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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Mar 15. 2021

너의 청춘을 유혹해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56  존 싱어 사전트

  할머닌 퇴원했단다. 어제는 목욕시켜 드리러 갔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늦어졌어. 서울을 오가는 건 너무 힘들어. 몹시 피곤해서 네가 무슨 옷차림이 좋은지 물었던 것 같은데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했어. 깜박 잠들고 일어나니 새벽 네시네. 미안하구나.


  느루야, 오늘 친구 만나러 가려고 물었던 거지? 대학교 때 단짝이던, 귀엽고 애교 많던 그 애? 좋겠다. 오래간만에 친구 만나 수다도 떨고 별미도 먹고 봄비 내리는 고궁 길도 걷고 말이야. 너야 물 오르는 청춘인데 무얼 입은들 예쁘지 않을까? 흰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벙긋 꽃 피우는 목련보다 화사할 거야. 뭐? 그건 너무 무심한 대답이라고? 그래, 그래. 뭘 입으면 느루에게 더 어울릴지 궁리해 볼게.


  느루를 더욱 아름답게 보일 옷을 생각하다 보니 엄만 이 여인이 떠오른다. 팜므파탈의 대표적 이미지였고 취조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리를 꼬던 모습으로 젊은 청춘들의 밤을 앗아간 여인, 샤론 스톤! 섹시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기는 단연코 지적이었어. 상대의 본능을 도발하는 눈동자, 스릴러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던 영리한 입술, 포물선을 그리며 담배 불을 붙이던 우아한 손동작, 그보다 더 관능적으로 상대의 무의식을 향해 걷던 길고 매끈한 다리. 그녀의 유혹은 절대 거절할 수 없지.

 


  아마도 그 장면에서 입었던 희고 짧은 원피스도 한몫했던 것 같아. 느루야, 그 장면에서 이런 옷은 어땠을까?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존 싱어 사전트 <마담 X, 1884>


  육체가 담고 있는 한 편의 시(詩)를 세련되게 번안해 캔버스로 옮기는 전문 번역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의 작품, <마담 X, 1884>란다. 2m가 넘는 전신상이지. 연보랏빛이 감돌 정도로 투명하고 흰 피부, 날렵하고 고아한 콧날, 우수에 찬 눈썹, 한 마리 백조를 연상시키는 가녀린 목, 고혹적인 그녀의 얼굴에 안개가 내린 듯 신비스러워. 마치 스프레이로 곱고 낭만적인 가을을 뿌린 듯 하구나.


  그녀가 입은 검은 드레스는 잘록한 허리와 매끄러운 몸의 곡선을 더욱 부각해. 원본에는 오른쪽 어깨 끈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있었다지. 지금보다 훨씬 더 그윽했을 거야. 사전트는 긴 시간 포즈를 취하느라 금속 체인으로 연결된 드레스의 어깨 끈이 살짝 흘러내린 매혹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았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보다 보일 듯 말 듯한 시스루 패션이 더 아찔하듯, 흘러내린 어깨끈은 고전적인 우아함과 비밀스러운 섹시함 사이에 파열과 긴장을 일으켰겠지.


  살롱에 전시된 초상화를 보고 소수는 "1884년 당대 상류층의 문화를 대변한다."라고 칭송했고 다수는 "금지된 욕망을 품고 있는 퇴폐적인 그림"이라고 비난했단다. 천박하다느니, 외설적이라느니 하는 혹평으로 인해 전시회 기간 내도록 추문에 휩싸였다는구나. 모델에 응했던 고트로 부인조차 걷잡을 수 없는 사교계의 비난에 그림을 사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결국 사전트는 흘러내린 어깨끈을 어깨에 고정시켰어.  


  엄만 무엇에든 직선적이고 각진 걸 싫어하는 성향이라 윤리적, 도덕적 의미에서 보면 분명하고 단정하지 못한, 조금은 퇴폐적인 사람이지. 하지만 아폴론적인 요소만으로 사회가 움직여 간다면 얼마나 건조하고 삭막하겠니. 두꺼운 대리석에 둘러싸여 하루하루 말라가는 기분일 거야. 유연성이 없는 시대는 위대한 예술을 낳지 못해. 살짝 구부러지는 파격이 있을 때, 난초는 군자의 친구가 되니까.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우리 사회는 인간의 원시적 생명력을 아름답게 폭발시키는 디오니소스적인 열정과 쾌락이 필요해. 엄만 흘러내린 그녀의 어깨끈이 보고 싶구나.



