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에게 행해지는 협박과 폭력,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
치과에서 일하는 사촌언니와 오랜만에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서로 안부를 묻다 보면 심연의 저 끝까지 내려가 버릴 때가 종종 있는데 밥 먹는데 그런 이야기 좀 안 하면 안 돼? 하면서도 직장 이야기를 빼면 코리안 어덜트들은 무슨 대화를 하나 싶다. 미수금은 얼마나 돼? 요즘 그 선생님은 여전히 지각하는겨? 근처 동종업장에서 이런 신고를 받았다던데? 그런 속 쓰린 주제에도 불고기의 달달한 냄새에 흑미밥 두 그릇 각을 재는 내가 이제 꽤 짬밥이 쌓인 직장인 같았다.
" 내 옛날 동료 병원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대."
적당히 시원하고 칼칼한 콩나물 국을 들이켜다 언니의 말에 컼하고 사레가 걸릴 뻔했다.
과거에 언니와 함께 일했던 간호사가 이직한 치과에서 일이 터졌는데, 치료에 불만을 품은 환자가 접수처에서 칼을 휘둘렀고, 그 칼에 직원들이 다친 장면이 CCTV에 고스란히 찍혀 뉴스에 보도 됐다는 것이다.
"우리 치과도 늙은 원장님(이모부 딸이 한 워딩 그대로 쓴 거다.)을 제외하면 모두 여자 스태프들인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까 봐 무섭다니까." 사건 영상을 찾기 위해 유튜브를 검색하던 언니는 의료진 구타 및 상해와 관련된 영상이 끝없이 나오는 것에 질린듯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작정하고 달려든 사람에게서 안전하게 피하기만 해도 성공이지만, 기세로 한 번쯤은 그자들의 기를 눌러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허세충이라던가 초범들한테는 머리 풀고 미친척하는 게 통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그렇지만 칼 든 사람은 체육관 사범님도 못 이긴다 했으니 당장 튀는 게 상책이다.
나의 이 미친 기세론이 생긴 건 전투능력이 MAX를 찍었던 인턴 시절 경험 때문이다. 사람에게 줄창 데이다보면, 쎄한 사람을 기가 막히게 감별하는 '쎄물리에'로 진화하게 된다.
당시 코로나가 한창이라 보호자 1인만이 병원 스태프들의 확인 하 입원병동 출입이 가능했기에 거의 모든 의료진들이 병동에 입원한 환자와 그 보호자가 누구인지 달달 욀 정도였다. 그만큼 병동은 외부인의 출입이 쉽지 않다는 건데, 한 번씩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소년만화 주인공에 빙의를 한 건지 자신만은 규칙에서 예외가 되고 싶어 했다. 쎄물리에 가라사대 첫 만남에 쎄한 사람은 그 끝도 쎄하리라.
그날도 그랬다. 낙상으로 상하지에 큰 찰과상과 더불어 요통으로 입원을 희망하는 여자와 그녀의 보호자로 따라온 남자가 자신들이 방송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걸 강조했다. 둘은 부부가 아니지만 남자가 여자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매번 입원실을 들어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환자분 골절 없고, 정상 인지에, 정상 보행 가능하신데 방문객은 병실이 아닌 1층 휴게실에서 환자와 만나는 걸 권해드립니다. 병동 출입은 가족으로 확인된 보호자 또는 간병인 1인만 가능하며, 보호자나 간병인은 외출 후 병동 복귀 시 매번 코로나 검사를 해야 합니다. 혹시 간병인으로 입원 기간 내내 계실 예정이신가요? 하고 흐린 눈으로 물어보니, 자기가 여자의 먼 사촌이네, 친구네 하면서 남자가 계속 말을 흐렸다.
