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대청마루에서의 유년시절
엄마는 내가 기억하기 훨씬 이전부터 일을 하셨다
자식이 많은 집의 엄마는 일꾼이고 철인이 되어야 했다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의 여름방학은
엄마에겐 필히 귀찮은 시절이었을 거다
에어컨도 없는 삼복에.. 삼시 세 끼라니 끔찍하다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여름방학에 늦잠을 실컷 자고 점심 나절 즈음 일어나 보면
머리맡에는 엄마가 차려두고 간 밥상이 면포에 덮여 있었다
시원한 미역냉국이었던 것에서 오이만 골라 먹는다
입이 짧았던 나는 두어 숟가락 엄마의 정성을 뒤적뒤적하다가
동글뱅이 스뎅밥상을 방구석으로 밀어놓고
대청마루로 나간다
우리 집은 전형적인 구옥의 한옥 구조를 갖고 있었다
오래되고 단열이 되지 않는 얇은 창호지의 문이
한 겨울에는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도 입에서 김이 나는 게 보였다
코끝은 시큰하고 아랫목은 뜨끈한 그 맛!
언니랑 아랫목을 겨루다가 밀려나 안방으로 쫓겨 가면
아빠와 엄마사이에 끼여 안정감을 느끼며 잠들었던 겨울의 추억
한 번은 벽틈으로 기어 들어온 개미에 팔이 물려
언니와 내 팔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자
아빠는 오함마로 흙벽을 부쉈다
시멘트와 모래를 사 오고는
몇몇 동네 아저씨들과 뚝딱뚝딱 새 벽체를 만들어 냈다
농이었는지 진짜였는지 모르지만,
옆집 희동이네 아저씨가 흙벽을 부수며
철근대신 골조로 넣어둔 대나무가 일본식 집 짓는 방법이라며
오랜 집의 역사를 부수는 게 아쉽다고 했다
ㄷ자 형태의 한옥에 파란 기와가 얹혀있는 집이 이리 낡았어도
엄마가 덜컥 계약을 한 이유는
넓은 앞마당과 뒷마당을 다해 95평 정도의 대단한 규모로
엄마의 "텃밭로망"을 실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고랑에 상추만 심어도 우리 식구 실컷 먹겠다"며
엄마는 기꺼워했다
뒷마당에 꾸려진 작은 텃밭에는
내가 싫어하는 가지와 매운 고추를 잔뜩 심어서
입을 댓 발 내밀고는 부러 뒷마당은 가보지 않았다
어려서는 가지의 식감이며 촉감이 싫었다
하물며 입이 짧았던 내게 가지볶음이라니..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둥그렇게 모양을 내 잘라낸 내 키만 한 사철나무가 있고,
박하허브와 빨간 장미넝쿨로 화단을 꾸몄다
봉숭아 꽃에 백반을 넣어 빨갛게 손톱물을 들이려고
밤새 손가락을 꽁꽁 묶고 자면
다음날 손톱뿐 아니라 쪼글쪼글한 살에도 벌겋게 꽃물이 번져있다
연탄을 쌓아두는 광 위의 옥상에는
뽀득뽀득할 때 수확한 뒷마당의 밉상 고추가
빨갛게 잘도 익어갔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마루는 난방이 되지 않는 대청마루여서
겨울에는 발이 시리지만, 여름에는 마루의 뒷문을 활짝 열어
대청 위아래로 바람을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앞마당의 더운 공기가 뒷마당의 시원한 공기와 만나 대류가 일면
뒷마당 쪽문 앞은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통했다
멀리 뒷마당 담벼락 위로 보이는 팔이 긴 능수버들나무와
느티나무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시원한 대청마루에 배를 깔고
지겨워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다가
스르르 낮잠이 들기도 했다
바람이 대청마루에 붙어있는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뒷마당의 보라색 가지와 고추들 사이를 비껴 지나쳐
멀리 수양버들과 느티나무의 이파리를 흔들면
수백 개의 초록 나무 잎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데
마치 은하수의 별처럼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몇 시간을 넋 놓고 바라봐도 지겹지가 않았다
고집스러운 여름의 햇빛이
꾸역꾸역 뒷집 옥수수밭 너머의 지평선으로 넘어가
수백 개의 반짝이는 느티나무 잎 사이사이를
노을빛이 헤집고 쏟아지는 그 장관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30여 년 전 그 오래된 한옥 집 대청마루에
누워있는 것만 같다
딱딱하고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뒹굴거리며 몰래 읽었던
(허접한 자물쇠로 잠겨있던) 언니의 연정일기와
언니가 사랑한 추억의 의천도룡기 비디오테이프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거려도 좋았던
무료했어도 풍요로웠던 그 시절
깊은 나무가 버티고 섰는 그 낡은 집이 좋았다
언제까지나 그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내 아이도 나를 닮았나 보다
아이가 학교에서 써온 "행복한 나를 위한 여름방학 계획"에 코웃음이 났다
고작 "콧바람 쐬기와 집에 있기"라니
아이에게 물어보니
"나는 집에 있는 게 행복해~"란다
집순이 유전자는 우성인가 보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토막 나고 도로로 편입되어 사라져버린
나의 그 낡고 푸른 유년의 풍요를 아이에게 소개하지 못해 아쉽다
그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