   아, 그나저나 옷차림을 물었던 느루야, 넌 이 옷은 어떠니? 매력적이지 않니? 아니 아니, 너더러 이렇게 차리고 나가라는 말은 아니고 고트로 부인의 아름다움을 가장 돋보여준 차림이 아니냐고 묻는 거야. 사전트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특히 우아한 품격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자세와 구도, 옷차림을 탁월하게 포착했어. 주문자들은 사전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놀라고 경탄했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거든. 심리적인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는 그의 시력이 남과 달랐던 것일까?


  이 그림의 주인공은 당시 파리 사교계의 꽃, '아멜리 고트로'라고 해. 프랑스계 미국인이었고 나이 많은 프랑스 은행가와 결혼했지. 미국 출신이었지만 프랑스로 건너온 그녀는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으로 파리 사교계의 빛나는 별이 되었단다. 그녀의 머리에 쓴 초승달 모양의 티아라처럼 그녀는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같이 도도하고 활력이 넘쳤지. 한동안 '파리'라는 우주의 행성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운행했단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끝내 이 작품을 사지 않았고 작품의 이름도 <마담 X>가 되었어. 혹평과 조롱으로 만신창이가 된 사전트는 벗이 있던 영국으로 떠나.


  그가 프랑스 화단과 부딪쳤듯, 전통은 힘이 세지. 르네상스 이후로 이어진 회화의 규칙은 완고했고 새로운 화풍을 포용하기에는 너무 오만했구나. 하지만 근세와 근대가 부딪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창조적인 소수의 다양한 실험이 생겨났단다. 아르누보(Art Nouveau, 새로운 예술)를 대표하는 알폰소 무하의 섬세한 꽃무늬가 거리를 장식하는가 하면,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가 아카데미 살롱에 전시되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지. 포르노가 아니라면 여성의 체모는 그리지  않는다는 회화사의 전통을 깨고 구스타브 쿠르베는 적나라한 신체 묘사를 통해 사실주의를 열었어. 그가 활동한, 찬란하고 화려한 문화가 꽃피웠던 벨 에포크 시대는 시대와 시대가, 개성과 개성이 충돌을 일으킨 문화의 빅뱅이었어.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86>


  아~ 보자마자 눈이 반달이 되고 입꼬리가 올라가지? 혹평으로 인한 상처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떠났던 사전트는 해가 지기 전 짧은 순간, 풀내음과 꽃향기가 진동하는 정원에서 사랑스러운 두 소녀가 중국식 등을 켜고 있는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86>라는 작품으로 재기에 성공한단다. 그의 깊이 있고 색다른 시력이 진부한 전통을 이긴 것이겠지.


  목에 주름진 프릴이 있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은 그의 친구 프레드릭 버나드의 딸들이야. 동그란 등에 불을 켜는 왼쪽 소녀는 돌리, 길쭉한 등에 불을 켜는 오른쪽 소녀는 폴리 야. 소녀들의 보드라운 머리카락 위로 마치 백합으로 만든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아. 꽃과 등이 뒤엉켜 환상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지. 도도하고 매혹적인 고트로 부인의 어린 시절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꽃등을 밝히는 돌리의 목덜미는 꼴깍 기우는 해조차도 멈추게 할 만큼 사랑스러워. 느루에게도 저렇듯 순백의 희고 작은 프릴이 달린 옷을 사주고 싶구나. 그 옷을 입고 느루가 좋아하는 목련 곁에서 오래지 않을 '아가씨'로서, '청춘'으로서의 애틋한 순간을 남기고 싶구나.


