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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Jul 25. 2017

흐르는 채 멈추는 것들

사진작가, 무라카미 류와 웨루크, 김수영의 와선, 무섬마을

    1.

    사진작가 김홍희는 “실제로 촬영되는 어떤 광경이란 실제로는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라고 썼다(<<몽골방랑>> 중). 사진작가는 정작 보아야할 순간을 볼 수 없다. 중은 제 머리를 깎을 수 없고, “누구도 자신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볼 순 없다(김종태, <자가수혈>). 셔터를 누르면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작가는 정작 그 순간을 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사진작가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월터가 사진작가 숀 오코넬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월터가 우여곡절 끝에 숀 오코넬을 만난 곳은 히말라야였다. 오코넬은 히말라야의 유령이라 불리는 눈표범을 찍기 위해 몇 날 며칠 씩 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월터가 그를 찾아야만 했던 이유를 말하려는 순간 눈표범이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온다. 그러나 오코넬은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월터가 사진을 찍으라고 재촉하지만 오코넬은 이렇게 말한다.     


    “가끔 안 찍을 때도 있어. 정말 멋진 순간에…… 나를 위해서…… 이 순간을 카메라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이 순간에 머물 뿐이야.”

    “머문다고요?”

    “응, 바로 거기, 바로 여기, 지금 사라졌어. 사라졌어.”(<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중)    

    왼쪽이 월터, 그 옆은 숀 오코넬이다. 오코넬은 사진을 찍는 대신 눈표범을 셧트의 프래임이 아닌 맨눈으로 바라보며, 눈표범이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쫓고 있다. 그는 아쉬워하기 보단 만면에 만족감을 보이고 있다. 사진작가의 허세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어쩌면 사진작가를 진정한 예술가로 끌어올리는 힘인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스크린 샷)


    만나기 힘들다는 눈표범이 카메라에 들어오지만 사진작가는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면 눈표범은 사진으로 남겠지만, 눈표범이 나타난 그 순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순간은 순간이어서 흘러가버리고 만다. 사진으로 남긴다면 그 순간을 붙잡아 둘 수 있겠지만, 셔터를 누르는 동안 그 무구한 순간은 더렵혀지고 말 것이다.    



    2.

    사진을 찍음으로써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지만, 사진을 찍지 않음으로써 그 순간을 기억할 수도 있다. 이 순간들은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며 무언가 강력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데 강렬하지 않은 것들도 기억되곤 한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동시에 영화감독이며 스포츠 해설가로도 유명한 무라카미 류는 수필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설이라고 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책에서 ‘웨루크’라는 특이한 음식을 소개한 바 있다. 그는 이 음식을 먹는데 거의 이천만 원 정도를 써버렸다고 말한다. 어떤 맛이냐고?     


      웨루크는 다른 어떤 맛과도 닮지 않았다. 상어 지느러미나 전복처럼 내부에 건조된 바다를 감춘 그런 맛도 아니고, 새나 사슴처럼 피 냄새도 나지 않고, 자라처럼 생명 그 자체에서 풍겨나는 비린내도 없고, 복어의 흰 살이나 캐비아처럼 생식 체계에서 벗어난 짙은 맛도 없다. 또한 웨루크는 몸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새로운 식욕을 불러일으킨다. 목구멍에 남아 있던 상어 지느러미나 전복이나 비둘기나 개구리나 제비집의 향기와 맛은 모두 사라져버린다. 웨루크는 웨루크 그 자체의 맛도 지워버린다( <<달콤한 악마가 내 안에 들어왔다>> 중).    


    웨루크는 다른 음식의 맛은 물론 그 자체의 맛조차 지워버린다. 아무리 먹어도 “여전히 입에 넣자마자 맛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음식, 먹어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이런 음식에 그는 왜 모든 돈을 써버린 것일까. 음식 맛이 지워지려면 지워야 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애초에 지울 것이 없다면 지울 필요도 없다. 

    웨루크는 자신의 맛을 각인시키기 위해 자신의 맛을 지운다. 자신의 맛이 지워지므로 어떤 맛인지 결코 기억할 수 없을 것이나, 어떤 맛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을 여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류는 그 여운, 결코 부여잡을 수 없는 그 흔적을 소유하기 위해 이 음식을 계속해서 부질없이 먹었던 셈이다.

