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라토리움(moratorium) : 지불유예기간
이것은 경제학에 쓰이는 용어다.
단어의 뉘앙스로 보았을 때 미시경제학 보단 거시경제학에 주로 쓰이는 용어 같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가 이젠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미시 경제학에 더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영향을 받겠지만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는 각각 개개인이 자신 스스로에게 지급유예를 선언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할 때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통해 “오늘 먹고 내일부터 다이어트하지 뭐” 라던지, 금연을 결심했지만 이 역시 자기합리화를 자유자재로 적용하여 지급유예를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가벼운 지급유예뿐 아니라 대한민국 현 사회 전체가 지급유예다.
대입을 앞두고 미루고 있는 재수생, 취업을 미루는 취업준비생, 결혼을 앞두고 미루는 커플, 전세를 들어가지 못하고 월세에 묶여있는 지급유예 등.
이들이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각 개개인은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지급유예를 선언하겠는가 하는 점이 가장 안타까운 현실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개인은 자비심이 아닌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기심으로 전체 거시적인 경제를 이끌어 간다고 하였다. 매우 성악설적인 관점에서 기술된 문체이나 아직까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통념이다.
이기적인 개인들이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고 현재의 상황을 그저 “버티고” 있는 삶을 사는 사회가 행복할까?
그 마음의 저변에 웅크리고 있는 패배감/ 무력감/ 열등감/ 절망감/ 좌절감의 총량은 얼마일까?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척점에 있는 상황이 아닐까?
왜 사람들은 현실을 지급 유예하고 있는 것일까?
예전 같은 경제발전기에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지급 유예한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미래의 행복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현실을 담보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늘 무엇을 지급유예를 하였는가
내일은 또 무엇을 포기하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