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르카.
사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다. 17일 간의 독일 여행을 마친 뒤 아직 못 가본 네덜란드 도시들을 여유롭게 여행할지, 아니면 교환학생 친구들과 스페인을 여행할지. 결국은 스페인을 선택했다. 동행이 멕시코친구라는 점이 이번 여행을 특별한 추억으로 만들 것 같았기 때문. 그리고 유럽 생활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여유는 한국으로 보내버리고 최대한 스스로를 착취(?)하기로 결정.
스페인 여행을 택하고 한 가지 더 결정한 게 있다. ‘박물관, 미술관 한 곳도 가지 않기.’ 지금까지 유럽여행의 절반은 박물관이 차지해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저 바다와 해산물 요리 그리고 친구들과의 시간만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멕시코 친구(마르따)의 친구(로베르토)가 마요르카 섬에서 일을 하고 있다길래, 그 친구가 일하는 집에서 무료로 3박을 하기로 했다. 섬 북동쪽의 Arta란 곳인데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 2시간 가량 달려 도착했다. 처음 로베르토가 보내 준 주소를 힘겹게 찾아갔는데 분위기가 엄청나다. 서부영화에나 나올법한 건조함과 노란 햇빛이 집을 채우고 있었다. 벽에 기어 다니는 도마뱀은 날 것의 느낌을 더했다.
하지만 이 곳은 내가 묵을 곳이 아니었다. 영어를 잘 못하던 스페인 친구와의 힘겨운 대화 도중 나를 안내할 빈센트라는 독일 아이가 문을 두드렸다. 빈센트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13살인가 14살이다. 아버지는 독일에서 일을 하시면서 마요르카에 가끔 들르시고 어머니는 마요르카 식당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 빈센트는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최근엔 스웨덴 친구를 사귀어 스웨덴 말도 조금씩 배우고 있단다. 대단한 아이다.
강렬한 마요르카의 햇살과 풍부한 자연 경관처럼 빈센트에게도 그 기운이 똑같이 느껴졌다. 어린 시절 학교 끝나고 매일 제민천에 개구리 잡으러 갔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도. 그런데 엄청 걷는다. 캐리어를 질질 끌며 이 강렬한 스페인 남부의 태양을 받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빈센트가 길 안내를시작한지 15분 만에야 집에 도착했다. 엄청나게 넓은 마당을 소유하고 있고 각종 열대 과일 나무가 듬성듬성 박혀있다. 집에는 일본산 큰 개 한 마리, 고양이 3마리가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다. 고양이들의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개의 이름은 아미고. 친구란 뜻이다. 아미고는 상당히 똑똑하다. 이방인을 보면 엄청나게 짖다가 주인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냄새로 그 사람을 기억한 뒤 다음부터는 짖지 않는다.
이 집은 자연그 자체였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들 외에도 싱크대에는 개미들이 줄줄이 기어 다녔고 누구도 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마 내 친구 중 하나가 이 장면을 봤다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싱크대를 잠시 사용하고 나면 내 몸에 흐르고 있는 개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감정적으로 거부한다면 3박 동안의 생활이 힘들 것이다. 받아들이자.
식사를 마친 후로베르토와 대화를 했다. 그는 ‘길거리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일상 생활’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길거리 인생’이라니. 뭐 비열한 거리의 그 ‘거리’와 비슷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인지 그런 인생이 묻어나 있는 힙합을 상당히 좋아한다. 지금의 로베르토는 정말 착하다. 빈센트에게 듬직한 형이자 빈센트 어머니에게는 믿음직한 조력자로서.
스페인은 네덜란드보다는 해가 일찍 진다. 9시쯤 되니 하늘이 붉게 물든다. 여전히 날씨는 덥다. 덥지만 그다지 습하지 않아 덜 불쾌하다. 내일은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을 같이 할 친구들이 넘어온다. 일단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