  사전트는 해가 지는 그 짧은 순간 퍼지는 오묘한 빛의 원소를 담으려고 이태 동안에 걸쳐 그렸다고 해. 프랑스에서는 황혼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지. 해가 질 때  생기는 붉은빛과 밤의 검은빛이 겹쳐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되지 않는 시간이라고 말이야. 마치 청춘이라는 시기가 유년도 청년도 아닌, 구분되지 않는 인생의 시기인 것처럼. "청춘이란 물리적 시간을 떠나 성장의 시기 때 찾아오는 어떤 순간"인 것 같아. 늑대처럼 혼란스럽고 위험하며 두렵고 자극적이지만 개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때 반드시 도달해야 할 종족의 기원(起原)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다들 지나왔다고 착각하지만 때로 누군가에게는 평생 그 순간이 오지 않기도 하지. 느루야,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청춘'을 모두 겪는 건 아니란다.


존 싱어 사전트 <낚시하는 소녀, 1913>


  엄마가 사랑하는 <낚시하는 소녀, 1913>도 보여줄게. 작품명은 소녀이지만 엄마는 숙녀라고 하고 싶구나. 홀로 낚시를 하러 나온 뒷모습은 그녀가 이제 스스로 세상을 낚아 올리겠다는 독립선언으로 보여. 하지만 오랜 전통과 관습이 아직 그녀의 긴치마와 어설픈 자세에 매달려 왔나 봐. 그물망의 수평을 맞춰 고기를 낚으려는 모습 치고는 능숙하지 않고 그물망이 비어있는 것을 보아 숙녀는 이제 막 어설픈 낚시를 시작하려는 것 같아. 낚싯대를 쥔 가는 손을 응원하고 싶구나.


  바다는 얕은 바닥의 자갈이 비칠 정도로 맑고 파래. 시선을 위로 들면 그녀가 부르는 청춘의 음표처럼 구불대고 넘실거리는 파도의 실타래가 보여. 파도는 자신의 그림자를 어르며 오리 떼를 간질이네. 느루야, 이 작품에서 인상주의 화풍이 느껴지지 않니? 인상주의 특유의 단순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빛의 순간을 포착하는 굵고 거친 붓질이 보이지. 파도의 표면에 반사하는 빛의 어른거림이 모네의 작품을 보는 것 같지 않아? 실제로 그는 모네와 사귀며 인상주의 화법을 배우기도 하고 벗으로서 우정을 나누기도 했단다.   


  사전트는 당시 윈슬로 호머(1836~1910)와 토마스 이킨스(1844~1916)과 더불어 빅 3의 풍경화가였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10인의 미국 인상주의 화가이기도 해.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난 기법과 색채 등을 사용했지. 당시로서는 도전이었고 모험이었어. 바람에 쓸려 춤추는 머플러나 외진 곳의 비밀스러운 삶이나 고적한 자연의 풍광을 시력이 닿는 만큼 소박하게 풀어놓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고르고 평등하게 묘사했지.  


  미국인이었던 그는 외과 의사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어. 19세기 말, 신대륙으로 이주한 외가가 워낙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탓에 평생 유복하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 그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하다 런던으로 이주했으니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모두에 능통했어. 게다가 탄탄한 경제력은 어려서부터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풍부한 경험과 중상류층의 교양과 문화를 익힐 수 있게 한 디딤돌이 되었어. 언어는 노력보다 환경이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 느루가 살짝 속상하겠는걸?


존 싱어 사전트 <아이작 뉴턴 펠프스 스톡스 부부의 초상, 1897>


  그는 언어뿐만 아니라 회화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어. 상류층 인사들의 앞다툰 주문으로 그의 초상화는 절대적 명성을 얻는단다. 흔히 깊이가 있으려면 상대방과의 공감 능력과 인생의 찬바람을 맞아보아야 한다고 해. 하지만 그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성장했어. 그런데도 그의 초상화는 내면의 정체성과 개성을 원숙하게 드러낸다는 평을 받아. 심리적인 초상화를 그린다고도 하지. 습기 머금은 바람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풍경화,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초상화는 어떻게 그릴 수 있는 걸까?


  이 초상화는 1895년 결혼한 뉴욕의 사업자 아이작 뉴턴 펠프스 스톡스의 지인이 부부에게 결혼선물로 주고 싶어 의뢰해 사전트가 그린 작품이야. 특이하게도 아내였던 에디스 스톡스를 중심에 세웠지. 아내 에디스의 총기 있는 눈과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렴. 기품 있지 않니? 거기엔 이유가 있단다. 전통적인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 기법이 있어. 혈통 좋은 개의 머리에 한 손을 얹고 다른 한쪽 어깨를 약간 앞으로 내세우지. 그런 다음 내민 어깨 쪽 손을 골반쯤에 걸치고 정면을 바라보는 거야. 이런 손의 포즈를 '르네상스 팔꿈치'라고 해.


