행의 끝에서, 아버지와 함께 달빛이 잔뜩 묻은 토스카나 산들을 지나는 열차 안에서, 인간이 살아 있어야 항상, 그리고 여전히 뭔가가 일어남을 깨닫는다. 곧 있으면 랜딩 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창문 덮개를 열고, 간이 테이블은 제자리로 올려달라는 주문에, 책의 여운도 함께 덮었다. 나는 조금 더 삶에 충실하기로,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여행의 끝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을 잔뜩 모아 기꺼이 담보 잡힌 채로. 여행의 기억을 잔뜩 모아 기꺼이 저당 잡힌 채로.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었다. 가자. 세 친구는 립스틱을 바르고 비행기를 떠났다. 몇 광년을 헤치고 거대한 메타포와 유구한 시간을 온전히 겪어낸 햇빛이, 여행자들에게 잔뜩 쏟아졌다.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여행을 살자. 오늘을 살자. 다시 돌아올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걷는 것이. 끝이 정해진 삶이라고 해도,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를 우리의 운명보다 더 위대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