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틸다 스윈튼의 옷이다. 특히 안서현과 함께 입었던 옷. 그들이 입었던 옷은 라거펠트가 "샤넬 2015-16 크루즈 컬렉션"에서 선보인 한복이다. 라거펠트가 해석한 한복은 장말 아름다웠고 한복의 특징을 매우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아래의 옷!
2.
다큐멘터리 <푸드 주식회사(Food, Inc.)>에서 제기한 다국적 기업의 사육에 대한 문제 의식이 이제 상업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상업적 소비는 공론화의 길을 열어준다. 자본은 무엇이든 자본화한다. 자신까지도.
3.
이 영화는 육식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왜 옥자를 죽이려고 해?"
"왜냐하면 소비자들은 죽은 것만 사기 때문이지."
"나는 집에 가고 싶어. 옥자랑 같이."
"그건 안 돼. 그건 내 재산이니까."
사람들은 죽음 전체가 아니라 죽은 것만을 산다. 육식을 상품화하는 자본가들은 죽는 것, 즉 죽음의 과정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죽음, 이것으로부터 인간은 소외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문명의 발전이다.
4.
"사육과 육식"(http://m.aladin.co.kr/m/mproduct.aspx?ItemId=2015017)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없진 않지만) 현대인이 동물의 교배와 도살로부터 격리됨으로써 더 잔혹하고 더 강렬한 살인과 강간을 원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5.
이 영화는 도살 전체를 부정한다. 그래서 방향을 잃는다.
6.
이 영화는 거대 자본이 사실은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또 한 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본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래서 절망적이다. 거대 자본은 자신의 균열이나 치부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방식으로 봉합한다. 봉합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을 들이는 것을 거부할 때 가장 완벽한 봉합이 이뤄진다는 것을 자본은 잘 알고 있다.
7.
왜 옥자와 같은 수많은 슈퍼 돼지들은 반란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저 분명한 죽음을 향해 스스로 걸어들어가는가, 왜 그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전기철조망을 뚫으려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옥자에게는 있는 미자가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옥자들을 해방하려면 모든 미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외로운 혁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외롭다. 지젝의 비관적 농담처럼 이 터널 끝에 빛이 있어 밝은 것이 아니라 기차가 달려오기 때문에 환해진 것이다. 절망적이어서 혁명을 일으키지만 혁명의 과정은 절망적이고 혁명의 끝 또한 절망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혁명은 필요하다. 왜냐고? 어차피 삶은 절망적이니까! 그 절망을 벗어던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 때 삶과 죽음은 구분되지 않는다.
8.
봉준호는 "설국열차"에서 저항과 혁명을 너무 단순하게 보여주더니 이번 영화에서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다. 봉준호가 꾸고 있는 꿈의 규모는 무척 거대하고 꿈의 의미 역시 매력적이다. 문제는 그 꿈을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9.
곳곳에 삽입된 영화음악은 정말 일품!!!
10.
어쩜 이런 동물을 생각해 냈을까? 옥자라는 동물에 대한 발상은 정말 쵝오! 드디어 세계 캐릭터 시장에 한국제가 끼어들 수 있게 되었다.
11.
영화 서두에서 옥자가 거의 인간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옥자의 특징은 영화 내내 발휘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들다가 말았나?! 이런 것도 일종의 맥거핀일까?!
*사진출처
대문/옥자 스틸 컷: 넷플릭스
샤넬 한복: http://www.hankookilbo.com/m/v/cd0c98e2480c4b92b3f6341a2ed2b6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