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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아니고 기린 Aug 09. 2019

영화, 소공녀(2018)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사는 게 팍팍하다. 은근히 하기 힘든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뱉었다가는 팍팍한 상대방으로부터 온갖 검증에 시달려야 한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포기하고 사는 것들이 몇 개나 되는지, 육체적으로는 어디가 불편하고 얼마나 참고 있는지, 시간적으로 얼마나 여유가 없고 잠은 얼마나 자는지 기타 등등. 흔히 결론은 이렇게 난다. 그 정도면 남들처럼 사는 거지 뭐 그렇게까지 힘들다고. 그런데 참 웃긴다. 사는 게 다 어렵고 힘들고 남들도 그렇다면, 남들도 이 정도로 살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이렇게 살면 왜 배부른 소리 하는 건데? 왜 다 놓아야만 팍팍한 건데?

영화 <소공녀> 속의 미소의 세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과 참 많이도 닮아 있다.


*


미소는 담배, 위스키, 남자 친구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걸 유지할 수 있는 돈을 합법적으로 벌 수 있다면 안정적인 직장이 아니라도 충분하다. 집도 마찬가지다. 잠만 자면 되니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당연히 세상은 미소의 여을 곱게 보지 않는다. 남자 친구는 그렇다 쳐도 (이건 또 왜 너그러운지 모르겠다만), 담배랑 위스키는 포기해도 충분한 것들이 아니냐는 게 세상의 이론이다. 그렇지만 미소에겐 그게 전부다. 이야기는 이런 미소의 모습을 보여주며 묻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얘가 지금 헛바람 든 거라고?”


나 같은 경우 원하는 전공을 선택했고, 나름대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삶은 자주 어떤 잣대에 놓인다. 너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잖아 하는 그런 잣대. 처음에는 그건 그렇지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억울한 거다. 내가 한 10억을 받고 내 작품 하나를 떡하니 계약한 것도 아니고, 오픈런으로 늘 관객이 붐비는 공연을 올려놓은 것도 아닌데. 나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중이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나도 살다 보면 인생 참 팍팍하고 힘들다고 느낄 때도 있고,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불안할 때도 있고, 가끔은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도 있다. 글이 안 써지면 커서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느니 맥주 한 캔 까놓고 영화를 본다. 공연하면서 버는 돈이 많지 않아도, 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면 떡볶이를 사 먹는다. (구구절절 나열하고 있으니 더 하찮고 소박하게 느껴지긴 한다만) 남들은 이걸 사치라고 부른다. 그런 걸 포기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테고, 더 확실한 다른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냐는 거다. 물론 기본 전제에는 글이라는 모호한 선택을 해놓고 라는 말이 당연히 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이런 게 헛바람이고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거라면, 앞으로도 헛바람 든 애로 살지언정 철 잔뜩 든 어른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물론 타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맥주 없이 영화만 봐도 되고, 과학적으로 떡볶이가 스트레스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 안 사 먹으면 그만이다. <소공녀> 속의 미소 또한 마찬가지다. 제일 싼 담배를 피우느니 끊거나 적게 피울 수도 있고, 비싼 위스키를 마실 바에는 어차피 취할 거 싼 술을 마셔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 이러나저러나 사는 건 누구나 힘들고 팍팍하다면, 적어도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것 정도는 해도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그런 것들마저 재고 따지면, 정말이지 팍팍하고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


“사람답게 사는 게 뭔데?”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이 질문을 남긴다. 사람답게 사는 것, 남들처럼 사는 것에 대한 정의.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정’ 답은 영원히 아무도 내릴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남의 인생이나 보편적인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의 답을 내리는 정도. 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게 전부인 거다. 아무리 그래도 평균의 삶이 존재하고, 수많은 통계와 구분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거기 맞출 필요는 없다. 남에게 맞춰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 이 세상 속에 살고 있기는 해도, 결국 개인은 개인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마도) 미소는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충분히 잘 살아간다. 도심 속의 작은 텐트라도 좋아하는 위스키를 마실 수 있고, 필요할 때 담배를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세상 속에서, 미소가 살고 있는 도심 속의 작은 불빛은 더 환하게 보인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방 안의 작은 불빛을 켜 놓는 것. 그 불빛이 화려한 아파트의 실내등이어도, 조그만 단칸방의 핸드폰 불빛이어도 상관없이 모두 나름의 빛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늦은 새벽까지 거리를 환하게 비추는 빌딩 숲의 불빛 같은 걸 보통의 사람다운 삶이나 열정이라 부르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러니 다시 한번 세상에 묻는다.

미소처럼 살면, 나는 나대로 이렇게 살면 왜 안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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