    

    무카라미 류의 눈빛은 강렬하다. 저 눈빛은 자유에서 자유롭고 싶은 삶을 갈망하는 듯하다. 그의 이력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를 소설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그의 많은 능력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류는  타오르미나 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받은 바 있는 유력한 영화감독이며, 쿠바 음악을 전파한 공로로 쿠바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한 뮤지션이다. 그 외에 NHK 라디오 진행자, 플레이보이지 칼럼니스트, 토크쇼 진행자, 축구 및 테니스 해설가, 사진작가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유목민처럼 한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다(사진출처: 트윗터 무라카미 류의 봇에 있는 사진을 가지고 왔다).


    3.

    강렬한 눈빛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지지 않을 사람이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진보주의자와 /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거대한 뿌리> 중)라고 직설적인 욕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사람이다.한편으로는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 / 그러나 속력과 속력의 정돈 속에서 / 다리는 사랑을 배운다 / 정말 희한한 일이다 / 나는 이제 적을 형제로 만드는 실증을 / 똑똑하게 천천히 보았으니까!"(<현대식 교량> 중)라고 말하는 속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와선>이라는 짧은 산문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선(禪)’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통일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을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선’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앉아 있는 수행이다. 

    달마대사 이야기에는 수행의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도력 높은 양반도 ‘선’을 한답시고 멍 때리고 앉아있자니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결국에는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것, 그의 눈이 부리부리해진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와선(臥禪)’은 누워서 하는 선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도 몰려오는 수마(睡魔)를 감당할 수 없는데 누워서 하는 수행은 오죽하겠는가. 

    그렇거나 말거나 김수영은 이런 어려움은 무시한 채 자기 식으로 해석하며 즐거워한다. “내 딴으로 생각한 와선이란, 부처를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다리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의 태도”라고 말이다. 김수영이 <와선>에서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은 헨델과 릴케, 그들의 음악과 시다.     


    릴케는 자기의 시체마저 미리 잡아먹는다. 그런데 릴케의 시체는 적어도 머리카락 정도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헨델의 시체에는 손톱도 발톱도 머리카락도 남아 있지 않다. 완전무결한 망각이다(「와선」 중).    


    ‘완전무결한 망각’이라니? 마치 그 자체의 맛까지 씻어 내리는 웨루크와 같이 릴케와 헨델의 작품은 “인상에 남는 선율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다른 범상한 작품들처럼 어떤 선율이나 시구를 남긴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부여잡고 어떤 식으로든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릴케와 헨델의 시는 ‘아! 이 음악(또는 시) 참 좋다’라는 감탄만을 자아내게 한다. 논리적으로 분석하게 만들기보다는 한 번 더 듣고 한 번 더 읽게 만든다. 아니 계속 듣고 망각하고 계속 읽고 망각하게 만든다.    


    4.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의 외나무 다리: 원래는 ‘물섬마을’이라 불렸다고 한다. 물에 둘러싸여 마치 섬과 같은 이 마을과 바깥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통로가 저 다리였다. 1979년 수도교가 생기면서 이 다리는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다리를 버리지 않았다. 이 외나무다리의 길이는 150m가 넘고 폭은 30cm 정도다. 장마에 떠내려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만들어야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다리는 공간과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까지도 이어주고 있다(사진출처: 내친구 헌웅 군이 찍었다).


    그날 하루 만에 어떻게 그걸 다할 수 있었지? 소수서원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보고, 안동찜닭에 안동소주를 곁들여 점심을 먹고, 도산서원을 보고, 무섬마을에 예약도 없이 들어가 어렵사리 숙소를 잡고. 새벽부터 움직이느라 피곤했는지 같이 간 친구들은 낮잠을 잤고, 나는 마치지 못한 일을 했다. 

    그런데도 시간이 남아 우리는 무섬마을을 한 바퀴 돌아 이 마을의 명물이자 350여 년간 무섬 마을과 강 건너를 연결시켜준 외나무다리에 이르렀다. 해거름 녘 이 마을을 찾아온 사람들 틈에 섞여 우리도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특별한 사건도, 어떤 강렬한 인상도 없었는데, 그 다리를 건넜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 좁은 다리에서 떨어지면 겨우 물이었지만, 삶의 바깥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두 팔을 벌려 중심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 사소한 행위 속에는 평행대 위를 걷기 위해 애쓰던 어린 날의 내가 있었고,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친구도 있었다. 어떤 순간은 흘러가지만 어떤 것들은 흐르는 채 멈추기도 한다.


*경북매일에 실은 글을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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