둘 관계가 어찌 됐던 내 알바 아닌데요, 짜증 섞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퍼킹 인턴이니까 정중하지만 따숩지 못한 답변을 앵무새처럼 욀 뿐이었다. "병원 규칙에 따르면 그건 불가합니다.^^"
소년 만화의 주인공들은 왜 하지 말라는 걸 자꾸 하는 걸까.
강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그 남자는 포기라는 걸 몰랐다. 수련의나 간호사에게 들켜 1층으로 내쫓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성실하게 방문 시간대를 바꿔가며 시도하더니, 라운딩으로 스태프들이 잠시 비운 틈을 타 결국 병동 입성에 성공했다.
이 노력이 정말 사촌과의 가족애고 친구와의 우정이라면, 나는 사촌도 친구도 없는 인간이 분명하다.
당신의 소란스런 사랑이 굳건하길 빈다. 다만, 남한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 당직에 한껏 예민해진 인턴에게 병동에서의 요란함은 최악이니까. 담낭 배액관과 욕창 환자를 연달아 처치한 후 카트를 끌고 복도를 걷던 중 여자만 있어야 할 1인실에서 걸쭉한 남자 목소리에 설마 하는 마음에 노크를 했는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여자가 마지못해 살짝 연 문 틈사이로 남자의 다라이레드美가 낭낭한 얼굴이 보였다. 남자를 차갑게 바라보는 나에게 여자가 말을 붙이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뇌에 힘을 줬다. 방송직의 창의적인 변명에 절대 말리지 않으려고.
저 둘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싶지 않지만, 며칠간 봐온 꼴이 있어서 곱게 보이진 않았다. 블로그에서 자기 PR을 열심히 하고 있는 여자 환자는 모르쇠로 선을 넘나들었고, 남자는 병원 스태프들에게 명함을 주면서 자기가 한 방송국의 국장임을 말하며 간을 봤다. 건강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의료인이 어떤식으로 섭외되는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않은가(이건 나중에 썰을 풀겠다). 그러니까 그 아재는 너희 출연할 기회가 필요하니? 기획자의 자세로 자신을 어필한 게 아니라, 나 방송하는 사람인데 내 편의를 봐줘. 나 아는 사람 많아.라는 뉘앙스로 명함을 뿌려댄거다.
그런데 아재요, 오늘은 안 통해요. 날을 잘 못 잡으셨소.
"선생님, 여기 방송국 알아?" 남자가 명함을 펄럭대며 웃었다. 나도 남자의 맞은편에 서서 냅다 웃어버렸다. "저희 작은 아빠가 잘 아시겠어요. 몇 년 차세요? 작은 아빠가 거기서 메인으로 오래 계셔서, 안부전해드릴까요? 반가워하실 텐데." 홍홍대며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먹혔나? 블러핑에는 블러핑이지. 사실 작은 아빠는 다른 방송사에서 일하다 그만둔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났다.
남자의 벌건 얼굴의 원인을 찾기 위해 꾸릿한 향을 따라 눈을 돌리니 쉽게 초록병을 발견했다. 병실에서 술이라뇨. 규칙 상 환자분은 퇴원하셔야겠어요. 갸륵하게 퇴원을 종용하자 여자는 난감해하고, 아재는 선생님 어쩌고, 저쩌고 횡설수설하더니 야구 배트 잡듯 소주병 주둥이를 쥐고 흔들댔다.
싸우자는 건가? 1층에 계시는 경비아저씨는 너무 멀고, 오늘 당직은 의사는 나뿐이고, 지금 자정 라운딩을 도는 간호사 선생님들은 어느 병실에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었다.
어쩌시게요, 그걸로. 담담하게 물어보니 액션영화를 따라한건지 병을 벽면에 쳐댔다. 옆방서 그 소리에 놀라서 여기로 와주면 땡큐인데, 병이 튼튼한 건지, 아님 소심하게 팔만 흔든건지 멀쩡한 병을 들고 움직대는 아재에 여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어머, 어머 하며 입술만 움직댔다. 진짜 뭐 하는 건데, 둘이.
