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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an 18. 2021

신의 길은 곡선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50  테세우스와 출생의 비밀

  이미 아홉 시가 넘었고, 퇴근길에 장을 본 엄마의 양 손엔 시금치며 두부며 고기 팩으로 꽉 찬 시장바구니가 들려 있었어. 현관 벨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네.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팔에 끼고 백 속 열쇠를 찾아 겨우 문을 열었단다. 집 안에 인기척이라곤 없이 컴컴했어. 그 적요한 분위기에 피곤한 기운이 싹 가신 엄마는 왠지 등이 서늘해지더라. 서둘러 바구니를 내려놓고 거실 등을 켜는데...


  "엄마, 불 켜지 마세요." 하는 거야.


  "누가(느루 오빠)니?"

  "네... 엄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순간, 엄만 더듬더듬거렸단다. 이게 뭐지?


  "뭐... 뭔데?"

  "저,... 출생의 비밀을 알았어요."


  이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뭐? 뭐라고???"

  "저,... 그동안 제가 A형인 줄 알았는데 B형이드라구요."


  아이구 이눔아, 무~슨!!!

  등짝 스매싱 "쫘~아~악"


  거실 등도 덩달아 쫘아악 켜졌단다. 느루야, 누가 오빠가 중 1 때 했던 헛소리야. 덕분에 A형 둘, B형 둘인 줄 알았는데 엄마 빼곤 모두 B형인 걸 알았지. 어쨌거나 능청스러운 네 오빠는 재연배우를 해도 되겠더라. 귀에 이어폰 끼고, 궁둥이를 흔들며 설거지하는 누가를 보니 '출생의 비밀' 운운하며 장난기 가득했던 너희들의 십 대와 '출생의 비밀'을 알고 모험에 가득 찬 삶을 살았던 그리스의 영웅이 생각나네. 오빠가 설거지하는 동안 재미난 신화 들려줄게.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니콜라 푸생 <아버지의 검을 찾는 테세우스, 1638>


  니콜라 푸생의 <아버지의 검을 찾는 테세우스, 1638>이야. 느루야,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는 건장한 남자가 있지? 테세우스란다. 테세우스 신화는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가 아들을 얻기 위해 델포이 신전을 찾는 걸로 시작해.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는 "아테네로 돌아가기 전까지 절대로 포도주 자루를 풀지 말라."는 신탁을 내린단다.


  현대의 뛰어난 건축가 가우디가 "인간의 길은 직선이고 신의 길은 곡선"이라고 했지.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이었나 봐. 아이게우스는 곧바로 아테네로 돌아가지 않았어. 지혜로운 왕 피테우스가 있는 트로이젠으로 가서 신탁에 대한 해석을 물었단다. 피테우스는 대답 대신 최고급 포도주로 융숭한 대접을 했어. 그리고 그날 밤, 술에 취한 아이게우스 옆에 자신의 딸 아이트라를 뉘이며 설득하지.

  "아이게우스는 영웅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이 후일 왕이 될 거라는 신탁이란다."


  뒷날 잠이 깬 아이게우스는 깜짝 놀랐구나. 옆에 아리따운 공주가 누워 있었으니까. 아이게우스는 아이트라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떠났어.

  "만약에 아들이 태어나면 잘 길러 주시오. 그리고 아이가 자라 이 바위를 들게 되면 내 칼과 가죽신을 가지고 아테네로 나를 찾아오게 해 주시오."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라는 여인과 결혼한 몸이어서 아이트라와 또 결혼할 수 없었어.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고구려 신화 중 주몽이 부여 왕자들을 피해 도망가면서 임신한 아내 예 씨 부인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지?

  "일곱 모 난 주춧돌 아래 징표를 두었으니 아이가 성장하거든 징표를 들고 날 찾게 하시오."

  고주몽 신화에서도 징표는 부러진 칼이었어. 그나저나 아버지란 사람들은 왜 다들 아이를 두고 떠나는 거야!


