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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an 11. 2021

독서는 가슴에 자신의 지문을 찍는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49  책 읽는 시간

  느루야, 깜짝 놀랐구나. 우리나라 1인당 년 평균 독서량이 7.5 권 정도라는 사실 말이야. 엄만, 더 적지 않을까 짐작했었거든. 오빠는 우스개 소리로 그건 아마 취업 문제집 포함해서일 거라고 했지만 단순히 우스개 소리로만은 들리지 않았어. 엄마 주위에도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요즘 지하철 타면 책 읽는 사람은 문화재감이야. 거의 다들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거든. 게다가 이어폰까지 끼고 있으니 물리적 공간마저도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아. 각자 자신의 세계에 있는 거겠지. 군집하되 소통하지 않는 현대의 단면을 보는 기분이야. 어쩌다 핸드폰 게임에 몰두해 있는 승객을 보면 인간이 발전시킨 최고 기술이 여가시간, 심심풀이로 쓰인다는 게 안타깝더구나. 엄마가 나이 든 세대여서 인터넷 문화를 낯설어하기 때문일까?


  하긴 모임에서도 이런 대답을 들은 적 있구나. 리더가 "책 읽는 마을과 술 익는 마을 중 어느 곳으로 이사 가고 싶으세요?" 했어. 책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는 엄마는 잠시 망설였지. 그런데 30대 젊은 친구가 그러는 거야. 둘 다 싫다고. '책 읽는'것도 좋고, '술 익는'것도 좋은데 '마을'이 싫다고 하더라. 이게 무슨 뜻인가 의아했는데, 그 친구는 '책 읽는 인터넷', '술 익는 인터넷'이 좋대. 익명의 온라인에서는 자유로운데 오프라인에서는 눈치를 봐야 한대. 느루, 너도 그러니? 


  오프라인에서 우정을 키우고 지식을 쌓았던 엄만 아직도 학교 도서관 유리창을 물들이던 노을과, 그 창 아래에서 누렇게 바랜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나던 묵고 오래된 것들의 냄새를 기억해. 사춘기가 활활 타오르다 재로 사그라진 눅눅한 냄새였지. 그때의 엄만 비밀스러운 검댕이가 손 끝에 묻어 어떤 문을 열더라도 잡은 문고리엔 사춘기의 위험하고 외로운 상처가 묻어났어. 마치 이 그림처럼...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에드워드 호퍼 <칸막이 객실 C 293  차량,  1938>


  도시에 X선을 투과시켜 고독의 뼈를 들여다본 에드워드 호퍼의 <칸막이 객실 C 293 차량, 1938> 이야. 살짝 열린 창문으로 석양은 토마토처럼 뭉그러지네. 다리 너머 숲은 기차가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어. 숲은 본디 내성적이라 예고 없는 손님을 반기지 않거든.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며 기차가 다가왔을 때, 숲은 "쉿, 조용해. 위험할지도 몰라."하고 제 안에 깃든 짐승들을 침착하게 다독였을 거야. 


  객실의 초록빛은 숲을 닮았네. 어둡고 비밀스럽지. 여자는 이 위험한 공간에 혼자야. 그녀의 짙은 옷, 모자에 가린 눈, 꼬아 앉은 다리, 그리고 읽고 있는 책은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 지 보여줘. 고립되어 있지만 흰 깃발을 내걸고 고독에 투항하기엔 자존심이 세지. 그녀는 웅크리며 누구의 관심에도 닿지 않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누군가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고 "이 책, 잠깐 봐도 될까요?"하고 말하길 기다릴 거야. 


  느루야, 누구든 젊음을 지날 땐, 숲처럼 내성적이고 기차처럼 위험하고, 이 여인처럼 외롭단다. 우리의 젊은 날엔 오로지 펼친 책만이 각자의 습지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가려 주었구나. 너희들도 지나온 우리처럼 외롭겠지? 너희들은 인터넷이 연결하는 세상,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나 카톡으로 '내면과 외면의 거리'에서 생기는 습기를 가리고 있는 거니?


  알 순 없지만 젊은 날의 우리처럼, 내면과 외면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는 여인을 소개할게.


비테리오 마테오 코르코스 <꿈, 1896>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질문하는 눈을 봐. 턱을 괴고 정면을 향해 똑바로 묻고 있지. 그녀의 우아하고 절제 있는 옷, 단아한 모자, 고급스러운 양산, 긴 장갑은 사회가 그녀에게 부여한 것이야. 하지만 생각하고 질문하는 그녀의 눈은 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달려가지. 이미 책을 통해 다른 세상을 보아 버렸거든. 지금의 우리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지금의 그녀는 책을 읽기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을 거야. 


