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 액자로 남다.
<플라워 킬링 문>, 마틴 스콜세지, 2023
[플라워 킬링 문(The Killers of the flower moon) - 마틴 스콜세지] 시절, 액자로 남다.
옆으로 쪼그리고 누운 뒷모습을 본다. 작고 둥근 등이 볼록하다. 엄마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4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재직하시며 오토바이로 출퇴근하셨던 것, 까맣고 멋있는 오토바이 뒤에 수박, 참외, 참조기, 같은 식재료를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오셨던 것, 그러다 수박이 톡 도로에 떨어져 쪼개어져 버리면 그것을 노끈으로 동여매 아무렇지 않은 척 부엌에 가져다 두셨던 것. 아직 엄마가 여중생일 때, 오토바이를 타고 읍사무소로 출퇴근하던 외할아버지는 예의 오토바이 뒤쪽에 엄마를 태우고 등교시켰다. 하교는 외할아버지의 퇴근과 시간이 맞지 않으니 대부분 엄마 혼자 했는데, 엄마는 종종 그때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하루에 2시간씩 걸어 다녔던 것이 자신의 장딴지가 커지는 데에 일조한 것이 틀림없다며 불평하고는 한다.
평범한 어느 날, 차도 양쪽에서 남학생들의 자전거가 줄지어 오르막길을 오르던 등굣길. 할아버지의 오토바이도 첫째 딸을 싣고 유달리 힘겹게 신작로를 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오토바이의 속도가 오르더니 할아버지는 쉬이 깔딱 고개 꼭대기를 지나쳤다. 내리막에 전에 없이 상쾌한 바람이 분다. 이상허다. 이렇게 가벼울 리가 없는디. 할아버지는 뒤를 쳐다보고 기함했다. 등 뒤에 앉아 있어야 할 딸은 온데간데없고 힘겹게 페달을 굴리던 남학생들의 웅성거림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아뿔싸. 급히 길을 되짚어 오르자 언덕길 꼭대기 반대편에 망연한 얼굴로 큰딸이 나자빠져 있었다. 서운아, 괜찮냐. 어여 다시 타. 어쩌,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집안일을 돕느라 거센 사춘기를 겪을 틈도 없었던 딸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엄마는 호다닥 다시 할아버지 등에 매달렸다. 긍게, 안 널어지게 꽉 잡으라고 안 혔냐. 언능 가요, 아부지. 쉽사리 여학생을 도울 생각을 하지 못했던 자전거 행렬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프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지. 이야기를 하던 엄마의 얼굴은 수치심 보다 그리움으로 여울거렸다.
오빠와 동생들을 위해 딸이 공부를 포기하고 집안일에 헌신한다는 신파가 흔하던 시절. 엄마의 삶은 당연하다는 듯이 커다란 가마솥에 온 가족이 먹을 밥을 짓고, 물을 길어 오고, 깨를 털고, 수원이라는 이름 대신 아들의 태몽을 타고 태어난 아이가 낳고 보니 여자였다는 이유로 서운으로 불리는 것이 서운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빴다. 나라면 그렇게 못살았을 거야. 그럼 뭐 어떡한대. 살아야 하는디. 엄마는 원망 안 해? 원망 하제. 어쩌겄냐 글믄. 삶은 계속되는 거야. 마틴 스콜세지가 필생의 페르소나인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 니로를 앞세워 제작한 <플라워 킬링 문>은 엄마의 사연을 위시한, 과거 우리 사회의 무수한 신파들을 떠올리게 한다. 신대륙을 발견한 선진 문명이 본디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자, 학살적이고 조직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을 자행했던 역사가 본작의 핵심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가 된다. 자신의 삶은 오롯이 자신의 뜻에 따라서 전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삶에 침범해 원주민을 몰아내는 것이 흡사 젠트리피케이션에 다름없다는 점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물리적 범위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호소도 흥미로운 착점으로 읽힌다.
