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위대한 역사야

역사가 지루한 사람들을 위한 지적인 그림책 2. 영국 국교회 탄생

by 안노라

몸무게가 한 달 새 5kg나 빠진 널 보고 마음이 덜컥했구나! 뭔 일이 있었나, 아님 연수가 너무 힘들었나 싶어서 말이야. 피곤해 보이는 데다 말 수없는 아들이라 지칠까 봐 묻지도 못했네. 오자마자 긴장이 풀어진 듯 깊이 잠든 모습을 보니 안쓰럽구나. 낯선 사람들 틈에 교육받고, 시험 치르고, 생활하는 게 어찌 쉽기만 했겠니. 쯧쯧. 집에 왔으니 편히 쉬렴.


누가야, 역시 갈 곳이 많은 것보다 돌아갈 곳이 있는 게 행복이지? 햇빛 뒹구는 낮에 나뭇가지 위에, 부푼 덤불 속에, 마른 잎사귀 사이에서 이리저리 까불락 거리다가도 뉘엿뉘엿 해 지는 저녁이 되면 둥지로 찾아드는 어린 것들처럼 말이야. 엄만 네가 자는 동안 짐을 풀어놓을게. 어머, 이게 뭐야? 얌전한 글씨로 '5월 19일, 연수원에서'라고 쓰여 있는 시집이 있네. 선물 받은 거니? 와~ 궁금하다. 누가 주었을까?


5월 19일 하니까 앤 볼린(Anne Boleyn, 1501~1536))이 생각난다. 아름답고 총명했지만 시대가 자신의 편이 아니었던 안타까운 여인이지. 그녀는 영국 국교회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 21세기인 지금도 영국 관광수입의 50%를 책임지고 있다는 헨리 8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에 그녀의 영향과 자리는 결코 작지 않아. 역사가 지루한 사람들을 위한 지적인 그림을 통해 1536년 오늘, 짧은 삶을 뒤로하고 깊이 잠들어버린 그녀의 이야기를 해 줄게. 누가가 일어나면 읽을 수 있게 말이야.


에두아르 시봇 <런던 타워 안의 앤 볼린, 1835>


누가야, 에두아르 시봇이 그린 <런던 타워 안의 앤 볼린, 1835>를 봐. 아리따운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눈물도 말라버렸나 봐. 체념한 듯한 표정이야. 오히려 그녀에게 무릎을 내어준 여인이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구나. 옷차림으로 봐선 고귀한 신분 같지? 그녀는 영국 왕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의 두 번째 부인 앤 볼린이야. 그녀는 외교관이었던 토마스 불린과 엘리자베스 하워드의 둘째 딸로 태어났어. 그녀는 어린 나이에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공주의 시녀로 프랑스로 가게 돼. 당시 시녀는 지금의 하녀와 같은 위치가 아니었어. 귀족 가문에서 뽑은 공주의 말동무 정도라고 할까?


총명한 그녀는 프랑스에서 궁정 예법을 배웠어. 16세기는 유럽의 절대왕정이 시작하는 시기였고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정통한 궁정 문화를 가지고 있었거든. 자부심이 대단했지. 그녀는 언어, 춤, 사교, 요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쌓고 교양을 익혔어. 부유한 귀족이었던 그녀가 프랑스에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여차 저차 한 역사의 뒷얘기는 생략하자. 잘못하면 역사 이야기보다 개인의 가쉽에 치우칠 수 있으니까.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당대의 왕이었던 헨리 8세의 유혹을 받게 돼.