  사전트는 르네상스 팔꿈치에 해당하는 에디스의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웠어. 그리고 개를 모자로 대신했지. 물론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남편 펠프스가 뒤에서 마치 개의 상징처럼 충성스럽게 그녀를 지켜주는 후광도 놓치지 않았어. 복장을 보렴. 남자의 전통적 복장인 프록코트가 아닌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활동적인 라운지 슈트(당시 노동계급의 정장이었던)를 입었고 여자의 복장도 매우 유사해. 아직 여자의 인권이 사회적 보장을 받기 전, 두 젊은 부부가 나타내는 평등, 근대의 활력과 산업이 가져다주는 부(富), 미래에 대한 낙관 등이 초상화 전체를 감싸고 있어.


  느루야, 사전트의 뛰어남을 알겠지. 물론 둘 다 어마어마한 신분을 가졌단다. 펠프스는 사회주택 분야의 개척자였고 에디스는 선박회사의 딸이었다니 초상화에서 내뿜는 자신감의 근원 또한 무시할 수 없지. 하지만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왠지 위안이 되는구나. 총명한 여인의 모습 같아서 말이야. 느루에게 저런 복장은 어떨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 느루는 키도 크고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눈과 창조적인 머리를 갖고 있지. 엄마보다 훨씬 뛰어난 글을 쓸 거라는 예감이야. 네가 쓰려고만 한다면.


  느루야, 이 느낌은 어떠니?


존 싱어 사전트 <엘 할레오, 1882>


  살롱 출품작 <엘 할레오, 1882>란다. 열정적인 무희의 춤을 리듬 있게 연주하는 뮤지션들의 모습 같지. 스냅사진처럼 절정의 순간을 잡아낸 화가의 감각이 돋보여. 이 그림은 348*232cm니까 벽면을 꽉 채우는 대작이야. 작품 앞에 서면 무희의 손동작에 맞춰 발 굴리고 손뼉을 치고 싶을 거야. 소리 지르고 휘파람도 불고 싶을 거야. 오른쪽을 봐. 캐스터네츠를 든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팔이 앉아 있는 관객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외치잖아.


  축구 결승전을 보듯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 앞에서 뒤로 어둠을 밀어내는 밝은 조명이구나. 서전트는 무희의 손이 잡고 있는 시리도록 하얀 드레스와 열정에 사로잡힌 상체의 검은색을 대조시켜 더욱 극적인 공간을 연출했어. 욕망이 터져 나오는 출구처럼 말이야. 어두운 그림자와 눈부신 조명의 극한 대조를 통해, 사선의 구도를 통해 무희를 앞으로 튕겨나가게 만든 거지.


  느루는 어릴 때부터 재즈댄스를 오래 했지. 춤추는 걸 좋아했고 한동안은 무희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 느루야, 오늘은 최대한 화사하고 가벼운 복장으로 나가렴. 여름이었다면 탑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가라고 했을 거야. 붉은 립스틱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이 지루하고 회색인 도시를 가로질러 환희에 가득 찬 청춘의 땅으로 가라고 했을 거야. 그림 속 의자 위의 오렌지처럼 선명한 생명의 에너지를 전하고 오라고 했을 거야.


  이제 기타의 세련된 연주와 캐스터네츠의 따닥따닥하는 소리가 들리지? 그녀와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 느루야,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사제와 경찰관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디오니소스의 축제 현장으로 달려 나가려는 또 다른 너, 춤추는 너를 깨울래? 복장은 중요치 않아. 무얼 입어도 예쁘단다.


  청춘을 유혹해! 네 친구와 함께, 우울에 빠져 있는 고독한 이들과 함께, 삶에 지치고 흥미를 잃은 모두와 함께.


*유튜브 <헤더의 터닝페이지>라는 곳에 오래된 영화 <원초적 본능>이 있네요. 시간 나실 때, 감상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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