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판 레인 <돌아온 탕자> 외
느루야, 엄마에겐 이 단순하고 흔한 이야기가 어떤 심오한 철학보다 마음에 깊이 남았단다. 상처는 아물 수 있지만 흉터는 남는 법이라는 걸 말이야. 그래서 그만큼 행동과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또 실수하고 말았구나!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싶어. 하지만 엄마도 할 말이 많아. 보낸 톡은 읽지 않고, 분명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을 텐데도 자신이 일을 맡아야 할 분위기가 되면 여러 번 대답이 없는 동창에게 화가 났거든. 연락이 닿지 않아 할 수 없이 다른 친구에게 일을 맡기고 나면 그제야 핸드폰을 두고 나왔다느니, 시댁 일로 바빴다느니 하는데 이번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거야. 게다가 내가 뭘 잘못했냐는 식의 말을 듣고는 그만 자제력 상실이었어. 거친 언성이 오가고 나니 스스로에게 너무 무력감이 든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자기감정 하나 다스리질 못하다니...
이럴 땐 빨래를 삶는 게 젤 마땅한 일이지. 빨래 바구니에 모아 두었던 수건을 꺼내 표백제를 잔뜩 넣고 삶는 중이야. 마음도 저리 폭폭 소리 나게 삶아서 깨끗하고 말끔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빨래가 삶아지는 동안, 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도판을 붙들고 있어. 이 적품이 보고 싶네.
그림의 배경은 깊은 어둠에 싸여 있어. 어둠은 시나브로 공간을 물들여 그녀를 제외하곤 모두 자신의 그늘에 숨겨 버렸지. 약한 빛은 그녀의 목덜미, 어깨, 가슴을 타고 내려와 다리에 닿기도 전에 금세 힘을 잃어버렸네. 그녀가 이미 어두운 곳을 걷기 시작했다는 걸 암시하듯 다리는 그늘을 드리웠고 그녀의 발을 닦고 있는 하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이 모든 판단이 오로지 밧세바, 그녀에게 달렸다고 말하지. 아니 어쩌면 인간에게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몰라.
느루야, 밧세바는 다윗에게 갔단다. 밧세바가 다윗의 곁에 눕던 밤, 그는 사랑을 얻은 한 사내로서 잠들었을 거야. 그리고 운명처럼 밧세바는 임신을 하게 돼. 남편이 전쟁터에 있는데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구나. 남의 아내와 간통한 이가 있으면 둘 다 사형에 처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21세기에도 간통은 용납받기 어려운 잘못이잖아. 하물며 종교의 계율이 공고했던 그 시절, 부정한 임신이 알려지게 된 다윗과 밧세바의 마음이 어땠겠니?
다윗은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 공을 치하하고 맛난 음식과 술을 보내 밧세바가 있는 집으로 보냈어. 하지만 충직한 우리아는 전쟁 중인 데다 부하들이 들에 진(陣) 치고 서리 맞으며 밤을 보내는데 어찌 아내를 보며 편한 잠을 자겠노라며 근위병들과 밤을 보내는구나. 다윗은 다시 한번 그를 불러 술을 권해 취하게 하고는 집으로 보냈지만 그는 끝내 집으로 가지 않고 전쟁터로 돌아가. 드디어 다윗은 상관 요압에게 편지를 써 우리아를 맹렬한 전투에 앞장 세우라고 명령하지. 우리아는 전사 했고 밧세바는 다윗과 결혼해.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과 의로운 신하를 죽이기까지 해서 그의 아내를 취한 다윗은 결국 같은 사람이야!
느루야, 신이 사랑했던 다윗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데 일개 필부(匹婦)인 엄마는 두 말할 것도 없다는 변명이나 면책을 위해 이 그림을 보았던 건 아니야. 엄마는 그저 인간의 약함이 눈물겹다는 얘길 하고 싶어. 누구도 그 약함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그리고 인간의 약함에 대해 렘브란트는 엄살이나 과장 없이 통렬한 아픔을 전달해 준다고.
제 발등 찍듯 스스로 생채기가 난 엄만 위로받고 싶구나. 누군가 엄마에게 "나 같아도 화났겠다. 심한 말 한 거 아니야. 걔가 반성해야지."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내 행동이 당연했다고 말이야. 하지만 빨래 삶는 솥을 뒤적이는 엄마는 자신이 없어졌어. 눈엔 하얗게 보이던 수건에 표백제를 넣고 삶았더니 섬유 속 찌든 때가 빠져나와 시커먼 물이 올라오고 있거든. 내 안의 고인 어둠처럼.
삶의 파란(波瀾)을 겪은 렘브란트는 우리가 미처 다다르지 못한 곳을 감지하는 깊고 예리한 시선이 생겼나 봐. 주먹코에 백발이 희끗한 그가 엄마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해.
<사도 바울로 분한 자화상, 1661>을 보자. 쟁기가 지난 간 듯한 이마와 개진 개진한 눈, 성긴 수염, 희끗해진 머리카락 모두 그가 피로하고 곤궁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지. 그는 예전처럼 빛나지 않아. 발랄하게 뽐내던 색채도 없어. 그런데 그가 윗옷 틈새에 칼을 넣고 손엔 성경책을 들고 있구나. 뛰어난 지성과 잔혹한 이론으로 예수를 핍박했던 히브리인 사울과 엎드려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죄와 약함을 고백했던 로마인 바울의 삶을 자신에게 투영시킨 것일까?
