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넷째 주-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 목 자르는 유디트>
화면 밖으로 피가 솟구칩니다. 붉은 피는 하얀 시트를 흥건히 적셨습니다. 있는 힘껏 머리를 잡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목 깊이 칼을 찔러 넣은 여인의 얼굴은 단호한 결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말의 연민도 없군요. 그녀의 얼굴 반쪽에 닿은 어두움은 팔을 통해 남자의 숨통을 끊고 있습니다. 절규하는 남자의 눈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가까스로 부릅뜬 눈은 전날 밤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에게 술병과 향유를 들고 찾아온 그녀의 아름다움이 눈부셨던 지난 저녁을 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유디트입니다. BC 6세기경,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유대의 베툴리아를 침략합니다. 이제 도시는 쥐면 으스러질 상황이 됩니다. 이때, 부유하고 우아한 과부였던 유디트는 하녀 아브라와 함께 적진으로 들어가지요.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매력적인 미모와 교양 넘치는 대화와 골리앗도 쓰러뜨릴 수 있는 술로 잠재웁니다. 하녀와 유디트는 적장의 목을 베어 이른 아침, 베툴리아의 성벽에 내겁니다. 으깨질 뻔했던 유대 군은 힘을 모아 장수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앗시리아군을 물리칩니다. 유디트는 우리의 논개이지요.
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에서 1656년 사이)가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20~1621>입니다. 서구 미술사에서 유디트는 작가들마다의 재해석을 통해 다양한 유디트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유달리 젠틸레스키는 다른 작가와는 확연히 다른 주체적이고 강하며 분노에 차 있는 유디트를 그렸습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희고 가는 처녀라면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힘센 아줌마입니다. 크리스토파노 알로리의 하녀가 어둠에 몸을 숨기고 두려움에 떤다면 젠틸레스키의 하녀는 거사를 적극적으로 돕는 조력자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젠틸레스키의 아버지는 토스카나 출신의 유명한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입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바로크 시대의 초기로 ‘키아로스쿠로’라는 명암대비법을 개척한 카라바조의 열풍이 불던 때였습니다. 오라치오는 시대의 변화가 만든 회화의 기법들을 맏딸이자 재능이 출중했던 젠틸레스키에게 전수합니다. 딸이 19살이 되던 해,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를 새로운 그림 교사로 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부남이었던 타시는 젠틸레스키를 강간했고 아버지는 타시를 고발합니다.
1612년, 로마에서 앞에선 동정하지만 뒤에선 수군거리는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부는 강간 당시, 젠틸레스키의 순결 여부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산파들에게 다리를 벌리는 치욕을 요구했습니다. 화가인 그녀의 손가락 마디를 조이고 부수는 고문을 집행하며 진실하다면 정직 만을 말할 거라 을러 대었습니다. 재판 과정은 비참했고 굴욕적이었습니다. 다행히 타시가 처제도 강간해 임신시켰으며 그녀 아버지 오라치오의 작품을 몰래 훔친 것이 발각되어 1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다시 한번 그림을 볼까요? 젠틸레스키는 자신의 얼굴을 유디트에게, 홀로페르네스는 타사의 얼굴로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소심한 복수였을까요? 하지만 더 큰 무게중심은 유디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하녀의 모습에 있습니다. 그녀는 하녀 아브라를 통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약자들끼리의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웅변합니다.
그녀는 삶이 던지는 돌팔매질에 굴복했을까요? 그녀는 나중 싱글 맘이 되지만 아버지보다 뛰어난 화가로 자리매김합니다. 로마 미술 아카데미 정식 회원이 되었고, 왕실 화가로 근무했으며 바로크 시대의 탁월한 지성들과 만나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최초의 페미니즘 화가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