  그녀가 긴치마를 자른 뒤, 자신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건 책을 읽으면 생기는 '마음의 지문' 탓이야. 한 손가락에 오로지 하나의 지문이 있듯, 제대로 된 독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분명한 지문을 만든단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난 어떤 삶을 살기 원하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가 선명해져. 타인의 삶을 모방할 수도 없고, 기웃댈 필요도 없어. 그건 내가 아님을 알거든. 마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풀어 크로노스의 미궁을 빠져나오듯, 책의 행간과 자간 사이의 길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찾아내지. 


  느루야, 비테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 1896>에서 그녀의 옆에 책이 있지 않고 핸드폰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당찬 눈으로 질문하기보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까? "그래, 맞아. 정말 정보의 바다야." 하거나, 친구가 해외여행하며 띄운 사진을 보며 부러워하거나, 현실보다 훨씬 환상적인 세상을 선택해 즐기면서 황홀해하지 않았을까? 피부의 땀구멍이 아닌 두뇌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인터넷에 길을 찾고자 들어섰지만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위험은 없을까?


앙리 팡탱 라투르 <책 읽는 사람, 1861>


  오해하진 마. 인터넷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책이 다른 어떤 수단보다 절대적으로 더 깊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이미 도래한 세상은 엄마가 갖고 있는 경험치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기에 그런 이분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아. 인터넷의 유용성을 충분히 알고 있어. 다만 그 편리함과 유용성이라는 달콤함에 너무나 혹해 이면에 감춰진 위험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우려가 있는 거야. 


  느루가 엄마를 너무 고리타분하게만 느끼지 않는다면 앙리 팡탱 라투르의 <책 읽는 사람, 1861>처럼 의자에 앉아 엄마의 얘길 들어볼래? 


  엄만 인터넷과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같지만 전달하는 방식은 정반대라고 생각해. 이 표현이 적당하다면 UK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마틴을 통해 널리 사회에 유통되고 있는 이 문장을 쓰고 싶다.

  "메신저가 곧 메시지다."


  인터넷이라는 메신저(전달자)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지. 대중적이야. 그래서 정보를 숙고할 틈을 주지 않지. 그 정보가 팩트에 근거한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새가 없이 새로운 소식이 시시각각 크리스마스트리의 알전구처럼 깜빡여. 메신저는 관심을 분산시키고 이동시키고 사냥하게 하는 특징을 갖고 있지.


  또 나의 클릭을 통해 나를 구성하고 내가 관심 갖고 있는 것, 가족과 친구와 취미와 건강상태와 구매 능력 등 거의 모든 것의 정보를 수집하지.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AI의 알고리즘은 유사한 정보를 '추천'의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알람'을 통해 끊임없이 자극해. 친구의 소식은 '우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와의 '비교'를 유발하고, 경쟁적인 '좋아요' 속에서 자신은 점점 초라해지지. 때로 나의 클릭은 '난 사지 않았지만 지불하게 되는 상품'이 되기도 해. 


메릴린 먼로의 책 읽는 모습


  이에 반해 책은 나의 속도에 알맞게 다가오지. 내가 차분히 정독하면 글쓴이는 그제야 나와 일대 일의 관계를 맺어. 누구도 그 깊고 은밀한 관계에 간섭할 수 없어. 관계가 맺어지면 활자는 기호가 아닌 생생한 인물이 되어 나를 만나지. 책 속의 단어가 미심쩍다면 우린 다른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그걸 통해 균형을 잃지 않는 판단이 가능해. 또 책은 지식이든 감정이든 떠 먹여주지 않고 내가 씹어서 단단한지 무른 지 거친 지 부드러운지 경험을 갖게 하지. 그 경험이 내게 확신을 줘.


  물론 내가 노력할 때만이야. 책은 내가 쓰다듬지 않으면 그냥 활자로 있어. 마침내 내가 부르면 램프 속 지니처럼 나에게 응답해. 그 응답은 지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외로운 나의 벗이 되어주는 깊은 목소리야. 아무도 모를  둘만의 시간과 추억을 공유하게 되지. 그래서 붉은 인주 없이도 자신만의 지문이 가슴에 선명히 남게 된단다. 


  느루야, 우리 세대의 세계적 섹스 심벌이었던 메릴린 먼로의 책 읽는 모습이야. 터질 듯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지하철 환풍구에서 치마를 나풀거리는 모습으로 대변되는 그녀에게 이런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지. 대중매체가 갖는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은 우리의 지각을 흔들지만 우린 책에서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

  

오귀스트 르느와르 <책 읽는 여인, 1875>


  "여자에게 가슴과 엉덩이가 없다면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오귀스트 르느와르의 <책 읽는 여인, 1875>을 보렴. 그는 평생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세상을 그렸고 그 세상의 중심에는 춤추며 미소 짓는 여인이 있었어. 동시대의 화가였던 에드와르 마네가 울퉁불퉁한 세상을 도끼로 자르고 대패로 밀었다면 르느와르는 세상의 무늬가 아름답게 드러나도록 끈기 있게 사포질을 한 화가지. 


