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한...

by 이윤수

모든 사기꾼들은 믿음직하다. 누구도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속지는 않는다. 믿던 사람의 달콤한 유혹과 본인의 욕심이 결합하면 사기는 성립이 된다.

모든 거짓말은 그럴듯하다. 의심스러운 것에 사람들이 속지는 않는다. 아프리카의 Kong 산맥이나 태평양의 Sandy 섬처럼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어처구니가 없을 거짓말들도 적어도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진 상식으로 당당하게 존재하여 권위 있는 도감과 심지어 Google Earth에 까지 떡 하니 실체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1637년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이런 이것도 과장이라고 하네] 와 1991년 일본의 부동산 폭등 폭락과 1720년 뉴턴도 속았다는 South sea 주식 폭락의 예에서도 보듯이 광기에 가까운 군중심리 상황도 터지기 직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도 참 많이 속고 살았다. 그 당시에는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나중에 보면 잘못된 것이었던 적이 참 많았다. 그때는 도움을 주는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결국엔 나를 이용한 적도 많았다. 물론 그 반대인 적도 있었겠지만 기억에 남는 것들은 주로 뼈 아픈 상처들...

자동차의 앞 길을 깃발 든 사람이 유도하는 150년 전 영국의 '붉은 깃발 법'이 대표적인 규제악법이라고 소리 높이던 정치인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참 말도 안 되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서 캐나다의 Home Depot 매장에서 Pork Lift가 움직일 때 유도수가 붉은 깃발을 들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피하게 하는 것을 보니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녹색 세계사'를 읽고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의 멸망 원인으로 지목된 환경파괴의 위험성을 깨닫고 크게 감동하여 환경운동에 전적으로 찬동하고 지원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환경파괴가 아니라 유럽인들의 침입이 멸망의 원인이라는 증거를 들이대는 책을 읽고는 내가 속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Jared Mason Diamond의 '문명의 붕괴'에서 환경파괴의 증거를 읽고서는 다시 한번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보내고 영양 급식을 한다고 해서 매달 꼬박꼬박 보냈던 내 돈이 나중에 알고보니 임종석 손에 들어가 북한 독재정권 유지와 핵개발에 쓰였다니....이런 멍청이!

어린 시절엔 박정희가 영웅이라고 믿었는데 대학생이 되어 운동권 선배들로부터 그동안 내가 속고 살아왔으며 박정희와 이승만이 친일파이고 김구와 김일성이 항일 독립투사 위인이라고 배웠고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조국과 민족과 민중을 위한 삶의 목표라고 믿고 청춘을 바쳤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인간을 착취한다던 자본주의 제국주의 미국이 세계 최빈국 남한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살렸고 민중이 주인인 나라라던 베트남과 쿠바와 중국과 북한이 인권탄압 독재국가였으며 매판 자본이라던 삼성과 현대가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끌고 나를 포함한 동시대 한국인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켰고 그 경제적 성공을 토대로 정치와 사회와 학문과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져 세계 속에서 서구 선진국들과 나란히 한국과 한국인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이런 것들은 미국 독립의 아버지 중 하나로 계몽사상가, 피뢰침의 발명가, 유명한 자서전의 저자로 미국 100달러 지폐에도 초상이 나와 있는 Benjamin Franklin마저 고의적으로 가짜 신문을 만들어 영국군과 원주민의 잔학성을 과장하고 선전하는 등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짓말쟁이였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언제까지 속고 살 것인가? 아마 지금도 속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지금이라도 하나씩 깨쳐나갈 수밖에...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속지 않는다. 그러니 많이 읽고 많이 경험하고 욕심과 편견에 눈이 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모든 것에 의심하라. 믿음직하고 그럴듯한 것일수록 더 의심하라. 증거도 의심하고 입증이 된 것도 의심하라. 항상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속을 확률을 줄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를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방법적 회의론의) René Descartes를 합리적 세상을 연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옳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안 속을 수가 없고 속임수가 득세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도 없다. 속임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임수가 통하는 것이 문제이다. 다이빙 벨 같은 사기도 한동안은 진실인 것 처럼 득세했고 거짓도 드러나지 않고 권력을 얻으면 그것이 진실이 되고야 만다. 어쩌면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더 많다. 옳지 않은 것도 다수가 믿고 따르면 그것이 정의가 된다. 그리고 자연계에서도 속임수를 써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그것이 힘으로 살아남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누가 문어나 카멜레온의 현란한 보호색을 속임수라고 비난할 수 있으며 전쟁터에서 위장복을 입지 말고 기만술도 쓰지말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생명에 있어서는 건강과 힘과 속력과 지혜와 마찬가지로 속임수도 하나의 생존능력이고 인간사회에서도 그 속임수 능력을 이용해서 경쟁에서 이기고 권력을 얻고 살아 남고 다수를 지배하고 믿게 하면 그 모든 것이 합리화되고 그것이 새로운 상식과 표준(Norm)이 된다. 인권과 환경보호와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 제도가 언제부터 인류의 보편선이었던가? 사실은 국왕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선이었던 기간이 더 길었다. 따라서 진실과 거짓은 현실에 들어가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입장의 차이이고 이겨서 살아남는 자가 진실과 정의가 된다. 그것이 냉혹한 사실이다. 그러니 어리석게 속은 자와 힘이 없어 패배한 자가 나중에 아무리 억울하다고 한탄을 해도 소용이 없다. 결국 진실은 거짓과 더불어 힘을 얻고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현실에 있어서의 진실이다.


[참고문헌; 톰 필립스, 진실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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