안토니오 카노바 <켄타우루스를 죽이는 테세우스, 1819>


  모든 신화가 그렇듯 아이트라는 씩씩한 아들을 낳았어. 이름을 "테세우스"라고 지었지. "묻혀있는 보물"이라는 뜻이야. 테세우스가 열여섯 살이 되자 아이트라는 바위를 옮겨 보라고 해. 이미 열네 살 때 황소를 담장 너머로 던져버렸던 테세우스는 거뜬히 바위를 옮기고 어머니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듣는단다.

  "이 칼과 가죽신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가거라."


  테세우스는 안전한 바닷길로 가라는 어머니의 충고를 무시하고 험한 육로를 통해 아테네로 출발해. 왜 빠르고 안전한 바닷길을 택하지 않았느냐고?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영웅인 데다 너희들처럼 모험심 가득한 십 대였으니까. 그는 아테네로 가는 동안 여섯 명의 악당들을 물리치며 힘과 지혜를 가진 영웅임을 드러내지.


  테세우스는 지나가는 사람을 쇠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페리페테스를 만나자 그 곤봉을 빼앗아 페리페테스를 쓰러뜨리고 쇠망치를 몸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해. 소나무 두 그루 사이에 사람을 매달고 구부려 놓은 줄을 끊어 사람을 찢어 죽이는 시니스를 같은 방법으로 죽이기도 하고, 크롬미온의 암퇘지 파이아를 없애기도 해. 행인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려 식인 거북의 먹이로 삼는 스키론을 낭떠러지에 밀어버리기도 하고, 케르키온과 레슬링을 해 이기는 장쾌한 모험이 가득한 여정이었어. 또 키가 작은 사람은 긴 침대에 눕혀 늘려 죽이고 키가 큰 사람은 짧은 침대에 눕혀 잘라 죽이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침대에 눕혀 잘라 죽여버리지.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는 현대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심리학 용어로 쓰여.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남을 바꾸려고 하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심리를 뜻하는 말이야.


프레데릭 샌디스 <메데이아, 1866~1868>


  테세우스는 드디어 아테네에 도착했어. 아이게우스의 아내였던 메데이아는 테세우스의 등장으로 자신과 자신의 아들 메도스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했단다. 왜냐면 아이게우스를 만나기 전, 메데이아는 사랑했던 남편 이아손의 배신으로 아들 둘을 죽인 아픈 상처가 있었거든. 그녀는 테세우스를 죽이려 술에 독을 탔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게우스가 테세우스에게 독배를 건네는 순간, 테세우스의 칼과 가죽신을 보게 되었지.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구나 둘은 얼싸안았어.


  테세우스의 칼과 가죽신처럼 느루와 누가에게도 우리만의 지물(持物)이 있을까? 무슨 구닥다리 같은 소리냐고,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된다고? 그래, 그래. 엄마야말로 목사님 염불 외는, 얼탱이 없는 소릴하고 있구나. 너희를 어버리거나 두고 떠난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상상도 싫다.


  아마 너희들이 네 살, 여섯 살 즈음이었을 거야. 항상 퇴근길에 어린이집에 들러 너희를 데리고 오는 아빠 눈이 그날따라 벌건 거야. 시간도 여느 날보다 늦은 아홉 시 반쯤이었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 퇴근이 늦어 헐레벌떡 어린이집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느루와 누가가 바로 문 앞에 오도카니 앉아 문만 바라보고 있더라는 거야. 아이들은 한 명씩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데 언제 아빠가 오실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을 너희를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지더라고. 맞벌이를 하느라 매일매일이 허겁지겁이었는데도 그날 이후로 아빠는 절대 아홉 시를 넘기지 않았지. 그리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새긴 은목걸이를 걸어 주었단다.


필리포 엘라지오 팔라지 <테세우스가 미궁을 빠져나가도록 실을 주는 아리아드네, 1814>


  아버지를 만난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어려움을 듣게 돼. 매년 크레타에 남자 일곱과 여자 일곱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어. 크레타 미노스 왕의 아들이자,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괴물인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보내는 것이었지. 용감한 테세우스는 아버지 아이게우스에게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면 흰 돛을 걸고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자신이 제물이 되어 크레타로 떠나.