헨리 8세는 이미 에스파냐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를 아내로 맞아 결혼한 몸이었어. 캐서린 왕비는 원래 헨리 8세의 형인 아서 튜터(Arthur Tudor, 1486~1502)의 아내였단다. 그런데 어떻게 형수를 아내로 맞았느냐고? 당시는 왕족끼리 정략결혼이 의례적으로 행해지던 때였거든. 정략결혼을 통해 왕가의 권력과 영토를 지켰고 이웃나라와 평화를 유지했어.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지.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 앞에 선 콜롬버스, 1843>


캐서린은 결혼을 통해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세웠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의 딸로 태어났어.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자신의 자녀들을 에스파냐의 강력한 위협이었던 프랑스나 인접국가였던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등지로 시집을 보내 관계를 조율했구나. 그런 정략적 방편의 일환으로 아라곤.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던 잉글랜드에는 캐서린을 보냈어. 누가야, 너희들은 자유연애가 아주 당연하게 생각되겠지만 인류 역사로 볼 때 개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자유연애의 역사는 아주 짧단다. 결혼만으로 본다면 너네 세대는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


그녀는 아서와 결혼했단다. 하지만 반년만에 아서는 병으로 죽고 말았어. 그러자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헨리 7세는 캐서린을 동생 헨리와 결혼을 시키고 싶어 했어. 막대한 지참금도 욕심이 났고 에스파냐와의 외교적 관계에도 도움이 되는 공주였으니까. 어린 나이에 아서와 결혼했던 그녀는 진정한 '초야'를 치르지 못했다고 고백했고 양측의 이해관계가 알맞게 맞물려 그녀는 시동생이었던 헨리와 재혼했어. 그리고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오로지 딸 메리 튜터만이 살아남았구나.


엠마뉴엘 고틀립 로이체 <중대한 문제, 1846>


그런 캐서린과 거의 20여 년을 살았던 헨리 8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영리한 앤 볼린에게 빠져들고 말았어. 엠마뉴엘 고틀립 로이체가 그린 <중대한 문제, 1846>을 보렴. 앞 쪽의 캐서린 왕비에게 기사들과 추기경, 뒤의 많은 사람들이 예를 올리고 있어. 그녀는 우아하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답하고 있구나. 하지만 그림 왼쪽을 보렴. 헨리 8세가 앤 볼린에게 다가가 노골적인 애정공세를 펴고 있어. 그리고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는 이는 에스파냐 대사야. 몹시 불쾌한 표정이지?


앤 불린은 왕족들이 갖는 기만과 거짓을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갖고자 하는 권력의 안정성을 위해서였을까? 그녀는 헨리 8세에게 캐서린과의 이혼을 주장했어. 가톨릭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자신이 합법적인 아내, 즉 왕비가 되기 전에는 자신의 몸에 손 하나 댈 수 없다며 완강히 버텼지.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그녀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캐서린은 끄떡도 하지 않았어.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이혼하면 딸 메리는 왕위 계승자에서 사생아가 되어버리니 어찌 그럴 수 있었겠니!


다급해진 헨리 8세는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어. 사실 그건 더욱더 어림없는 일이었어. 당시 유럽의 패권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Karl ⅴ, 1500~1558))가 쥐고 있었는데 황제와 교황의 사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틀어져 있었거든.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 로마 약탈)라고 한단다. 1527년 교황령의 수도였던 로마를 신성로마 제국 군대가 쳐들어가 무차별적으로 약탈했던 사건이 있었어.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의 침략보다 더 잔인하고 철저하고 처참하게 약탈했고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해 7개월 간 숨어 있었단다. 그는 간신히 목숨만 건졌어. 그런 클레멘트 7세에게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고 하면 가당키나 하겠니? 결국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교황은 시간만 끌었어.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아메리고 아파 리치 <사코 드 로마, 1887>


1527년에 있었던 사코 드 로마 시기에 로마 거리엔 여인과 수녀들의 비명소리가 쉬지 않았고 추기경과 사제들의 성이 완전히 유린되었으며 밤새 타오르는 불길로 종말이 온 듯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될 거야. 결국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가 이리 약탈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톨릭의 영향력이 위축되었고 종교적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해.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지? 아마도 중세 천년을 지탱한 가톨릭 세계의 부패하고 타락한 결과였을 거야.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헨리 8세는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를 내세워 1533년 앤 볼린과 정식으로 결혼했어. 그리고 다음 해인 1534년, 잉글랜드에 '국교회'라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 자신이 교황과 같은 '수장'임을 선포하지. 표면적으로는 앤 볼린을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가톨릭의 병폐를 도려내고, 국가의 권력을 집중하기 위한 정치적 묘수이기도 했어. 그는 거침없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앞으로 나아갔어.