오세이지 족은 정부의 억압정책과 타인의 차별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었던 <밤의 경비원>의 치페와족 등 다른 부족들과 달리 생존에 유리한 지점을 차지한다. 침입자들은 그들을 원래 살던 터전에서 퍼내어 이주시키는데, 오세이지 족은 농사도 잘 지을 수 없는 이 척박한 땅에 배수진을 치고, 이주 조건으로 땅에서 나는 모든 이권(날카로울 리 利, 권세 권 權)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이주 조건으로 내세운다. 미정부는 불모지의 이권을 쉽게 부족에게 이양한다. 어느 날 척박한 땅을 뚫고 검은 황금 기둥이 태양을 향해 솟구친다. 석유였다. 이 발견으로 오세이지족은 다 같이 떼부자가 되고, 미정부는 부랴부랴 원주민들의 교육 수준 등을 이유로 내세워 그들을 금치산자로 관리하기 시작한다. 준비 없이 갑자기 잉태된 행운은 쉽게 비극이 되고는 한다. 불모지는 순식간에 황금 밭이 되었다가, 또다시 순식간에 풀 블러디 스테이트로 전락하고 만다. 본작은 이 비극의 땅에서, 원주민들의 경제권의 통제를 제도에 의존하는 거추장스러운 방식을, 원주민들을 아예 그 땅과 삶에서 젠트리피케이션 시켜버리기로 결정한 날 선 악의를 낱낱이 고발한다.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전역 후 오세이지 힐스의 왕이라고 불리는 그의 삼촌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 분)에게 의탁하게 되고, 오세이지인인 몰리(릴리 글래드스톤 분)를 만난다. 그는 금치산자인 그녀의 재산을 노리고 몰리에게 접근하지만, 동시에 그녀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다. 아니 그녀에게 매료된 김에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기로 한다. 결국 그는 결혼으로 몰리와 결합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명제가 그를 통해 진실로 입증된다. 마치 <나귀가죽>의 라파엘이 그러하였듯이. 유해한 욕망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기 시작한다. 어니스트와 킹은 합심해서 몰리의 주도권을 강탈하고, 몰리가 받을 유산을 공유해야 할 몰리의 친인척을 제거하고자 각종 추악한 일들을 벌인다. 놀랍도록 잔인한 것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몰리 뿐만 아니라 오세이지족 전체가 이런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절의 원주민이 갑작스러운 문물 개방으로 인하여 식생활에 직접적 타격을 받았고, 때문에 그들의 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들을 생에서 추방하려는 악의 때문에 오세이지족의 개체수의 감소는 급속화한다. 마틴 스콜세지는 이 잔인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마치 엄마가 딸에게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듯한 느낌으로 전개하여 관객들이 스스로 위치를 가늠하지 못하게끔 하면서, 점점 폭력에 노출시킨다. 폭력적 상호작용이 정신없이 흐른 후의 스크린에는 그림 같은 풍경이 담기고, 풍경 속의 인물들은 원거리에서 액자에 담겨 미미하게 움직인다. 이런 흐름은 오세이지족이 폭력에 짓눌려 점점 사그라지는 자아를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기도 하다.
마틴 스콜세지는 실화를 채택하여, 같은 이야기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즉 영화적 화법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정석적으로 증명한다. 그의 전작 <울프 오브 더 월스트리트>가 그랬고 본작 또한 마찬가지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본작의 전달 매체인 영화의 기본 단위 요소로서 영상의 특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특히 상기한 바처럼 영상의 느낌을 지우고 사진처럼 멈춰 있는 정적인 장면을 삽입한다던지, 배경은 사진 혹은 액자 속 미술 작품처럼 미동도 없이 멈춰 있고 인물만 움직이게 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는 외려 영상 매체의 특성을 극대화한 것으로 다가오는데, 당연하게도 어떤 회화도 아무리 구 내용이 정적이라고 할지라도 멈춰 있는 정물을 담은 영상만큼 생생하기 어렵고, 어떤 사진도 영상만큼 활동성을 포착해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몰리에게, 오세이지족에 다가왔던 폭력의 칼끝, 비극의 말로처럼. 관객은 서서히 스크린으로 대변되는 비극적 풍경의 일부로 편입되어, 스스로의 미력함에 갑자기, 그러나 더없이 선명하게 마주한다.