말년의 그는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어. 교만과 배짱, 자부심에 넘치던 자신과, 이후 엎어져버린 삶으로 인해 소심해지고 작은 친절을 그리워하는 고독 속의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야. 한 줌의 윤색이나 포장도 없지. '실존에 대한 응시'라고 해야 할까?
렘브란트의 눈을 보니 엄마가 한 행동에 대해 변명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네. 엄마가 친구에게 심한 말을 했던 건 잘못했어. 그건 가능한 못 자국을 만들지 않겠다는 엄마 삶의 철학에 반하는 일이야. 하지만 친구의 태도를 묵인하고 싶지 않아. 친구는 함께 일을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상대야. 성숙한 엄마였다면 친구에게 그 사실을 사실로서 전해야 했어. "넌 친구가 아닌 것 같아."가 아니라 "너와는 일을 함께 하기 어려워."라고 말했어야 했어.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생각하는 힘이 센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인가! 생각하는 힘이 센 것과 실천하는 손발이 정직한 것 역시 얼마나 먼 거리인가!
엄마가 타인에게 말과 행동을 사려 깊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더러 비난하고 화를 내는 것처럼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별개일 때도 많지. 특히나 제법 책을 읽었다거나 교양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입으로는 온갖 달디 단 말을 쏟아내고 세상 모든 일을 이해할 것처럼 굴면서 막상 이해관계가 부딪치면 옹졸하고 편협하고 이기적이 되는 경우처럼. 그것이 인간의 약함이라고 해서 묵인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하나님도 다윗과 밧세바 사이의 첫아들을 칠일만에 데려가 버리셨으니까.
느루야, 한때 재능에 대한 교만과 넘치는 배짱을 가졌던 렘브란트는 1662년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을 그린단다. 1635년 <탕아와 창부>라는 작품에서 벨벳의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호기롭게 창부를 무릎에 앉혔던 그가 굳은 발과 벗겨진 신발을 끌며 무릎을 꿇은 탕자의 모습으로 돌아왔지. 거의 30년 만이야.
그의 그림 속 거의 모든 것이 변했단다. 빳빳한 새틴 주름위에 매달린 은은한 보석, 털 한 올 한 올에 정전기가 일 것 같던 모피와 정성 들인 콧수염은 모두 사라지고 죄지은 인간의 고해성사가 캔버스에 쏟아졌구나. 느루야, 그림을 보렴. 탕자는 구속과 책임이 있는 집을 떠나 자유롭고 싶었어. 자신의 유산을 미리 받아 세상을 돌아다녔지. 주위엔 술과 친구와 여자가 끊이지 않았어. 하지만 돈이 떨어지자 웃음과 여유도 사라졌어. 돼지 먹이로 끼니를 때우던 어느 날, 탕자는 그리운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가려고 결심하지. 그는 마침내 비참한 모습으로 집에 도착했어.
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모습을 봐. 아들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짓무른 눈, 근심과 애통으로 굽은 어깨, 기다림의 세월이 남긴 성기고 희끗한 머리칼, 자식에 대한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섞인 두 손, 모두 애끓는 부정(父情)을 드러내지. 하지만 돌아온 탕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형은 침묵해. 그는 성실하게 살았고 책임을 다했고 늘 아버지 곁을 지켰지. 그런 자신의 수고를 당연히 여기고 방탕한 동생을 반기는 아버지가 섭섭했겠지.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주류의 해석이 장자인 형은 경건하나 사랑이 없는,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위태로운 신앙으로 평가하는 것 같아. 엄만 신앙인이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인지 형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엄마도 그러했을 것 같아. 다만 다른 관점에서 형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단다.
빨래가 다 삶아졌구나. 마음도 삶아졌는지, 표백이 되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조금 편안해졌어. 빨래를 헹구기 전에 늘 올바랐던 탕자의 형에게, 그리고 나와 느루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수도(修道)를 하려고 현자(賢子)를 찾은 두 남자가 있었어. 현자는 다짜고짜 자신이 들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돌을 들고 오라고 했지. 한 남자는 옷자락을 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담을 수 있을 만큼 가득 들고 왔어. 한 남자는 이마에 핏줄이 돋을 정도로 힘에 부치는 커다란 돌덩이를 낑낑 안고 왔단다. 현자는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가지고 온 돌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한 거야. 커다란 돌덩이를 낑낑 안고 왔던 남자는 그 돌덩이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기에 금방 제자리에 놓을 수가 있었어. 그런데 작은 돌멩이를 들고 왔던 남자는 그 많고 작은 돌멩이들이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어. 현자는 이렇게 말했지.
"자신의 잘못은 돌덩이와 같다. 자신이 아는 커다란 잘못은 반성하고 뉘우쳐 다시 저지르지 않을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일상적인 잘못은 무심히 지나가고 타인의 상처는 회복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