  테세우스가 탄 배가 크레타에 도착했어. 그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공주 아리아드네는 그가 흘리는 실수를 담기로 결심했구나.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크노소스 미궁은 그리스 최고의 장인 다이달로스가 설계했단다. 한번 들어가면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견고했지. 지혜로운 아리아드네는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을 빠져나올 방법을 구해. 영화 <인셉션>에서 꿈의 공간을 설계하는 설계자의 이름이 '아리아드네'였던 것 기억하니? 현대까지도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


  위 그림은 필리포 펠라지오 팔라지의 <테세우스가 미궁을 빠져나가도록 실을 주는 아리아드네, 1814>야.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네준단다. 미로 입구에 실 한쪽 끝을 묶고 미노타우로스를 찾으라고 말이야. 그 실을 되감아 나오면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알려주지. 아리아드네의 지혜로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테세우스는 무사히 미궁을 탈출해. 이 사실을 안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루스를 크노소스의 미궁에 가둬버려. 우리가 아는 이카루스의 밀랍으로 만든 날개는 이 미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발명한 인류 최초의 날개란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테세우스>의 도자기와  테피스트리


  핸드폰이 있었다면 모를까, 통신 수단이라고는 도보밖에 없었을 시기, 겨우 만난 아들을 사지(死地)로 보낸 아이게우스 왕은 얼마나 속이 탔겠니. 매일 바닷가에서 흰 돛을 단 배가 오기만을 기다렸지. 하지만 어느 날 바닷가 절벽 위에 배의 검은 돛이 보이기 시작했어.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절망에 빠진 아이게우스는 바다로 몸을 던지고 말았구나. 지금의 '에게 해'란 지명은 '아이게우스의 바다'란 뜻이야.


  테세우스는 그만 아버지와의 약속을 잊고 있었어.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사람들을 구하게 된 흥분 때문이었을 거야. 아테네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죽음이 테세우스를 기다렸지. 장례를 마친 그는 드디어 아테네의 왕이 된단다. 아이게우스의 죽음은 신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고, 아테네로 돌아가기 전까진 절대로 포도주 자루를 풀지 말라는 신탁의 완성이었어. 신의 길은 곡선이었지.


  아, 아리아드네는 어떻게 됐냐고?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던 도중, 잠깐 닉소스섬에 머물렀어. 물을 구하려고 말이야. 그런데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아리아드네를 두고 가라고 한단다. 테세우스는 아마 아리아드네 때문에 돛을 바꿀 생각을 더더욱 하지 못했을 거야. 그는 신의 명령에 따라 아리아드네를 섬에 남겨두고 떠났어.


안젤리카 카우프만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1794>


  그렇지만 눈을 뜬 아리아드네는 정말 당황하지 않았겠니? 사랑하는 테세우스는 저 멀리 바다 한가운데 점처럼 보이는 배를 타고 떠나버렸으니까. 그녀의 눈물이 소리 없이 옷을 적셨어. 그때, 귀엽고 명랑한 날개 달린 꼬마가 포도덩굴로 머리에 화관을 쓴 남자의 손을 잡고 오는 거야. 그는 술과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였지. 디오니소스는 그녀에게 왕관을 선물하며 구혼하지.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의 아내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 그녀가 죽자 그녀가 쓰고 있던 왕관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단다. 왕관 자리야.

  

   오빠가 설거지 다 끝냈다는구나.

  "누가야, 너네가 좋아하는 그림은 어떤 거야? 엄마가 그림 소개해 줄게."

  "우리 가요? 당연히 예쁜 여자 그림이죠. 생각할 것도 없어요."


  "으이그~~ 이눔아, 무슨!!!"

  등짝 스매싱 '쫘~아~악"  




<추신> 첼리스트 스테판 하우저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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