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 부서진 순간.
여행 계획을 짤 때면 하루에 굵직한 장소 한 두 곳을 넣는다. 하루에 목표로 한 한 두 곳은 들르되 나머지 빈 시간은 자유롭게 여행하기 위해. 홋카이도 2일차의 굵직한 장소는 비에이였다. 이번 여행에서 혼자 그곳을 돌아보기엔 무리일 것 같아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는 아침 8시까지 삿포로 역에서 만나 저녁 7시에 다시 역에 도착해 마무리되는 일정이었다. 이날은 이른 아침과 저녁 시간 이후만이 빈 시간으로 남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 빈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전날 밤 고민했었다. 한국에 있던 미식가 형은 니조시장에 가서 카이센동으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형의 제안을 수락했다. 연어알, 성게알, 게살이 고유의 빛깔을 띈 삼색동을 먹기로 결정. 가격이 부담스러웠지만 이곳에 온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미식이다 보니 과감하게 아침 찬 바람을 맞으며 니조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조용히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아침 식사 손님을 받는 가게들만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아침을 먹을 식당은 한국 여행 예능에도 나왔다던 곳으로 정했다. 지난밤 뱃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채워넣어서인지 아침 카이센동은 작은 사이즈로 주문했다. 사진 포커싱이 이상했지만 색이 아름다웠다. 연어알, 성게알, 게살 모두가 고유한 짭짤함을 머금고 있어 별다른 소스 없이도 해당 건더기(?)들을 밥과 함께 열심히 떠먹었다. 삼색동은 겉보기의 색 뿐 아니라 식감의 색 또한 확실하게 구분되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입안에서 굴러다니던 연어알이 짭쪼름한 물과 함께 톡 터질 때 느껴지는 식감과 성게알의 눈 녹듯 부드러운 식감, 그리고 게살의 탄탄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식사를 마치곤 삿포로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 내 종의 광장엔 한국인이 모여있었고 나도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가이드의 말로는 오전은 온전히 이동시간이란다. 버스에 탑승해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인형처럼 가만히 앉았다.
가만히 있으면 임금루팡을 하는 것 같아서 였을까. 가이드는 자신의 말을 들은 체도 안하는 관광객들을 향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일 무역 갈등 이후 투어 관광객이 절반이 줄었다. 관광객 중 일본 차를 소유한 이는 한국에서 자동차에 테러를 당했다. 등의. 오랜 시간 입을 쉬지 않았던 가이드는 분명 조심스러웠다. 불만 같지 않은 불만을 내뱉으면서도 말 끝엔 자기방어적 문장을 붙였다.
그의 화법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여행을 위해 일본 땅을 밟고 있는 이 중 누군가는 'NO재팬' 운동을 신경도 안 쓸 수는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이를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이드가 많은 이야기를 풀었지만 가슴에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면 개인, 사회, 민족, 역사, 이성, 감정 등의 단어로 짜인 그물망에 포섭됐을 것이다. 그물에 걸렸다면 나는 투어 내내 허우적 거렸을지도 모른다. 이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기기를 포기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창밖은 점점 흰색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상상한 '설국'은 아니었다. 온 세상이 하얀 풍경을 기대했건만 너무 일찍 홋카이도에 왔다. 내가 상상했던 설국은 1~2월은 돼야 펼쳐진단다. 또 하나 예상을 빗나간 건 바람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설국을 꿈꿨지만 실상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더는 밖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은 매서웠다.
그렇게 장소를 옮기고 옮기다 4시 반쯤 됐을까. 카톡으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설마 했는데, 혹시나했던 기대가 부서져 버렸다. 더는 여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 아니 감정으로 가득찼다. 깊은 생각에 빠지고 싶지 않았건만 특정한 감정에 사로잡혀 버렸다. 투어의 마지막 관광지였던 후라노 요정의 숲에 다다랐을 땐 그저 투어 동행들을 따라 발만 움직였다. 그곳에서 나는 움직인 것 말고 한 게 없다. 그렇게 투어를 마치고 삿포로역으로 복귀했다.
와중에 투어에서 만난, 군대를 갓 전역한 20대 초반의 남성이 친해지고 싶다며 번호를 따갔다. 그 전역자가 자기 친구와 저녁을 같이 먹자고 연락이 왔다. 거절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럼에도 맛난 음식은 먹고 싶었다. 나의 충격은 우울이나 절망이 아닌 당황을 불러일으켰기에 그랬나보다.
삿포로에 도착해 먹은 대게 정식. 게살을 회, 샤브샤브, 튀김, 찜 등 다양한 형태로 먹었다. 솔직히 한국에서 먹는 갓 쪄낸 대게의 식감과 온도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것 같았다. 이날도 식사를 마치곤 숙소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오후에 찾아왔던 감정이 아직도 몸 곳곳에 달라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