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넷째 주 - 페테르 파울 루벤스 <추위에 떠는 아프로디테>
하루의 계획과 일정 위를 쉴 새 없이 걷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부은 발등과 피로한 무릎, 평지도 버거운 허벅지, 냉정한 가슴, 그리고 짓고 있는 표정이 내 안의 감정인지 때때로 확인해야 하는 저의 낯선 얼굴에게 잠시 휴식을 허락합니다. 바다 물이 빠진 갯벌처럼 쩍쩍 갈라지고 메마른 몸이 엎드린 침대는 일상의 무게로 출렁거립니다. 집이든 방이든 침대이든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은 물결 높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바람 잔 섬입니다.
세상은 개인을 무시하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나'는 왜 이리 작아지는지... 다발에 묶인 낱개는 수량으로 환산되지 않듯, 사회 속의 '나'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건 노동으로 밥을 사는 구조이기 때문이겠지요? 노동이 헐하게 느껴지는 요즘, 위안이 되는 그림 한 점을 올립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추위에 떠는 아프로디테, 1614>입니다.
하늘엔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대지는 어둡고 음습합니다. 희미한 빛조차 아주 멀리 있습니다. 저 너머는 원시(元始)와 고독의 땅인 듯 서있는 나무조차 거칠고 외로워 보입니다. 화면 중앙엔 금빛 머리를 가진 여인이 잔뜩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 옆에 작은 아이가 떨고 있네요. 먹구름이 몰려오면 곧 비가 쏟아질 텐데 여인과 아이는 사나운 추위와 곤경으로부터 얇은 천 한 장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지요? 옆으로 뻗친 귀와 단단한 염소 다리를 가진 육중한 사내가 다가옵니다. 놀랍게도 그의 손엔 과일과 곡식이 담긴 뿔이 들려 있네요. 그가 가리키는 손짓에서 곤경에 처한 그녀와 아이를 도와주려는 의지가 보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풍요의 뿔 '코르누코피아(cornucopia)'에서 쏟아지는 달디 단 과일과 빵이 이 모자(母子)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그는 사티로스(Satyros)입니다. 상반신은 사람이지만 하반신은 염소의 다리와 몸을 갖고 있지요. 웅크린 금발 여인은 미와 아름다움의 상징인 아프로디테입니다. 화살통을 깔고 앉은 채 추위에 발가락까지 곱은 아이는 에로스겠지요?
왼손으로 천 자락을 꼬옥 쥔 에로스의 손에서 매운 추위가 느껴집니다. 추위와 배고픔은 사랑을 원하는 금촉 화살이건, 사랑을 거부하는 납촉화살이건 모두 거무튀튀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또 생(生)의 활력과 성(性)적 에너지로 넘치던 여신의 반짝이던 눈망울에서 생기를 앗아갔습니다. 삶에서 가장 보드랍고 윤택한 빛깔을 가진 '사랑'과 '아름다움'조차 풍요(豊饒)가 없으면 그 빛을 잃고 마는군요.
루벤스는 알레고리를 이용해 작품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위대한 화가는 놀랍게도 풍요의 뿔 '코르누코피아'를 신(神)이 아닌 불량한 외모의 사티로스에게 맡깁니다. 그는 사랑과 아름다움이 사위어가는 소리를 듣자 곧바로 달려옵니다. 그러니 염소의 성실함으로 척박한 산악을 내달리는 사티로스의 다리는 인간의 품격, 즉 사랑과 아름다움을 지키는 파수(把守)인 셈이지요.
침대에 엎드려 오래도록 루벤스의 그림을 읽습니다. 어쩌면 우린 염소의 다리를 하고 출근해 부모의 얼굴을 하고 돌아오는 사티로스 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