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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신저클레어 Nov 19. 2023

넘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맛깔나는 여유

KTX를 난생처음 놓치다

요즘 전투적으로 살고 있다.

늦게 공부한답시고 덜컥 등록하여 반백 가까이 되어 중간고사를 봤다.


목요일 수능날 한 과목 중간고사를 봤다.

금요일은 큰 아이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토요일 또 다른 과목 중간고사를 봤다.


촘촘한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려고 몸을 조금 혹사시켰더니 요새는 이 몸뚱이가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병원 약을 달고 살면서 어쨌든 계획한 것들을 다 마치려 애썼다.

자기돌봄을 강의하러 다니며 균형을 외치던 내가 요새 "성취"영역에만 매몰된 이유가 뭘까 잠시 생각해 봤다.


얼마 전 읽었던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책이 떠올랐다.

저자 폴 칼라니티는 유능한 신경외과 의사였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안정적인 교수자리에 임용될 0순위 레지던트였다.

고지를 앞둔 그는 암 말기 선고를 받지만 레지던트 과정을 약발로 버티며 모두 마친다.

안타깝게도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말았지만 암이 발견되고 왜 모든 것을 내려두고 치료에 집중하지 못했을까 못내 아쉬웠다.

세상의 인정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몇 달 전에 녹내장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공부를 시작한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시신경이 그나마 괜찮을 때 공부해 두자는 마음에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아마 그 마음이 스스로에 대한 인정 때문이 아니었나도 싶다.

'그럼에도.. 나 아직 할 수 있잖아?'

이런 마음에 빡빡한 일정을 굳이 다 소화하려던 어느 날.




금요일 아침 일찍 아이 학교에 가려고 용산역으로 향했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해서 좀 넉넉히 출발했다.

신분당선, 3호선, 옥수역..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경의선이 도무지 도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한참을 기다리다 KTX를 결국 놓치고 급하게 고속터미널로 달렸다.

학부모 모임에서 진행하는 강연이 11시부터인데 이미 9시가 넘어 전주까지 버스로는 맞출 수 없는 시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가까스로 막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이거 이거 왜 이렇게 비싸지?

우등도 아니고 노란 왕관이 표시된 프리미엄 우등이었다.

KTX가 32,900원인데 버스가 28,600원?

그래도 하는 수 없이 표를 사고 차를 탄 순간!



두둥... 아니 무슨 기내인 줄?

개인 공간이 허락되는 이 이동 수단은 도대체 무엇?

의자도 거의 180도 뒤로 젖혀지고 미디어탭까지!


갑자기 온몸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기차 놓치고 잔뜩 긴장해서 앞만 보고 뛰어왔던 순간들이 촤악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늦은 거, 좀 더 여유를 부려보자는 시간적 사치를 만끽했다.

동시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 밖으로 찬란한 가을이 보이고 기분이 좋아졌다.

내 선택에 의해 일부러 느리게 움직여도 되는 이 순간이 마치 특권처럼 느껴져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이게 뭐라고..

그런데 이게 그렇게 신나더라^^




정안휴게소에서 공주밤빵을 사와 커피와 즐기자니 홀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비록 아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부모교육 강연에 한 시간이나 지각하고 말았지만 더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물론 계획한 시간을 모두 딱딱 맞춰 완벽하게 소화하면 자기효능감도 상승하고 성취율도 분명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게 일정이 어그러져도 실패만은 아니라는 걸 이번 기회에 경험했다.


인생은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것 같지 않다.

성공과 또 다른 선택으로 얻는 '맛이 다른 성공'이라 보면 어떨까.



마침 아이 학교는 축제 열기로 가득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축제라 걱정되었지만 오늘 기차 놓친 내 경험 때문인지 걱정을 설렘으로 바꿔보고자 했다.

추운 날 아이는 부스에서 타코야끼를 굽느라 고생만 했다고 입이 퉁퉁 불어 축제를 즐기지 못했음에 우울해했다.

따뜻한 콩나물국밥을 먹이며 마음을 함께 녹여줬다. (당연히 공부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뭐든 계획한 대로 이루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마~

조금 돌아 가더라도 오히려 배움과 기쁨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라는 눈빛으로 먹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

다 잔소리로 들릴 테니...




역시 뜻하지 않게 아이 고등학교 학부모 대상 독서모임 차기 회장이 되고 말았다.

새로 들어올 신입생 어머니들, 올해 함께 희로애락을 나눈 예비 2학년 어머니들과 함께 내년 독서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아이러니하게도 초, 중학교에서 어머니회 한번 안 해본 나로서는 그 부담감에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힌다.


하지만 또 아는가..?

놓친 KTX 뒤에 숨겨진 선물은 그걸 놓쳐야만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늘 조용히 묻어가던 내 인생에 갑자기 찾아온 자리의 부담 뒤에

예상치 못한 귀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m.Cl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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