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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뜬 Oct 07. 2015

가끔 생각해보면 좋은 것들 -73

술잔이 기울고.

술잔이 기울고.



땅거미가 내린다.

또 하루가 저물어 가면 거리에 노곤함이 눈송이처럼 쌓인다.

잘난 사람 많은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는 평범한 사람의 하소연 같은 것은 입김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세상은 산처럼 높아져만 가는데 그가 밟고 있는 땅은 높아질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고로 그가 서있던 자리는 점점 지하처럼 변해갔고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마천루처럼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봤다. 그런데 높디높은 그 곳에는 사람들의 자리가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젊은 사람들이든 나이 든 사람들이든 상관없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은 것 같았다. 모두가 밤을 새우는 사회에서 ‘열심히’란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처럼 살아온 사람이었다. 꿈도 모르고 자아도 지우고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먹고살 것만 생각하고 배우며 살아왔는데 여전히 먹고 살기란 수학을 포기한 학생의 미적분 같았다. 비싼 양복을 입은 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어떤 식으로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가진 자들이었고 가진 것을 나눠 받아야만 했으니까.

그것은 쓰리지만 숭고한 책임이었다. 누구에게는 자기 앞길은 자기가 가릴 줄 아는 나이의 책임이었고 누구에게는 아픈 부모에 대한 책임이며 어떤 이에게는 학교 가는 아이에 대한 책임이기도 했다. 삼시세끼 먹어야만 하는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책임이었고 오늘에 대한 고단함의 책임이고 내일의 희망에 대한 책임이었다.

술맛을 알아가는 사람들의 술잔이 기운다. 오늘을 따르며 잊어버리자 하고 내일을 따르며 삼켜 버리자 한다. 취기가 돌 때쯤 골목길마다 가로등이 희망처럼 타닥거리며 켜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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