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지역공무원
주말 없이 일을 하다 보니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그게 구례였다. 자연스럽게 전라도에 살고 있던 '수'가 떠올랐다. 밥이나 같이 먹자는 말에, 반차를 쓰고 오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행만큼이나 수를 만나는 게 기대가 되었다. 경기도와 전라도. 물리적 거리는 너무 멀지만 마음만은 늘 가까운 사이니까.
점심쯤 만나 다슬기 수제비를 먹고 전기 없는 카카오 자전거를 빌렸다. 인도와 도로를 지나 섬진강 대나무숲길에 다다랐을 때 구례의 여름이 눈에 들어왔다. 유월 풍경은 무척이나 새파랗고 푸룻푸룻했는데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숲 사이에 숨은 어느 들판을 보며 감탄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머무르기로 했다. 어쩐지 찍히는 거에 영 소질이 없는 나와 달리, 수의 미소는 자연스러웠다. (사진을 위한 가짜 웃음일지라도..)
뷰파인더에 담긴 수는 녹진한 숲과 잘 참 어울렸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늘 신뢰가 가는 친구였다. 사는 게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수가 떠오르는 게 우연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그를 유심히 들여다볼수록 어쩐지 슬픔이 느껴졌다. 속마음을 잘 꺼내 보이지 않는 친한 친구를 인터뷰하고 싶었다.
스무 살에 만났던 그가 스물일곱이 되는 동안, ‘무인도에 떨어져도 혼자 살아남을 거 같이' 늘 확신이 가득해 보였고 어떻게 항상 심플한 태도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요즘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어?
바쁘게 지내고 있어. 요즘엔 요가 권태기가 와서 숨이 차는 운동을 찾다 보니 배드민턴을 하고 있어. 퇴근하자마자 체육관 가서 치고, 집에 가면 바로 잠들어. 밀리의 서재에서 책도 읽고 있어. 최근에는<퇴사합니다, 독립하려고요>. 독립한 사람들이 글 써서 엮은 책이야. 꽤 재밌어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
바쁠 땐 더 바쁘게 지내고 아무 일 없을 땐 축 처져서 아무것도 안 해. 평일엔 정리를 못 해서 주말만 되면 밀린 걸 다 해. 주말 중에 하루만 진짜 휴일인 거 같은 느낌이 들어.
•평소에 속이야기를 잘 안 하는 이유가 있어?
몰랐는데 그렇더라. 안 궁금한데 말하면 좀 그렇지 않아? 고민이 있을 때 답답함이 있잖아. 나는 그게 마음의 짐이라서 혼자 빨리 해결해야 해. 다 해소하고 나중에 과정을 나누는 게 마음 편해. 성격도 그래. 친한 사람한테만 다 드러내는 스타일 같아. 어쨌든 비치는 모습이랑 친한 사람들이 아는 모습이랑은 다를 거 아니야. 회사에서 특히 그래.
•동기들 사이에서 네가 듣는 말이 있잖아.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남을 거 같다" 맞는 거 같아?
나는 굶어 죽을 거 같은데… 독종은 아니야. 오히려 말랑말랑한 거 같은데.
•어? 말랑하다고?
죄송한데 표정 관리... 방금 표정 캡처하고 싶다.
•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인데?(웃음)
나 어떤 사람이지… 약간 청개구리 같아. 희소성 말했잖아. 대중 픽을 선택하지 않고 조금 먼 거를 따르는 면이 있어. 관심받는 것도 싫어하면서도 자체적인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걸 보면, 은은한 관심을 원하는 사람?
•그래서 공무원이 된 게 신기했어.
우리가 전공은 미디어잖아.
나는 이 끝을 봐보고 싶었어. 시험의 끝, 공부의 끝. 사실 최근에 광고 사기업에 이력서 넣어봤는데 떨어졌어. 확실히 느낀 게 경쟁력. 기업 필드에서 멀어졌구나 싶었어. 직장인이 되고 나서 자립 능력이 많이 떨어지더라. 한편으로는 왜 또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이중적인 마음도 들고.
•지금 하는 일이 어떤데?
지시가 내려오면 그냥 해야지 하는 공무원 마인드가 필요한데 성격상 그게 잘 안 맞아. 업무가 비효율적인 게 많은데 실무자가 나니까 해야 하잖아. 그런데 의견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
•그래도 회사에서 배우는 것도 있지 않아?
