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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너프 Mar 26. 2024

경단녀 만 3년, 새 경력으로 돈 벌다

월천은 아닙니다만...

경단녀가 된 지 벌써 만 3년이 지났다. 내 경단의 기간은 계산하기가 참으로 쉽다. 아이의 나이와 같기 때문에.


남들이 모두 알만한 병원의 간호사로 일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 소화기 암, 그중에서도 지독하다는 췌장암, 간암, 대장암 환자분들과 만났다. 어쩌면 일이 아니라 환자분들을 사랑했을지 모른다. 정말 죽도록 힘들어도 환자분들에게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분들의 죽음에도 죽도록 힘들었다. 그리고 함께 체력적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을 떠났다.


임용을 준비했다. 멋모르던 초등학생, 내 담임 선생님을 따라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억 속의 선생님은 엄청나게 인자한, 엄마와 같은 이미지셨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왜곡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쨌든 초등학교 선생님은 되지 못하지만 보건교사는 되어보겠다며 퇴사 후 바로 노량진으로 갔다. 노량진에서의 수험생활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았다. 이해 중심으로 공부하던 나에게 암기식 공부는 한계를 느끼게 했고, 서술형 답안은 융통성이 없이 키워드 만으로 채점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의 완벽주의는 많은 양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임용 1년 차, 1차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 당시 결혼 2년 차였다. 남편의 속내는 모르지만 나는 내심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을 미신처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생기지도 않은 아기보다는 내 직업이 더 중요했다. 내가 일을 시작해야만 아이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처럼 자식들에게만 목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삼신할머니는 아무한테도 티 내지 않은 내 마음을 용케도 알아내셨다. 어쩌면 예상대로, 그러나 갑자기 아이는 생겼다.


선물같이 찾아온 아이를 가지고도 하루에 수만 번 생각과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감싸 안고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울면서 동생과 노트를 만들고 전화로 스터디를 했다. 배가 당겨오면 누워있다가 잠들어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시험을 포기했다. 아이와 나의 건강을 선택한 것이다. 그날로 나는 내 인생에는 없을 줄 알았던 경단녀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출산 후에도 100일도 되지 않은 아이를 재우고 영어 스터디를 했다. 아주 발악을 한 셈이다. 하지만 열정만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 대로 쌓이고, 돈은 돈 대로 쓰고, 역시 애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만 쌓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육아는 나에게 맞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아이가 잠들면 울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남편이 미웠다. 설거지를 하면서 물소리에 묻힐 만큼만 소리 내며 울었다. 나의 경단 2년은 아주 최악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육아만 전념하고 있던 나의 몸 이곳 저곳에서는 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 아파 아이 앞에서 운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몸이 아팠던 건지, 마음이 아팠던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렇게 큰 수술까지 한 차례 받고 나니 약간 정신을 차릴 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에게 다시 집중하던 어느 날, 동생이 예약해 둔 뮤지컬은 큰 변화를 만들었다.


단 몇 시간의 외출로 내 속의 묵은 때까지 박박 밀어 날려보낸 것이다. 그 이후로 뮤지컬에 미쳐 한 달에 네, 다섯 번을 보러 다녔다. 경단 주제에 야금야금 모아 온 용돈으로 알차게 다닌 것이다. 돈이 다 떨어지고 나서 더 이상 뮤지컬을 보러 갈 수 없자, 유튜브로 뮤지컬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며 그 열정을 살림에 쏟았다. 마침 이사 시기와 겹쳐서 새 집을 꾸미는 것에 미친 듯이 몰두했다. 하지만 집 정리나 꾸미기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우연히 시작하게 된 것이 독서였다. 그리고 나는 정말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SNS를 시작했다. 책 리뷰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잘 됐냐고 묻는다면 그냥 평범했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작은 성과들이 생겼다.


나의 마인드가 변했다. 우울감에 분노까지 조절되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쓰레기같이 느끼는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도 인식할 줄 몰랐고, 감정을 표현할 줄도 몰랐다. 더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 새로운 상담을 시작할 즈음이었는데 SNS를 시작하고 1달 만에 상담을 종결해도 될 정도로 좋아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의 마음에 응어리가 해소되기 시작된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엄마라는 타이틀은 분명 보람 있고 행복한데, 그것과 비례하게 나의 자존감이 상승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아이를 보면서 죄책감을 느꼈다. 아이의 행복이 나의 거짓된 행복으로 만들어진 느낌이랄까. 내 능력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남편의 돈으로만 살아가는 이 상황 때문에 돈을 쓸 때 마다 미안했다. 더 이상의 내 미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끝까지 애 엄마로 살다가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SNS에서 나는 누가 보든 안 보든 새로운 뭔가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그 자체가 나의 존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더 이상 애 엄마가 아닌 다른 타이틀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배웠다. 색다른 리뷰를 쓰고 싶어서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 툴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캔바를 무작정 가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캔바를 더 배우고 싶어져서 캔바 강의도 수강했고, 실제로 강의도 시작했다. 그 강의로 돈을 벌었던 것이 나의 경단 이후 첫 수익이었다.


지금 내 수익은 캔바 강의로 벌어들인 돈이 아니다. 순수하게 내 콘텐츠로 생긴 수익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남들이 버는 만큼의 월천을 번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하나를 고민 없이 결제한 것만으로도, 남편 급여에서 저축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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