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성, 그 불투명을 넘어 스미는 색채
<미셸 앙리 : 위대한 컬러리스트>
[미셸 앙리 : 위대한 컬러리스트] 투명성, 그 불투명을 넘어 스미는 색채
나의 별에 뿌리내린. 떠나다, 지우다, 차마 잊지 못한 이름. 치앙마이에서 장미를 만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왕자>를 떠올렸다. 정유정의 <영원한 천국>을 읽으며 장미를 떠올렸다. 사막 여우를 보러 가고 싶었다. 흔한 이름이 나에게만은 다른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만물이 메타포인 세상에서 당연한 일이면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사건(일 사 事, 물건 건 件)이기도 하다. 나만의 장미, 나만의 붉음, 나만의 색깔로 남는다는 것은.
미셸 앙리는 자연, 특히 꽃을 크로키하지 않고 눈으로 메모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한 자연을 색채화해서 화폭에 담아낸다. 색가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 그대로, 색채 그대로를 구현해 내는 것이다. 미셸 앙리는 물에 꽂아 놓아도 금세 수액을 빼앗기고 유한성에 존재를 잠식당하고 마는 양귀비꽃에게서 영원한 붉음을 본다. 자연이 만드는 수많은 풍광 속에서 무한한 영감(신령 령 靈, 느낄 감 感)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식대로 영감을 재해석하고 용기 내어 유한한 프레임 속에 박제한다.
투명한 창, 투명한 커튼, 투명한 유리화병. 자연은 투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투명할 수만은 없는 불투명을 넘어 앙리 미셸만의 고유한 색채가 되어 액자 밖의 눈들에 맺힌다. 그의 작품 속의 투명성은 반투명에 가깝게 묘사되며, 이는 그가 자연의 풍경을 자신의 주관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임을 은유한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어린 왕자도 보지 못했고, 장미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러나 여전히 붉음 그 자체로 붉은, 장미의 붉음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한 편의 거대한 서사고, 그래서 세상은 온통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각자의 세계는 각자의 궤적을 그리다 한 지점에서 만나 다른 이야기의 깊은 눈을 들여다본다. 다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 그러나 투명하지만은 않게 독해(읽을 독 讀, 풀 해 解)하는 자신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하여 특별한 그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존중하는 것. 위대한 컬러리스트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작품이 비단 색채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고유한 이야기들이 우주에 가득하고, 그래서 우리 세계에는 수많은 포물선이 만나 만든 이야기의 교차가 점점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는 다시 작은 별에 홀로 핀 장미를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내야 했던 영겁 같은 기다림의 찰나들을 생각했다. 개흙 같은 어둠 속에 침잠했던 경주에게 찾아왔던 햇살 같은 지은을 생각했다. 죽어가는 해상을 위해 죽음을 무릅썼던 제이를 생각했다. 영원한 천국은 없다. 완전한 행복이 없듯이. 그러나 서로를 매만지고, 그 색깔을 기록하고, 서로의 이름을 불렀던 순간만은 영원하리라. 누군가의 그림 속에 장미처럼.
* 본 리뷰는 <미셸 앙리 : 위대한 컬러리스트> 전시를 감상한 후기입니다.
* 본 리뷰에는 정유정의 <영원한 천국>, <완전한 행복>, 셍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대한 짧은 감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