맞아. 시야는 확실히 트이더라. 무턱대고 내 사업했으면 인맥도 없고, 업무 절차도 몰랐을 거야. 월급으로 배드민턴도 치고 요가도 하고 전반적인 삶의 기름칠을 해주니까 좋지. 그런데 업무가 편할 땐 좋다가도 안 좋은 마음이 들어. 그게 나 자신이 짜증 나는 점 중 하나. 시험 합격했으니 그냥 다니면 되는 건데 만족을 못 하는 거잖아. 내가 이상이 높아서 그래. 본전은 찾을 수 있는 직업이지만, 뒤로 걷는 거 같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래서 사기업에 이력서도 낸 거잖아 용기가 대단해
합격하면 사직서 쓰고 바로 가려고 했어. 포트폴리오에 예전에 만든 것도 몇 개 넣었고.
요즘에 자기 일에 사명이 있는 분들을 보며 스스로 부끄럽더라. 나는 어떤 직업의식을 갖고 이걸 대하고 있는지 고민하게 돼. 배우 임지연 씨는 일하는 게 너무 재밌대. 직업의식 완전 최고일 거 아니야. 지금 나는 직장에서 1순위가 될 수 없으니까 좀 안 맞는 거 같아.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나를 표현하고 싶어. 그게 브랜드가 되면 좋고. 지금 제일 못 견디는 건 남한테 관심이 없는데 업무 자체가 타인의 삶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는 거야. 과정이 불편해. 예전에 카페 일을 몇 년 했는데 또 그러고 싶진 않더라. 자체적인 브랜드 만들고 협업도 하고 싶어. 다꾸 계정을 운영한 적도 있는데 지금은 잠정 중단했어. 방향성을 고민하니까 다른 게 필요하더라. 취향이 담긴 것. 그래서 나를 더 알아야 해. 요즘 이런 걸 찾느라 바빠.
•일이 어떤 의미인데?
자아실현. 인정욕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업무 잘 해내고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아. 남의 일에도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 일을 하면 어떨까. 그 기분 느껴보고 싶어.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것도 인정욕구가 중요해서 나온 결과겠지.
•우리가 만나면 늘 카메라를 들고 오잖아. 특히 여행할 때. 사진 찍는 취향이 확고한 편인데 언제부터 카메라를 좋아했어?
카메라, 사진 좋아한 건 딱 스무 살. 그때는 평범하게 사진 찍고 소소하게 남기는 걸 좋아했지 찍는 거 자체를 좋아한 건 아니야. 해가 지날수록 찍는 행위가 재밌어지더라. 물건을 사지 않아도 사진을 찍으면 온전히 내 작품, 내 것이 되는 거 같아. 그걸 느낀 후로는 더 좋아하게 됐어.
•어떤 걸 주로 찍어?
확실하게 사람은 아니야. (웃음) 자연이나 카페 찍는 걸 좋아해. 카페마다 분위기가 다 다르잖아. 인테리어 보는 재미가 있어. 중요한 건 노트북 딱 들고 카페에 가면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아. 대학생 때는 취미도, 취향도 딱히 분명하지 않았어. 나를 잘 몰랐던 거지. 지금은 내가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알아.
•그러고 보니 인물사진 찍는 걸 못 본 거 같아
맞아. 근데 구례 숲에서 서로 찍어줬을 때 너무 재밌었어. 레퍼런스를 보고 왔으면 더 잘 찍을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도 들더라. 처음으로 인물사진에 재미를 느꼈어.
•지금 쓰는 카메라는 뭐야?
카메라 기종은 두 번 바뀌었어. 스무 살 때 캐논 미러리스를 샀는데 개성이 없는 거야. 대중적인 카메라니까. 나는 카메라에 정체성을 투여하고 싶었어. (그때 정체성도 없었지만 말이야). 스물둘쯤 후지필름을 샀는데 조작법이 너무 어려워서 팔아버렸어. 마지막 카메라가 라이카야. 옛날 디지털카메라. 이제 다른 건 안 사도 되겠다 싶더라. 좀 후회되는 건 후지필름 팔지 말걸! 특유의 색감도 있고 매물 여전히 비싸게 팔리더라고….