두 번째로는 영화의 최소단위로서의 영상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반(Back Ground) 역할을 수행하는 사운드다. 인디언 부족이 오일머니로 권력 구조의 최고층에 군림하는 오세이지족 보호구역 안에서는, 인디언들이 백인들이 구사하는 영어를 배워야 하는 미국의 대부분의 영토에서와는 달리, 침입자들이 인디언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본작은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오세이지 부족의 언어를 청각 효과로 적극 활용한다. 이로써 오세이지족과 외부인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이고,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 시각효과와 결합하여 청각적으로도 각인된다. 또한 인디언들의 전통 음악을 차용한 배경음악 덕분에 오세이지의 고유성과 그들이 구축해 온 세계의 미학이 도드라진다. 3시간 30분 동안 시종일관 한 씬을 긴 호흡으로 그려내며, 오세이지 족의 이야기를 오세이지 족의 품위와 어울리는 방식으로 우아한 한 폭의 산수화처럼 담아내는 느린 템포의 이 작품 안에서, 독특한 인디언 사운드를 뼈대로 구축한 배경 음악이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고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화면이 다채롭게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드는 요소로 활용된다.
세 번째로는 미장센을 꼽을 수 있겠다. 미장센은 연출하다는 의미의 연극 용어에서 유래되었으나, 현대에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감독이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열하는지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즉 본작에서 작품 내에서 시각적 요소들을 연출하는 방식이 영화적 문법으로서 주목할만하다는 것이다. 본작은 시대적 배경을 표현하기 위하여 비포장 도로, 오두막 등 건축적 요소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한편, 야외와 실내 촬영 모두에서 소품을 적극 활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1920년대 미국의 멈춘 세월로 이동하게 한다. 직접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보호구역이 미국의 전형적인 주택가로 변화한 장면을 삽입하여 시각적 방식으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이 전형적인 주택가로 이사 간 부부의 모습은, 뉴욕 맨해튼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교외지역이자 미국형 주택가의 전형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파리 이주를 두고 현실과 이상 때문에 동상이몽적 갈등을 빚는 부부의 모습을 담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출연작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연상하게 한다. 인물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극명한 대비를 통해 표현하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폭풍이 오는 날 몰리의 오두막에 어니스트와 몰리가 페츠니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에서, 몰리의 문화와 가치관이 가득 들어찬 공간에 어니스트가 들어서게 함으로써 오세이지 족의 구역에 백인의 개입을 요약하고, 두 인물이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게끔 배치하여 두 인물이 꿈꾸는 화양연화가 각자 다른 모습임을, 또 각자가 이 순간을 대하는 태도를 병치함으로써 이 순간이 동상이몽에 가까움을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불길 속에서 땅을 파는 인부들의 실루엣이 마치 서로를 향해 곡괭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시도도 인상 깊다.
네 번째로는 단연 캐릭터 연출이다. 이 연출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영화적 문법의 기본 단위의 가장 중요한 관절이라고 할 것인데, 인물에 대한 연출력이 배우의 연기력과 조응하여 극강의 시너지를 만드는 것이 마틴 스콜세지의 시그니쳐다. 탄탄한 영상과 사운드, 디테일까지 신경 쓴 미장센을 배경으로 삼아 강력한 인물들로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야말로 그가 구사하는 영화 언어의 완성체다. 중심인물인 어니스트 또한 그렇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필생의 페르소나인 로버트 드 니로가 분한 윌리엄 킹 헤일의 세계관이 충격적일 만큼 탄탄하다. 본작은 킹을 평소에 아끼던 사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서슴없이 죽이려고 작당하면서도, 이 작당을 함께 모의한 사람들과는 막힘 없이 신뢰와 믿음을 논할 수 있는 이중적인 캐릭터로 축조한다. 헤일은 본작에서 오세이지족에게 일어난 대다수의 비극을 야기시킨 장본인이자 혹은 비극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중심인물이지만, 동시에 유치장에서 조우한 어니스트가 “They took my baby”라며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자 자신의 손주 격인 아이의 죽음을 인디언 식으로 애도할 만큼 오세이지족과 깊게 동화된 인물이다. 