  그런데 이 그림의 모델은 책에 가려 풍만한 가슴이 보이지 않는구나. 더 더구나 탱탱한 엉덩이의 탄력은 찾을 수 없어. 여인의 뒤에는 후광처럼 따스하고 밝은 빛이 쏟아지고 그녀는 책 읽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어. 그녀의 발그레한 볼과 미소 짓는 도톰한 입술에서 결코 세상에 빼앗기지 않는 그녀만의 행복이 느껴져. 르느와르는 이렇게 말했어. 


  "풍경일 때는 그 속에서 산책을 하고 싶어 지는 그림, 여인의 몸을 그릴 때는 그들을 껴안고 싶어 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어떠니? 느루는 저 책 읽는 여인을 한번 품 안에 고스란히 안아보고 싶지 않니?


오귀스트 르느와르 <책 읽는 작은 소녀, 1890>

  

   느루가 초등학생 때 엄마와 오빠와 함께 모여 곧잘 책을 읽곤 했어. 그때마다 느루는 '글자 울렁증'이 있다고 그림만 그렸지. 그런 네가 중학생이 된 어느 날, 갑자기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책을 읽어댔어. 그리곤 "이렇게 재밌는 책을 왜 억지로라도 읽게 하지 않았어요?" 했었지. 기억나니? 


  예쁜 옷은 자주 사주지 못했지만 연극이나 음악회는 틈나는 대로 데리고 갔었지. 아마도 그때, 느루는 주로 객석에서 잠을 자고 오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음엔 어떤 핑계를 대고 빠질까 궁리했을 거야. 하지만 느루가 네덜란드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누구보다도 열심히 미술관과 음악회를 순례했다는 걸 알아. 지금은 오빠와 느루가 엄마보다도 먼저 좋은 공연을 찾아 예매를 하지. 왜 그렇게 변했을까 궁금했단다.


  혹시 전달하는 방식 때문 아니었을까? 자신이 속도와 용량을 조절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편안함, 수용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율성, 오페라 노랫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나의 피부를 간질였던 체험 등이 책이나 예술에 대해 어린 시절과는 다른 판단을 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어. 함께 연극을 보러 간 경험과 추억은 힘이 세니까. 인터넷과 책의 차이는 결국 자율성과 경험의 유무로 인한 자유로움의 차이겠지.


  누군가는 "인터넷도 자율적으로 내가 중단할 수 있는데요." 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봐. 자신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핸드폰과 마주하고 있는지. 또 화장실과 침실에까지 핸드폰을 들고 가는 게 단순히 흥미 때문일까? 손에서 떼내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주체적인 판단이라고 믿었던 의견은 알고리즘이 내 무의식에 심어 놓은 편향이 아닐까?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

  

  난간 위로 시원스레 펼쳐진 파초잎이 그늘진 뒤뜰, 여인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어. 그녀는 온화한 표정으로 오롯이 책 읽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구나. 책을 무릎 위에 올린 채 행여 행간을 놓칠세라 왼 손 검지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고 있어. 등 뒤 화조도 병풍에 있는 새는 포로롱 날거나 재재거리며 노래 부르지 못할 거야. 그녀의 독서를 방해하게 될 테니까.


  아마도 바느질이나 길쌈을 하는 잠깐의 틈새에 지난밤 못다 읽은 책의 다음 장면이 몹시 궁금했겠지. 밥과 음식을 차려내고 집 안팎을 단속한 뒤, 조용히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호젓하면서도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걸 거야. 조선시대, 단단하고 촘촘한 가부장 사회가 주는 규범과 부덕의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상상력이 무한히 넓어지는 책으로의 여행은 멈추지 못하는 유혹이었을 테니까. 문자 안에는 다른 세계가 있어.


  느루야, 조선의 선비 윤덕희의 <독서하는 여인>처럼 네가 길을 잃을  때, 앞이 캄캄할 때, 그럴 땐 페이스북이 아니라 책을 펼치길 바라. 그 안에서 네가 관계 맺었던 저자와 주인공과 등장인물에게 물어보렴. 수많은 사람들의 조언보다 너 자신이 네게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렴. 그리고 책도 읽고, 술도 익는 마을 공동체 안에서 술잔을 들며 위로받고 용기 내기를 바란다. 삶이 미궁이라고 생각할 때, 책이라는 이카루스의 위대한 날개를 달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길 응원한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너의 이름은 "젊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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