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르카2
오전 일찍 비행기를 타고 온다던 친구들에게 비행기가 연착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오늘도 이 자연과 다름 없는 집에서 안빈낙도의 하루를 보내야 하는가. 빈센트의 집이 비루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얼른 마요르카의 해변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저 지중해를 즐기기 위해, 심적 부담이 전혀 없는 네덜란드 여행을 포기하고 스페인 여행에 온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점심이나 오후 쯤에 혼자 바다를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이 미칠 듯한 스페인의 태양은 강제로 집 안에 나를 가둬 놓는다. 실내 공간은 유일한 피난처이자 감옥이다. 로베르토도 오후 6시 이후에 바다를 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 말했다.
친구들은 저녁 여섯 시 반쯤 도착했다. 짐을 풀고 대충 저녁을 먹으니 여덟 시. 아직 석양도 지지 않았지만, 바다에 가긴 늦었다. 지금 가봤자 해수욕을 즐길 수가 없다. 그러다 체스를 발견했다.
체스는 별로 해 본 기억이 없지만 장기는 정말 많이 뒀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를 시작으로.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시절 우리 반에 장기 열풍이 불었다. 둘이 대국을 두면 열 명 정도가 둘러 모여 누구는 훈수를 두고 누구는 구경을 하고. 패배자가 물러나면 관중 중 한 명이 다음 대국자로 참여했다. 당시는 무려 2007년. 빅뱅의 거짓말이 히트를 쳤을 시점인데 우리반은 꽤나 운치있는 취미를 즐겼다.
그리고 군대에서도 병사들과, 간부들과 장기를 정말 많이 뒀다. 그렇기에 체스도 곧잘 둘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13살의 빈센트. 그가 어리다고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근거없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첫판은 나의 대패. 기물들을 빈센트에게 헌납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다음 판부터는 감이 생겨 모두 승리했다.
다음날 점심, 공짜로 숙박을 해결해 준 로베르토와 빈센트 가족에게 감사의 표시로 요리를 대접하기로 했다. 마르따도 고생이 많았으니 쉬게 하고, 한국인 친구(임씨)와 내가 요리를 맡았다. 틸버그에서 요리 좀 한다던 둘이었기에 기대해도 좋다 말했다.
이 집에는 향신료가 다양하게 있다. 특히 멕시칸 향신료. 점심은 브리또로 결정. 살사소스부터 만들었다. 임씨 말로는 멕시칸친구와 살사를 만들던 중 케찹을 넣으려 하자 엄청난 스패니쉬 잔소리를 들었단다. 한국으로 치자면 배추김치를 만들 때 고추장을 집어넣는 상황이었을까.
브리또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타코 프라이드가 강한 멕시칸 친구들의 입맛을 사로 잡을 정도로. 아 그런데 스페인의 오후는 정말 답이 없다. 시에스타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만약 이 시간 동안 사람들을 땡볕에 일하게 둔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정말로. 다행인 건 습하지 않아 집에 있으면 그리 덥지 않다는 점.
여섯시까지 집에 가만히 있다 드디어 바다로 향했다. 첫날 만났던 어눌한 영어를 쓰던 스패니쉬 친구가 차를 끌고 왔다. 그가 우리를 바다까지 태워다 줬다. 오늘 우리가 향하는 해변은 정말 작은 곳이었다. 개인이 소유했을 것 같은. 해변 이름도 스페인어로 ‘작은 해변’ 쯤이었던 것 같다.
해변으로 가는 길도 장관이다. 이렇게 건조한 풍경을 본적이 있던가. 누런 햇빛에 쌓인 산이며 바위를 볼 때면 언제나 도마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도마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의 풍경이다.
해변에 도착하니 네 팀 정도가 있다. 사람의 수는 시간과 관계 없어 보인다. 이 해변을 아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 일곱 시. 이제 슬슬 물의 온도가 내려간다. 해수욕을 충분히 즐기지는 못했지만 유럽에 와 처음으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로 만족했다.
아홉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이제 저녁을 먹을 차례. 보통 스페니쉬들은 이쯤 저녁 식사를 한다. 마르따는 어렸을 때 늦은 저녁 시간 때문에 졸면서 저녁을 먹은 적도 있고 보통 저녁을 먹고 바로 잠을 자러 갔다 한다.
오늘은 센트럼에 내려가 저녁을 먹기로 결정. 가볍게 타파스와 맥주를 함께하기로 했다. 타파스란 원래 와인 잔에 벌레가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잔 뚜껑을 덮는 작은 빵조각을 뜻했다. 이게 언젠가부터 술과 곁들이는 소량의 안주의 뜻도 가지게 되었다.
타파스는 진리다. 그렇게 소량도 아니고 가격이 정말 싸서 여러가지 요리를 동시에 맛 보기에 딱이다. 특히나 해산물(새우, 조개혹은 문어)로 구성된 타파스는 최고다. 왜 이날 음식 사진을안 찍었나 모르겠다.
건조한 날씨라 밤이 되니 그리 덥지는 않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기로 결정. 성벽을 따라 쭉 걸었다. 성벽 안 쪽엔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이 성벽과 교회의 유래를 예전 폰에 다 기록했었는데 프라하에 폰을 두고 왔다.
아르따는 밤이 되니 불빛이 그리 많지도 않다. 어둠속에서 성벽을 걸었다. 하지만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이 너무나 눈부셨다. 처음 제주도 여름의 밤하늘을 봤을 때처럼 신선함으로 머리가 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