무엇인가를 쥔 사람과는 대치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저 사람은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하나, 원기옥을 모은다. 둘, 분노를 담아 말한다, 너님 들으시라고요 방송국 놈들아.
"왜, 그걸로 후려치시려고요?"
"무슨 말이세요!", 격양된 목소리와 함께 여자가 남자에게 빠르게 다가가 병을 뺏었다. "이 사람, 좀 취해서 그렇지 그런 사람 아녜요."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미안하다고 먼저 말하는 게 맞아요. 이제서야 상황 파악이 되는 것 같은 아재랑 어서 퇴원했으면 좋겠네라는 마음을 가득담아 여자를 보니 아침이 되자마자 퇴원하겠다 했다.
병원의 평판, 나에 대한 보복성 기사를 쓸 힘이 있으니 편의를 봐주라는 압박의 목적으로 흔들어 대던 명함이 되려 자기를 옭아맬걸 그 남자는 알았을까? 그 둘에 대해 검색은 이미 다 한 상태였고, 여자는 남들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게 일인 사람이니 몸을 사리는 게 맞다. 비행 중에 만난 난기류에 긴장을 바짝 해야 할 사람은 일개 병원의 인턴 나부랭이가 아니라고.
"아무튼, 그날 아침에 퇴원했어." 후식으로 나온 식혜를 마시며 추억팔이를 하니 언니가 나를 타박했다. "너, 운이 좋았던 거야. 바로 경찰을 불렀어야지."
틀린 말은 아닌데, 병원에서 몇 번 경찰을 불러본 경험 상, 심한 업무 방해나 물리적인 공격이 아닌 이상 스태프들이 조율해야 해.
상황을 봐 가면서 블러핑을 할지, 도망을 갈지 잘 선택해야겠지. 물론, 운이 나쁘면 그때는 답이 없겠지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Y' 같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루는 시사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고.
그게 바로 나예요.
주변의 사건, 사고에 무감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틈틈이 챙겨봤던 프로그램이, 성악설을 믿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줄은 몰랐다. 집착. 스토킹. 데이트 폭력 등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2025년에 살고 있으니, 성별을 떠나서 범죄에 다들 좀 더 예민하게 털을 바짝 세웠으면 좋겠다. 자꾸 회자돼서 실질적인 개선책이 나올 수 있게.
건장한 젊은 남자가 스토킹을 당하는 중이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경찰에 신고해. 그 한마디로 끝낼 수 있을? 스토커가 내가 계속 봐야 하는 사람이라면? 문제의 인물을 끊어낼 권한이 내게 없다면? 주변에서 내가 너무 예민하다, 단호하지 못한 사람이다 라며 나만 질책하면? 당사자의 주변 환경을 조금만 살펴본다면 그냥 신고해로 정리될 수 있는 일인 걸까? 또한, 신고를 한다 해서 쉽게 정리될 수 있을까?
2022년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로 스토킹 처벌법이 강화됐지만 언론에서는 스토킹 피해 여성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줄지어 나왔다.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스토킹에 대해 지인들끼리 정보를 나누곤 했는데, 별 반응이 없는 남자 동료들에 당장 자기 일이 아녀서 그런가, 별로 안 무서워하네. 하고 말았다. 성인지감수성 0에 수렴하는 멍청한 생각이었음을 알고 나중에 반성을 많이 했다.
남자 수련 동기가 20살가량 차이가 나는 연상의 여성 환자에게 삼일에 한 번꼴로 러브레터와 선물을 받았다. 한방병원에 남자 수련의가 귀하기도 하고, 성격도 호탕하고, 외모도 준수해서 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처음엔 그 환자도 남자 동기를 의사로서 고마워하는지 알았지, 편지의 뉘앙스가 감사합니다에서 사랑해요, 내 맘을 알아주세요로 깊이감이 짙어지니 참다못한 동기가 우리에게 그간의 고충을 털어놨다. 애인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커플링을 치료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끼고 있었으며,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환자에게 말했는데도 선물공세가 계속되고 있다고.