•지금 카메라는 뭐가 좋은데?
일단 가벼워서 좋아. 후지필름은 디자인은 예뻤는데 무게가 있어서 활용을 잘 못했거든. 라이카는 목에 메고 어디든 갈 수 있어. 여행 때마다 늘 갖고 다니고 있지. 결과물도 옛 디카답고 편해. 카메라는 확실히 가벼워야 해. 브랜드가 라이카인 것도 좋아. 만약 이게 캐논이었으면 바로 팔았을 거야. (웃음) 웃기긴 하지만 난 희소성이 좋더라!
•항상 희소성을 좋아하네?
그러네. 대중적인 거는 좀 시시하다고 느끼나 봐. 고집이 좀 있어.
•요즘은 매일 일기도 쓰잖아. 그건 왜 좋아?
나도 왜 그런지 몰랐는데 최근에 유튜브를 봤어. 평일에 종일 살다 보면 뭔가 정돈되지 않고 엉킨 게 집까지 오는 느낌이 들어. 그걸 풀고 싶었는데 해결책이 일기가 된 거야. 주로 사실을 쓰는 편인데, 다이어리별로 사실과 감정을 나눠서 쓰고 있어. 다꾸계정을 운영했었는데 두 권은 써야지 싶어서 구매했다가 자연스럽게 용도가 나뉘더라고.
•어떤 걸 쓸 때 마음이 더 편해?
사실을 나열할 때 더 편해. 감정 일기는 어려워. 딱 자기 전에 몽롱한 상태잖아. 낮의 감정이 미화된 거 같아서 제대로 쓰기가 어렵더라. 그때 그 감정이 맞았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감정 일기를 다 쓰다 보면 후련해서 잠이 잘 와. 너무 신기해. 일기를 못 쓴 날에는 뭔가 찜찜해서 다음 날 10분 일찍 일어나서 일기를 써.
•언제부터 그렇게 썼어?
올해부터 썼어. 그전에 일기는 블로그에 올리는 일상 정도였고 손으로는 안 썼어. 일을 하다 보니까 그런 거 같네.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랄까. 생각보다 너무 좋아. 나를 위한 시간이 너무 중요해. 우리 나이가 좋은 나이니까, 계속해서 또 다른 내가 되고 싶어서 고민 많이 하거든. 다른 사람들은 일에 만족하는데 내가 별난 건가 할 때가 있어. 근데 오히려 만족하지 못한 환경에 있어서 나를 더 성찰하게 된 거 같아.
•근데 자책하고 후회하는 걸 많이 못 본 거 같아
처음에는 이게 내 잘못이니까 고민하다가도, 결론적으론 거기서도 뭔가 얻지 않을까 싶어서. 실패해도 교훈은 있다. 금방 털어내고 다른 이유를 찾는 거지. 근데 타고난 건 아닌 거 같아. 여전히 마음속에 맴돌 때도 있거든. 맴돈 채로 앞으로 할 것만 떠올려. 후회는 당연히 되겠지만 그냥 품고 다음 단계로 가는 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니까.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단순하게 재밌게 살고 싶어. 지금 따분한데 시간은 되게 잘 가거든. 이렇게 좋은 시기를 버리면 안 되겠다. 진짜 재밌게 살아도 모자랄 시간이잖아.
•요즘엔 뭐가 재밌는데?
청첩장을 직접 만들고 있는데 오랜만에 뭔갈 하니까 재밌더라. 밤 10시까지 야근하고 집에 와서 잘 때까지 만드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가. 자아실현을 위해 내 일을 하면 재밌을 거 같아. 요새는 하고 싶다는 말만 많이 하는데 이제 실행을 해보고 싶어. 말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사실 요즘 60살 이후에 뭐 할지 지금부터 고민해.
자신이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는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행동으로 뻗어가는 사람. 대화하는 동안 수의 담백한 확신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자칫 불안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상황에도 ‘재밌게 살아도 모자랄 시간’이라며 가볍고 산뜻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를 보며 감동했다. 다른 듯 비슷한 고민을 마주한 이십 대 후반의 우리, 그리고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 또한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음을 안다.
비록 상처 주고 상처 입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가장 아껴주고 사랑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