하지만 이 허니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단다. 앤 불린은 딸 하나를 낳고 난 뒤 계속 유산을 거듭했어. 이제나 저제나 아들을 낳기를 바라던 헨리 8세는 슬그머니 지루해지지 시작했어. 게다가 앤 볼린은 순종적인 캐서린과는 다르게 당당히 자기주장을 하는 여인이었거든. 왕과 앤 볼린은 자주 다투었고 마음은 급속하게 얼어붙었어. 3년 정도가 되자 헨리는 캐서린에게 했던 말 그대로 다시 앤에게 전했어. "이혼해 준다면 평생 먹을 걸 걱정하지 않게 하고 엘리자베스의 교육을 맡아주겠다."라고 말이야. 물론 앤은 캐서린과 같이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


작자 미상, 앤 볼린의 참수


앤은 간음죄로 고발당했고 1536년 사형당해. 마지막 헨리가 주는 자비로 단번에 목을 벤다는 사형수가 칼레에서 왔다는구나. 그녀는 서른 넷이라는 젊은 나이에 목이 베어졌고 이 땅에 딸 하나만을 남겼어. 그녀의 딸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되도록 발판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Ⅰ, 1533~1603)야. 빼어나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낙천적이며, 탁월한 정치적 감각이 있었고, 좋은 결론을 위해서 때론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던 위대한 여왕이었지.

이 과정에서 위대한 법률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인간적으로는 유머와 지혜가 뛰어났다는 토머스 모어의 신실한 이야기도 있단다. 우리에게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유토피아>를 지은 작가지. 16세기에 이미 남녀가 동일하게 교육받고, 종교적 자유가 있으며, 재산권이나 소유가 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일하고 즐기는 사회를 꿈꾸었던 그였구나. '이 세상에는 없는 곳'이라는 유토피아를 구상했던 그는 얼마나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을까? 엄만 사상가이자 휴머니스트, 에라스뮈스와 친구였다던 그의 단단하고 창의적인 정신세계가 너무나 궁금하고 그런 지적이면서도 따뜻한 지식인이 그립구나.


그는 헨리 8세에 의해 발탁되어 추밀원에 들어갔어. 잉글랜드 최고의 외교관인 토머스 울지와 함께 유럽 각 국을 상대로 외교를 담당하기도 했지. 헨리 8세의 지근거리에서 정치적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고, 헨리 8세와 식사를 하며 자주 밤늦게까지 토론을 하기도 했다는구나. 결국 대법관이 되었어. 그런 토머스 모어가 캐서린과의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거야. 헨리는 여러 방법으로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런던탑에 갇힌 자신을 면회 온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며 신념을 굽히지 않았어.

"이곳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뵙기에 가장 가까운 곳이요."


(왼) 작자 미상 -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여왕 / (오) 작자 미상 - 왕 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


16세기는 인큐베이터처럼 르네상스를 키웠고 아직은 배아기였던 근대를 품었지. 토머스 모어와 같이 뛰어난 사상가가 미래의 방향을 제시할 글을 쓰기도 했고, 절대적 권력을 가진 왕정 속에서 찬란한 문화가 꽃피우기도 했어. 누군가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고 누군가는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내기에도 벅찼어. 하지만 역사란 참 놀라워. 위대한 업적만 남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질투하고 헤어지는 일상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저 왕의 아내로, 아무런 정치적 업적이 없었던 앤 볼린의 삶에서 영국을 일으킨 엘리자베스라는 위대한 여왕이 탄생했으니까 말이야.


누가야, 네가 일어나면 김이 솔솔 나는 따끈한 밥과 뭇국과 김치랑 시금치랑 멸치가 있는 소박한 밥상을 차려줄게. 집밥이 주는 에너지에 피곤이 풀리도록 말이야. 대신 엄마에겐 저 시집을 누가 선물했는지 말해 주겠니? 엄마가 모르는 만남이 있었는지 시집만 보고도 맘이 설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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