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가는 여자, 잊고 싶은 남자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몰라. 꽉 쥐고 있었는데... 날아갈까 놓칠까 두려워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뜩 펴본 손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
정우의 말에 유정은 말없이 서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둘 사이의 공간에 모닥불처럼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어릴 적 진실게임을 하던 캠프파이어의 추억처럼 이런 빛 앞에서 유정은 한없이 약해진다. 마음속 담아두었던 말들이 목까지 차오르자 유정의 입술이 주전자 뚜껑처럼 달그락거렸다.
“아마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 나는 꼭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빈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정우의 눈에서 아련함이 묻어났다. 그 순간만큼은 별빛보다도 더 그리운 빛이 그의 눈가에 묻어났던 것 같다. 유정은 달그락거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그녀가 움켜쥔 사랑이라는 끈도 어쩌면 잡은 적 없었던 것은 아닐까?
유정은 잔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을 넘기며 시선을 돌렸다. 언덕 아래로 반짝이는 도시가 보였다. 서울의 밤은 참 예뻤다. 별보다 훨씬 많은 빛들이 지상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꼭 별빛만치의 그리운 빛깔로 말이다.
...중략.
그 남자의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유정은 올망졸망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펴보았다. 꼭 잡힐 것만 같던 것들. 결국 펴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오래 전 무엇인가를 움켜쥐긴 했었는데 무엇을 잡았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금까지의 인생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인가 꽉 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녕 손을 펴볼 용기가 났던 것은 와장창 깨진 유리조각처럼 마음이 산산히 부서진 어느 날이었다.
자작소설 잊어가는 여자, 잊고 싶은 남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