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프롤로그)

얼레벌레 취업기

by 써니싸이드업

장래희망은 '빠른 은퇴', 근데 과연 가능할까?

막연한 희망만 품은 사람은 오늘도 쉬고, 내일도 쉬는 삶에 몸은 편하면서도, 퇴직금이 탈탈 털리는 걸 실시간으로 보니까 다리가 달달 떨렸다.


전문의 시험을 보고 해외를 몇 달간 다녀왔다. 그 시간은 단순한 도피였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방황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늦게 입학한 덕분에 수련할 때는 5~6살 어린 동기들의 팽팽한 피부를 부러워할 겨를도 없이 무엇인가 쫓기듯 살아서, 매번 나만 보면 결혼하라 염불을 외우는 부모님 마저도 전문의 취득 후 해외로 쏘다니는 나를 보며 쉬어야지... 고생했잖아... 그런데 설마 또 튀겠어? 하는 착잡함이 섞인 눈빛으로 본가에 내려와라 말씀을 하신 순간 아차 싶었다.


취업이 안되면 7월 즈음엔 해외 봉사활동으로 회피행을 준비하다 얼레벌레 한 한의원에 채용됐다.

정식 출근 전 며칠간 감도 익힐 겸 대진부터 시작했는데 인수인계를 받고 원장실에 앉아 있자니 EMR의 오더부터 실수를 해대서 인턴 때보다 마음이 달았다. '내가 병원에서 구른 짬이 얼마인데?' 하는 오만함은 딱 거기까지었다. 지금은 잘 지낸다.


한의사와 Chat GPT, 내가 너무 의존적이야?

진료 전 EMR을 로그인하면서 Chat GPT을 포함해 교차검증이 가능한 툴들을 모두 세팅해 둔다.

이 바쁜 시장에서 진료 중에 교과서 보다 정보를 더 빨리 찾을 수 있어서 애착이 크다.

물론 매일 구라를 성실하게 치는 덕분에 거친 피드백으로 줘 패는 게 루틴이지만, 약재 A와 B는 서로 상충한다, C는 어떤 부작용이 있다는 등 가끔 섬뜩한 정보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경험한 뒤에는 없으면 불안하다.

연차별 논문, 석사, 박사 시절 논문은 얘들 없이 어떻게 썼나 싶다.


30대 아이돌 마인드? K-POP 빠순이 한의사의 로컬 적응 보고서

이 글을 읽고 갸우뚱할 수련의들도 있겠지만, 대학병원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료인들은 알게 모르게 보호를 받고 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풀기로 하자. 인턴, 레지던트 시절에 교수님 진료 스타일을 더 세심히 봤으면 좋았을 텐데, 난 언제나 후회공인가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한의원의 원장님이 한 자리에서 10여 년 동안 환자들과 라포를 잘 쌓은 덕분에 여기서 아직까지는 아주 모난 환자는 만난 적은 없으나, 새로운 한의사랑 환자 모두가 잘 맞을 수는 없기에 30대 아이돌이라는 마음으로 살랑대면서 진료를 하고 있다.

K-pop 빠순이 경력 2n차, 그간 수많은 오빠들과 1n살 어린 자식 같은 아이돌들을 파면서 서비스직의 미덕 혹은 자세를 간접적으로 접한 바 나락감지 버튼을 자주 눌러댄 덕분에 한의사 생활 5년 차 아직까지는 순조롭다.


취업한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빠른 은퇴를 꿈꾸고 있다. 환자랑 부대끼는 삶이 내게 맞는 듯하면서도, 바지사장이긴 하지만 대표원장으로 있는 건 수련의때와 달리 부담감이 크다.

몇 달 쉬어도 크게 타격 없는 경제적 자유를 쟁취하는 법을 30살이 훌쩍 지났는데도 잘 모르겠다.

동기방 카톡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쫄깃해지는 순간들, "이것도 컴플레인이라고?" 싶은 황당한 일상들, 그리고 매일 아침 진료실 문을 열며 되뇌는 질문.

과연, 한의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나의 좌충우돌 적응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