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cycle) - 서막

이윤수 가상 연작소설

by 이윤수

영화에는 조연이 있지만 인생에는 조연이 없다

모두가 한번뿐인 자기 삶의 소중한 주인공이다


서막(Prologue)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고

뒤를 돌아보아 한 순간 후회도 없는 삶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성취와 보람을 느낄 때도 있지만 동시에 실수와 후회 속에서 살아간다.

'에이 씨, 다시 할 수 없을까?'

'한 수만 물러줘!'

'헛 손질 한 걸로 치고 다시 치면 안 될까? 아무도 안 봤는데...'

'다음 생엔 제대로 한 번...'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없을까?'라고도 생각하고

때로는 심하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일이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필 뒤 꽁무니에는 지우개가 달려있지만 인생에는 reset 버튼이 없다.

그런데 윤주는 자신이 특이하게도 그런 행운을 누린다는 사실을 처음엔 깨닫지 못했다.

윤주는 자신이 꿈을 꾸지 않거나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릴 때는 몰랐다.

처음에는 자신이 단순히 꿈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가 어렵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당연하게 자기처럼 잠에서 깨어나면 항상 잠 자기 전과 다른 상황,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언젠가 '악몽'을 꾸다가 깨어났다는 누나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들은 누구나 밤에 자다가 '꿈'이라는 것을 꾸고 다시 예전 잠들기 전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 '꿈'이라는 것이 그냥 '상상'하고 비슷한 것인지 아니면 자의식이 전혀 없이 몰입을 하는 것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뭔가 조금 다르다는 것은 분명했다. 윤주에게는 자고 나서 되돌아갈 항상성이 있는 세상은 없었다. 그에게는 그런 세상이 없다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그런 세상이 있는 다른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하기가 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윤주에게는 자고 나면 매일매일이 새로 reset이 되는 새로운 세상이지만, 그가 매일매일 접하고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어제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기에, 윤주도 그런 것이 '있다고' 상상하며 대응해야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어제-오늘-내일로 이어지는 세상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했다.

그러면 윤주에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었다. 예를 들면 친구에게 돈을 빌리고서는 친구에게 '내일 갚을게'라고 말하면서 거의 부담과 의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서 '전혀'가 아니고 '거의'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약속'이 때로는 다음 날 reset이 된 날에도 그대로 따라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누군가가 '내일 해줄게'라고 한다면 윤주는 그 '약속'이 이행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어렵다. 물론 그 의무가 다음 날도 따라오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음 날 다시 그 친구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친구는 윤주에게 그런 약속을 한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라 그런 약속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윤주의 세상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자유롭다. 얽매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그날그날 좋을 대로 살면 된다는 점이 제일 좋았고, 가장 나쁜 것은 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하고 준비를 하거나 기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준비를 할 수 없다는 것,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홀가분하면서도 불안하다. 그래서 윤주는 차라리 다른 사람들의 세상을 몰랐으면 그런 불안감도 없이 당연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더 편안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일 바뀌는 윤주의 세상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윤주라는 것이다. 물론 윤주라는 이름도 다른 이름으로 바뀔 수는 있지만 그 세상을 인지하고 느끼는 주체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즉 자신이 괴물이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갑자기 아버지와 역할이 뒤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또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간은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젊어졌다가 나이가 들었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가 하면서 시공을 초월해서 움직이지만 윤주 자신의 생체시계는 정확하게 미래를 향하여 정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윤주 자신이 어린이로 되돌아가거나 미래로 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가 않았다.

세 번째는 윤주가 내일의 세계를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윤주는 시험 삼아 자기 전에 무서운 영화를 계속 보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반드시 그 비슷한 무서운 상황에 직면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긴 의식도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자신이 전 날 그런 시도를 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행인 것은 이런 복잡한 사실을 매일 다시 깨달을 필요는 없었다. 그 정도의 자의식은 매일매일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어제의 기억이 희미하고 연결 고리나 인과관계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 번은 나쁜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즉, 그가 오늘 나쁜 일을 저질러도 내일 그 행위에 따른 피해나 처벌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돈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해코지를 하거나 음탕한 짓을 해도 이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범죄를 저질러도 좋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을 해봤으나 다음에 더 큰 대가와 가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안심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큰 부담 없이 사소한 약속 정도를 하고 잊어버리는 정도로만 만족을 해야 했다.

그리고 미래에 가서 복권이나 주식 시세를 알아보고 돌아오는 시도도 해 보았지만 기억이 희미해서 잘 되지 않았고, 몸에 기록을 하거나 메모지를 어떤 장소에 숨겨 놓거나 해도 잠에서 깨어나면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하긴 당첨이 되고 대박을 터뜨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을 하루 만에 다 쓰지 못하면 그다음 날에도 자신이 그 돈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보장이 없는걸!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로 자꾸 변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형제 등 기본 인간관계는 비교적 영속적으로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형이 하나 더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도 가끔은 있었고, 그들의 외모나 성격이 달라져 있을 때도 있었다. 그 외에 거리가 먼 다른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아쉬운 것은 마음에 드는 친구나 여자가 생겼을 경우이다. 오래 계속 같이 있고 싶은 데 언제 사라져 버릴 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쉽고 서운할 때가 많다. 결혼을 하면 이어질까 하고 급하게 결혼식을 올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만 어쩌면 언젠가는 아내나 아이가 생겨서 사라지지 않을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하루의 사랑과 우정과 신뢰도 가능하면 잘 쌓아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질은? 그러고 보니 돈은 금방 사라져도 집은 좀 영속성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따져보니 윤주 자신의 세상은 4차원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해석이 쉬울 것 같았다.

0차원 점에서 사는 사람은 1차원 선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고

2차원 면의 세계를 1차원 선에서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2차원에서는 연속성이 없다.

그러므로 윤주의 세상은 4차원이라 일반 사람들이 사는 3차원의 세상에서는 마치 꿈속에서 사는 것처럼 연속성이 없어 보일 것이다.

더 어렵고 복잡한가?

어쨌거나 '나는 나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고 너는 너의 세계에서 꼴리는 대로 살면 된다. 굳이 상대방의 세상을 이해할 필요도 없다.'라고 윤주는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