또한 가족과 운명공동체를 앞세워 자신의 안녕을 꾀하면서도, 다른 공동체와 가족을 해체하는 데에는 일말의 망설임과 죄책감이 없는 자라는 측면에서 논리의 강화를 위하여 타인의 공감을 구하지만 정작 자신은 타인을 위하여 공감능력을 할애할 수 없는, 혹은 공감능력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스콜세지는 극단적 이중성을 가진 캐릭터를 세밀하게 디자인했고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가 이 디자인을 실체화하면서, 관객은 헤일의 극단적 이면(속 리 裏, 얼굴 면 面)중 어느 한쪽이 거짓일 것이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못하고, 헤일의 양극단이 모두 그의 진실한 면모라고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감독의 대표 페르소나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호연으로 어니스트의 캐릭터를 강화한다. 어니스트는 전쟁이라는 커다란 폭력에 장기간 노출 되었고 자신도 그 폭력에 신체적 피해를 입었지만, 기차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은근슬쩍 끼어들려고 할 정도로 여전히 폭력에 높은 흥미를 가진 상태에서 오세이지 힐스에 정착한다. 헤일을 만나 폭력을 목적의 도구로 삼고 일상화하는 단계로 점차 변화하면서, 여전히 어설프지만 폭력을 구사하는 기술의 진화를 겪기도 한다. 헤일이 그래왔듯이 폭력의 타자화의 결과로 어니스트는 큰 죄책감 없이도 부를 착취, 축적한다. 초반의 초라하고 천박했던 어니스트는 심지어 이도 지저분하게 분장하고, 양심의 상실과 대조적으로 패션과 태도가 점차 고급스러워지면서 신수는 점차 훤해지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 모든 영화적 언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한 가지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이 스콜세지식 영화적 문법이 그리는 거대한 액자 속에서 한 가지 소실점으로 화룡점정한다. 오세이지족은 평등을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고, 그 기저에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르지만 그 다름 때문에 차별받거나 사회에서 소외받아서는 안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들은 남녀를 평등하게 여기고, 헤어, 패션스타일, 결혼식 등 중요한 문화 현상을 여성이 주도하되 전사들이 중심이 되는 부족 특성상 부족장은 남자가 맡는 등, 합리적으로 역할을 배분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형태로 사회를 이끌어 왔다. 부족의 중요한 논의도 태생과 상관없이 부족의 일원이라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열린 형태의 회의를 통해 논의된다. 부족민들이 연속적으로 살해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개최된 회의에서, 족장과 회의체는 백인 하인들을 게으르고 천박하다고 표현하고 누군가가 오일머니를 노리고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분석할 정도로 침입자들의 속내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게 표현하면서도 보복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또 길어질지도 모르는 이 싸움에서 소위 말하는 쪽수로 당할만한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하여 모욕을 인내해 왔던 것이다. 본작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내는 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인간으로서의 삶을, 부끄러움 없이 운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침입자들은 자신들이 우월한 선지자라고 생각하지만 천박한 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폭력을 일반화한 범죄자들일뿐이다. 본작은 KKK를 등장시켜 침입자들이 행한 물리적, 정서적, 정신적, 사회적 젠트리피케이션 또한 KKK의 활동과 다름없는 무차별적 폭력행위임을 고발한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약자이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라는 입장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명백한 오점이지만, 오세이지족, 치페와족, 나비족, 프레멘족, 조선, 인도 등 영화와 문학, 역사학에서 조명하는 부족과 침범당한 나라들이 무력(호반 무 武, 力)에 있어 무력(無力)한 측면이 있다고 하여 색깔을 잊고 침입자에 합병되어도 되는 존재는 아니다. 본작은 탐욕에 눈이 멀어 한 부족을 삶의 터전과 그들이 이뤄온 생(生) 자체로부터 추방시키고자 했던 살인자들의 말로를 고발한다. 오세이지 족은 꽃을 와콘타(신)가 내린 사탕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는 달이라고 여기는, 남다른 감수성을 소유한 부족이다. 침입자들의 식습관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인 탓에 몰리를 비롯한 오세이지 족의 여성들이 단 음식을 과도하게 섭취하면서 당뇨가 유행처럼 번졌으므로, 꽃-와콘타가 땅에 보낸 사탕-은 달-어머니-을 살해했다. 그러나 본작 <Flower Killing Moon(한국 개봉 시 제목)>은 달이 하늘 가득 크게 떠오르고, 꽃들은 그 아래에서 제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죽어가는, 오세이지족의 5월을 의미한다. 몰리와 오세이지족을 표상하는 달이 외부의 것, 침입자와 그들의 문물을 상징하는 단 음식, 사탕, 즉 꽃을 죽이는 반격의 순간을 그린다. <Killers of the Flower Moon(원제)>은 신들이 자기 대신 이 땅에 내린 축복으로서의 어머니들을 살해한 무자비한 파렴치한들을 고발한다. 본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상, 사운드, 미장센, 캐릭터, 제목부터 대사에 이르는 텍스트를 통해 잔인한 세월 속에 남은 잔혹한 역사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됨을, 역학 관계에서의 약자와 일반론 안에서의 소수를 강자와 다수가 차별하고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방식에 있음으로 수렴한다.
