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J를 위한 마음의 소리<모모>

시간을 재단하고 재촉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파워J에게.

by 다독다독 린

세상에는 아주 중요하지만 너무나 일상적인 비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 비밀에 관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개 이 비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비밀은 바로 시간이다. -p.83


중학생 때부터였던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나는 시험 한 달 전쯤 연습장에 커다랗게 표를 그려 시험 대비 계획표를 만들었다. 계획에서 조금 엇나가더라도 만회할 수 있는 여유까지 둔,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에 비해 꽤나 조심스럽고, 나이에 맞지 않는 그런 계획표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모모>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에 대한 비밀스런 강박이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의 꼼꼼함과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는데, 시험 기간에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계획을 짜던 버릇은 이후 모든 일에 계획표를 만드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인지, 어떤 성향의 일인지, 내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하기보다는 일을 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조각 한 조각 시간을 절약하면서 언젠가 그 시간들이 나에게 보상처럼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래서 늘 시간을 재단하고 재촉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쫓기는 삶의 증거, 시간 강박


며칠 전, 대학생이 된 제자가 인사를 하겠다고 학교로 찾아왔다. 대학 생활, 여자 친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다가 문득 나와 같은 전공을 선택한 그 녀석의 시간표가 궁금했다. 그가 내민 건 주 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표라 매우 우울해 보였다. 나는 녀석에게 충고랍시고 나의 수강신청 에피소드와 노하우를 잔뜩 꺼내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의 시간 강박은 대학생 때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나 보다.

회상해 보면 난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사이에 모든 수업을 넣고 단 10분의 쉬는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인간미는 없지만 아름다운(?) 시간표를 짜곤 했다. 그래서 수강 신청 기간에는 이 직사각형 시간표를 사수하게 위해 PC방을 전전했다. 이런 황금 시간대 수업으로 시간표를 완성하려면 정확한 수업 정보는 물론이고 정원에서 내쳐지지 않을 직관력, 그리고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빠른 속도의 랜선이 필요했다. 혹시라도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교수님께 이 수업이 왜 내게 필요한지를 말해야 하는 설득적 말하기 기법도 요구되었다.

그런 식으로 직사각형의 시간표를 만들기 위해 전공과 상관없는 수업을 하나둘 넣기 시작했고 결국 졸업에 필요한 전공 이수 학점이 3학점 부족해 학교를 한 학기 더 다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모모>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는 시간을 절약한다면서 실제로는 전혀 엉뚱한 것을 아끼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p.105


시간을 절약하는 습관 자체는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처음에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의사가 목표였지만 어느새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되는 것으로 꿈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그처럼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기 위해 직사각형 시간표를 계획했지만 결국에는 전공과 상관없는 과목을 수강하느라 한학기를 통째로 날려 버리는 주객전도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목표가 변질되면서 시간의 가치도 떨어져 내가 그토록 아끼려던 시간은 심지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대학 생활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재미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시간 강박 때문이었다. 원래 대학 생활이라는 게 공강 때는 동아리 방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밥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시간들이 모두 낭비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과정을 즐기며 목표에 이르는 길이야말로 시간을 가장 가치 있게 활용하는 방법이 아닐까?




회색 신사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시간을 되찾는 법


시간 강박에 의한 계획표 짜기는 여행에도 적용되었다. 나는 여행도 즉흥적으로 떠나기보다 철저한 계획하에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파워J 였다. 아니,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만 떠날 수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1TB외장하드에 여행 계획서 폴더가 따로 있는 것만 봐도 그 계획서들이 여행사의 여행 상품을 풀어놓은 것처럼 디테일한 것만 봐도 그 강박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학생 때 여행 계획 공모전에 뽑혀 공짜 여행도 많이 다녔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내가 여행 계획 담당자였다. 남자 친구가 여행을 가지고 하면 "계획서부터 써 와!"라며 로맨틱한 제안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고.

지금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가 나에게 거제도 여행을 제안했을 때에도 나는 예외 없이 여행 계획서를 요구했다. 그저 몸 가는대로 떠나 자유롭게 느끼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고 믿었던 남편은 여행 계획서에 아래와 같은 서문을 내던지며 나의 계획 강박을 조금씩 벗겨 냈다.


어느덧 가을 바람이 불고 있다. 올해 남은 시간의 무게는 한 해 동안 우리가 지나온 시간보다 가벼워졌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찾아온 봄의 풋풋함과 여름내 무더웠던 기억들을 이제 선선한 가을 바람에 말려 파란 하늘에 차곡차곡 정리해야 할 시간이다.

갈대밭에서 맞을 아침에 감사함을 느낄 것이며, 남해 바다 위로 지는 석양 노을에 경건함을 느낄 일이다. 내 사랑에게 느끼는 마음이 그러하듯이...


손발 오그라드는 이런 멋진 서문을 접한다면 어느 누가 '그린라이트'를 켜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여행 중에 '여행이란 시간에 맞춰 복작거리며 이동하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아는 게 훨씬 소중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저 즐기라고, 그게 진짜 여행이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나의 여행은 본전을 뽑겠다며 새벽부터 일어나 돌아다니고, 다크 서클을 드리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그와 여행을 하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즐겁고 경치 좋은 곳에서 차 한잔을 하면서도 행복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여태 '시간을 아끼면 곱절의 시간을 벌 수 있다'. '시간은 돈과 같다. 그러니 절약하라'고 속삭이는 <모모>속 회색 신사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처럼 여행에서조차 속도의 무한 경쟁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악착같이 절약했던 시간들보다 잠시 나를 내려놓고 즐겼던 시간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 삶을 꽃피우고 온기를 더하는 자유롭고 따뜻한 시간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p.105


모모는 나만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살기보다 조금씩 느린 걸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친구와 수다를 떨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고, 걷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하늘도 쳐다보고, 바람 속에 손도 한번 뻗어보며 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 늘 삶과 시간에 대한 여유를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에 신경에 쏠려서 정작 필요한 것, 시간을 가슴으로 느끼고 즐기는 것에 소홀해 진 건 아닌지. 너무 많은 것을 들고 가려다가 떨어뜨리고 만 소중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시간의 압박보다 휴식이 더 필요한 건 아닌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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