매일 같이 동기만 찾는 환자에 병원 스태프들이 동기를 보호하기 위해 긴 휴가를 갔다고 입을 맞췄다. 단체로 이렇게 움직이는데 좀 알아채라고. 그런데 아뿔싸, 퇴근시간에 그 환자가 병원 정문을 지키고 있는 걸 보고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
카톡, 카톡, 카톡.
동기들이 돌아가며 "야, 환자가 정문에서 너 찾고 있어! 일층 말고 지하로 가. 우리가 망볼게."라고 카톡을 너도나도 연이어 보냈다.
나 역시 외래 진료를 하다 복도를 서성이는 그 환자를 발견하면 바로 동기에게 연락을 했다. 외래서 나오지 마요. 거기 딱 붙어있어.
"언제 퇴원하시겠대요?" "몰라요, 아픈 곳이 많으시네." 필요시 증거물로 제출할 요량으로 그간 환자에게 받은 편지와 선물을 상자에 옮기면서 흐리멍텅하게 미소를 짓는 동기가 짠했다.
"그 사람은 환자한테 제대로 말한 게 맞아? 덩치가 좀 있는 남자라며, 그렇게 말하면 보통 무섭지 않나?"
그것 봐. 생판 남은 그렇게 말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다니까.
"언니. 그 환자 볼 때마다 하지 말라고, 여자친구 있다고 말했다더라. 심지어 교수님들한테도 그 환자 이야기를 했대. 보수적인 그 과 교수님들한테도 어렵게 말했다는데. 그런데도 환자가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대. 퇴원까지 참는 쪽을 선택한 것 같은데, 그 선생님이 강단 있는 사람이었으니 버텼겠지만, 나였으면 멘탈 나갔어. 아무튼 그 환자가 퇴원을 했는데..."
입원 일수 때문에 결국 그 환자가 퇴원을 하긴 했는데, 그 이후에는 외래로 출근을 해서 그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게 아닌가. 퇴근 시간에 정문에서 기다리는 것도 계속되고. 그래서 환자에게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최후의 통첩을 날리니 자기는 그런 적 없다고 발뺌하며, 오히려 억울한 듯 그간의 편지를 돌려달라 했다한다.
"그럴 때일수록 마스크를 잘 써야 하는 거야. 위생 뿐만 아니라 의료진의 얼굴이 최대한 노출이 안 되는 게 좋다고." 요즘은 사진 한 장으로도 가짜 영상을 만들어내는 세상이다. 실제로 일부러 여자 스태프들만 있는 의원을 찾아다니는 이들도 있다.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노골적으로 성적인 수치심을 일으키는 말이나 행위를 한다는데, 우리 한의원의 스태프들은 괜찮나 싶었다. 갑작스런 변태들의 기이한 행동에 당황하고, 속상해할까 봐.
다음날 스태프들과 커피를 마시면서 당부를 했다.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 또한 많으니 원내에서 가급적 마스크를 벗지 말고, 환자 중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원장인 나를 불러라. 괴한과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무조건 한 사람은 112와 119를 부르고 밖으로 달려서 주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고마워요, 그것이 알고싶다, 실화탐사대, 궁금한 이야기Y, 피디수첩...
"그런데 이미 한의원 블로그에 원장님 얼굴이 올라와 있는데 괜찮을까요?"
"사진 속의 그 여자, 포토샵을 심하게 해서 저도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어요. 다들 못 알아보시잖아요."
"네? 네..."
"그런 의미에서 저희 호신용 알람 공동구매 할까요? 바로 경찰과 위치 상황이 공유된다던데요."
오늘의 소원: 이런 걱정 없이 한의사를 은퇴하는 그날까지 안전하게 일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