삶은 계속된다. 오세이지 힐스의 왕은 몰락하고, 어니스트는 몰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아내만큼 돈도 사랑했기에 결별로 불륜의 대가를 치른다. 서명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오세이지족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특사를 보내고, 사건을 수사할 사립 탐정을 섭외하는 등 당시에는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노력들은 계속되는 삶 사이사이에 퇴적되어 오늘날 아직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 땅에 남아 있게 만든 초석이 되었다. 몰리 역할로 호연한 릴리 글래드스턴은 블랙피트족과 네즈퍼스족 출신이다. 침입자의 후손은 사진 같은 순간들을 본작에 꿰매 넣으며, 침입자들이 자행한 악행의 역사를 돌아본다. 동시에 벌어지는 것처럼 화면들이 병치하지만, 화면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어쩌면 본작은 악의 축이 아직도 액자 안에 그대로 멈추어버린 지난 세월에서 나오지 못하고, 느린 유속으로 흐르는 자신만의 시간에 갇힌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닐까. 삶은 계속되고 있는데, 욕망에 눈먼 자들만 그 액자 안에 갇혀 있다고. 혹은 안타까움으로 일갈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삶은 액자 안에 갈무리된 세월의 한 장면 덕분에 계속되는데, 너희만 욕망에 집어삼켜져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다시 되돌려내려고 액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엄마한테 임영웅 콘서트 티켓을 사드렸다. 혼자 가기는 아쉬울 테고, 자녀들은 임영웅 콘서트 장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정석이라고 하기에 아빠도 함께 가시라고 두장을 예매했다. 엄마는 한사코 예매를 취소해 달라고 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팔아달라고 했다가, 요즘에는 응원봉을 들고 가야 하지 않냐고 넌지시 물어본다. 돈 아까우니까 중고거래로라도 판매해 달라고 하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가 더 늙기 전에 하나라도 더 경험하고, 한치라도 더 넓은 세계를 살아보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괜찮다는 백 마디 말보다 그 한마디로, 엄마는 내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게, 어쩌겄어. 삶은 계속 되는디. 엄마 생의 화양연화는 아니었지만, 아부지가 오토바이에 싣고 가던 수박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톡, 하고 엄마를 떨구던 그날. 액자 속에 남은 그 한순간 덕분에 엄마가 신파의 세월을 견뎠음을 안다. 그리고 나는 계속될 당신의 삶을 위해, 좋은 순간이든 그렇지 않은 순간이든, 더 많은 액자를 당신의 회랑에 걸어주고 싶다. 삶은 계속되는 거다. 꽃이 달을, 달이 꽃을, 누군가 달을, 죽이고 죽임 당할 상황에서도. 누구 한 명 콕 집어 원망할 수도 없었던, 그래서 세상이 원망스러웠던 10대 서운이의 삶도. 와콘타가 뿌린 사탕이 꽃으로 핀 들판에 잡부 몇이 들어선다. 올가미로 낚아챈 커다란 달이 땅에 부닥칠 듯 낮은 하늘에 매달린다. 달은 커다란 얼굴로 고요하게 들을 굽어본다. 잡역부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대가리를 수그리고 죽어간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잔인한 5월의 어느 밤을 달이 액자 한가득 갈무리한다. 사진으로 남은 그 순간이 있기에 오세이지 언덕에는 6월이 나린다. 그렇게 사계절이 흐른다. 액자 속에 멈춘 세월은 말이 없고, 액자 밖의 세월은 그렇게 계속 흐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