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려자
26년째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몸에선 생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정돈되고 화려한 꽃다발이 아닌, 들판에 강인하게 솟아오르는 들꽃 같은 사람. 몇 번이고 삶의 의미를 좇을 때마다 항상 그를 떠올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강한 불꽃이 있다.
2019년, 그를 담은 <보통의 51살>을 집필하면서,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함께 회고했었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앞으로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3년이 지난 뒤, 그는 54세 중년 여성이 되었다. 어쩌면 뻔한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열정과 도전정신은 유효했다.
유년시절부터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다. 공부와 글쓰기를 곧잘 잘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남동생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성인이 된 후 공장에 들어갔고, 살림에 보탰다. 시골집을 샀을 만큼 성실하게 일했다. 사무원, 판촉, 회사 창업, 치킨 창업, 마트 캐셔, 시집살이까지. 3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이 좋아서 했어. 미래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삶을 항해하는 키를 손에 직접 쥘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한 현수막을 보게 된 게 계기였다. <대학교, 산업체특별전형>. 회사원을 대상으로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전형이었다.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항공과 사회복지를 함께 배웠다. 2년 동안 사회복지사 2급, 요양보호사 1급, 바리스타 1급, 소믈리에 1급, 국내여행안내사 1급 등 각종 자격증을 다섯 개나 취득할 수 있었다. 4년 동안 자격증 하나 없던 나에게는 그의 행보가 놀라울 뿐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재단 소속 직장에 들어가 회계 일을 했다. 6개월 각종 회계 프로그램을 배웠다. 큰 소득이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드디어 자신과 결이 맞는 한 천주교 재단에 입사할 수 있었다. 20살 때부터 지켜왔던 신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무교인 나는 가끔 그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매일 기도를 하고 성당에 가는 그가 신기했다. 종교가 도대체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성인이 되고, 그가 점점 나이 들어감을 느끼면서,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종교는 단순히 신의 여부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삶에서 매번 찾아오는 시련에 지지 않고 이겨낼 힘을 얻는 것. 사람에게 베풀며 온정을 나누는 것, 긍정적인 시선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 그에게 뿜어져 나오는 튼튼한 야생화 내음이 그런 것들로 만들어진 거였으니까.
원하는 재단에 들어가 일을 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항상 사람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지내고 있다. 언뜻 보면 누군가는 꺼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 ‘이모가 엄마가 되어줄게’하며 진심을 전했고, 경계하던 아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만든 공예품, 편지,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물했다. 당직을 위해 마련된 그의 작은 방은 아이들의 온기와 애정으로 채워졌다. 그는 순수한 사랑에 감동을 받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한 반려가 되어주고 있다.
그는 2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올해 방통대로 다시 편입했다. 공부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도전을 끊임없이 하고 싶었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는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며 밀려오는 레포트와 과제에 매번 죽는소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눈의 총기는 여전했다. 학과 동기들과 여행 계 모임을 시작했다며 자랑도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멋지고 대단하다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분명 그들도 엄마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거라고.
30년간의 절절한 헌신은, 원하는 삶 자체가 되었다. 긴 터널을 끝내고, 마침내 빛을 본 느낌이 든다는 그. 이제야 본인다운 삶을 누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나는 그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사람에게 베풀고, 동식물을 사랑할 것.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으니, 순간순간 보람과 행복을 느끼라고.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였지만, 이젠 내 인생에서 그와 닮은 구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실이 조금도 싫지 않다.
26년째 동거하는 나의 반려자, 엄마.
우리는 순간을 소중하게 느끼며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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