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기행-41

드디어 이태리.

by 래리

드디어 이탈리아로 떠나는 날. 지난 주의 한파가 무색할 정도로 이른 아침부터 햇빛이 쨍쨍하다. 기분 좋게 따사롭기 보다는 살짝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햇살을 맞으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Roosendaal 역에 내려 벨기에 공항 기차를 기다리는데 그늘에 앉아있으니 쌀쌀하다. 그래 햇빛이 따갑다고 방심하지 말자. 여긴 네덜란드다. 그렇게 다짐하고 일광욕을 즐기는 중에 방심하고 말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불의의 습격을 당했다. 한 시간에 한 대만 운행하는 브뤼셀 공항 행 기차가 결함이 생겨 취소된 것이다. 이륙 시각 세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려 했었는데, 강제로 두 시간 전에 도착하게 생겼다.


현재 브뤼셀 국제 공항은 3월에 일어났던 테러 이후 보안 검사가 아주 까다롭고 철저하다. 이틀 전 브뤼셀 공항을 거쳐 미리 여행을 떠난 룸메의 말을 빌리자면, 보안 검사가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평소보다' 두시간 일찍 도착해야 한단다. 그래서 이륙 시각 3시간 전 도착도 사실 불안한 감이 있었는데 두 시간 전 도착이라니.


이거 뭔가 불안하다. 더블린으로 떠날 때의 청춘 드라마 한 편이 떠올랐다. 그 당시가 ‘청춘 드라마’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될 수 있던 까닭은 결과적으로 비행기에 탑승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장담할 수 없다. 지난 번에 별 탈 없었으니 오늘도 별 탈 없을 것이라는 귀납적 미신은 불안의 싹을 제거하지 못했다.


한 시간 늦은 기차 내에서 초조함이 마음을 넘어 몸 밖으로 표출됐다. 목이 바싹바싹 마르고 손은 괜히 더 차가워졌다. 내려야 할 곳이 어딘지, 목적지까지 몇 정거장 남았는지 알았음에도 기차 노선도를 힐끔힐끔 엿 보는 눈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공항 역에 도착하자 마자 짐을 들고 뛰어내리는데 총을 둔 군인 둘이 보인다. 내가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그들의 존재가 나의 수속 과정을 순탄치는 않게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헐레벌떡 계단을 오르니 웬 컨테이너에서 보안 검사를 한다.


아직 공항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줄이 너무 길다. 어쩌겠나.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더블린을 갈 때처럼 내가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Can I go first? Because my gate is nearly closed”와 “I’m sorry”를 몇 번씩 외치며 줄기차게 새치기를 했다. 사실 게이트는 아직 열렸을 시간도 아니었지만, 이 컨테이너는 단지 검사의 서막에 불과할 뿐이란 공포와 룸메의 말이 계속 맴돌았기에.


라이언에어는 이번에 처음 이용하는데 보딩 패스 종이에 비자 스탬프를 반드시 받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네덜란드 거주 허가증이 있는데도 꼭 받아야 하나, 그리고 받는다면 이걸 어디서 받아야 하나.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일단 기나긴 체크인 무리의 꼬리에 동참했다. 이 답답하면서도 길게 늘어진 사람의 행렬에 또 한 번 양해를 구하고 새치기를 해야하나 생각하던 찰나, 녹색 옷을 입은 청년이 눈에 들어 온다.


컨테이너 보안 검사 때 탑승 수속 질문은 녹색 옷을 입은 사람에게 하라는 보안 직원의 말을 따라, 옆에 서 계시던 노부부께 캐리어를 맡기고 청년에게 갔다. 청년은 ‘아마’ 화장실 옆 부스에서 비자 스탬프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마’라는 불확실하고도 책임회피성이 짙은 단어가 미심쩍긴 했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무언가를 확실히 믿고 행동하지 않으면 더 큰 불안이 몰려올 뿐이기 때문이었다. 노부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캐리어를 챙겨 부스로 갔다. 잠시 동안 가방을 맡겨준 노부부께, 그리고 나의 새치기를 허락해 주신 오늘의 모든 승객 분들께 또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부스에 도착해 비자카드와 여권을 모두 보여주고 스탬프를 받았다. 다행히 체크인의 행렬을 따라 갈 필요는 없단다. 발걸음을 서둘러 두 번째 보안 검색대에 도착. 기다리는 줄이 없어 후딱 통과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치기까지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한 시간 전이다. 다시 한 번 새치기를 허락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만일 그 분들이 새치기를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2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로마 도착. 이곳저곳에서 거칠고 강한 억양이 들려온다. 조금 시끄럽기까지 하다. 여기가 이태리구나. 이제 남자들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확인할 차례. 버스를 타고 한인민박으로 향하는데 버스기사가 어설프게 축구선수 델피에로를 닮았다. 델피에로는 아직도 인도 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중으로 안다. 하지만 델피에로를 논하기 전에 이 곳은 토티가 있는 로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로마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심장. 나도 로마에서 토티의 축구 인생만큼 멋진 이야기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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