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새 천년을 장림 32평 아파트에서

나의 70대의 절반

by 남쪽열매

< 장림 32평 아파트에서 70대의 문을 열다. >

2000년 어느 날, 방송국 기자인 막내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회사에 광고가 들어온 신축 아파트가 있는데 장림에 미분양이 좀 났대요. 남은 전세 매물 중에 3층 32평이 하나 있는데 조건이 아주 좋아요. 축대 옆이라 일조량은 조금 짧지만, 방이 세 칸이라 형이 결혼해도 같이 살 수 있고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데다 5년 계약이래요. 같이 한번 가보실래요?”


안 그래도 조 씨와의 전세 계약이 4년이 다 되어가고, 땅주인 할매로부터 보상금 500만 원도 받게 되어 이사 갈 집을 찾던 중이었다. 우리 부부는 막내아들과 함께 그 집을 보러 나섰다.

버스에서 내려 큰길을 따라 조금 걷자 아파트로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가파른 경사길을 5분 정도 올라가야 했고, 3층인 그 집은 축대 옆이라 해가 짧고 공기가 썩 맑지 않은 점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대형마트인 까르푸가 있어 생활이 편리해 보였고, 무엇보다 가까이에 교회도 있어서 새벽기도를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새집답게 넓고 깨끗한 내부는 손댈 곳 하나 없이 말끔했다.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참 편안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우리 가족을 위해 예비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아이의 적극적인 찬성 속에, 그렇게 장림이라는 낯선 동네에서 큰아들과 함께하는 5년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0년, 내 나이 일흔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 남편의 한결같은 출근길, 나의 도시락 >

남편은 10년째 여전히 아파트 경비대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에 이웃 교회에 새벽기도를 갔다. 돌아온 6시엔 새로 밥을 짓고 나물을 무쳐 남편의 도시락을 쌌다. 치아가 좋지 않아 부드러운 나물과 생선, 계란과 감자를 으깨어 마요네즈에 버무린 사라다, 그리고 촉촉하게 구운 불고기등 정성을 다했다. 뼈에 좋은 멸치조림도 물을 조금 넣어 부드럽게 만들어 늘 넣었다.


남편은 7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지금 나가면 내일 아침에 교대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나이가 벌써 75세라 경비실에서 선잠을 자는 것이 힘들 텐데, 그런 내색 한번 하지 않는 그는 정말 책임감과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창문을 열고 경삿길을 내려가는 남편을 보고 서있는다. 그러면 남편은 어김없이 뒤를 돌아보며 나를 찾았고 나와 눈이 마주치면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참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다. 나는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그를 맡기는 기도를 한다.

“하나님, 남편이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무사히 일을 잘 보고 돌아오도록 함께 해 주세요!”


그는 직장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잘 따랐고 나이 든 분들도 남편에게 의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문이나 영어로 된 편지나 글을 가져와 읽어달라는 노인도 있었고, 어떤 이는 주차를 남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 중에는 유치원이나 학교에 다녀와 남편에게 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속삭이며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는 서울에 사는 손녀들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날은 유난히 손녀들이 보고 싶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그리움은 어느새 나에게도 스며들었고, 나는 어김없이 서울에 전화를 걸어 손녀들의 안부를 확인했다.


< 나와 딸의 간절한 기도, 장남이 드디어 제 짝을 찾았다. >

남편의 이른 출근을 배웅하고 나면, 이번엔 장남이 아침밥을 먹고 일터로 향했다. 당시 아들은 대형 란제리 도매상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근무하던 경리 담당 여직원에게 가정적으로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우리 집 빈방에서 두 달간 머물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두 달이 일 년이 되었고,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직장으로 옮긴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우리 부부 앞에 마주 앉아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평소 총명하고 싹싹하고 고운 모습에 내심 며느리 삼고 싶다 생각했던 터라, 서로를 깊이 아끼는 모습이 그저 대견하고 기뻤다.


두 사람 모두 한 번씩 삶의 부침을 겪었던 터라, 우리 부부는 그저 앞날에 행복만 가득하기를 빌어주었다. 고3수험생인 서울 첫 손녀까지 온 가족이 모여 두 사람의 새 출발을 축복하던 날, 오빠의 행복을 위해 늘 기도했던 딸아이와 나의 간절한 기도가 비로소 응답받았음을 느꼈다.


< 세 번의 사양, 직분보다 귀했던 남편의 신앙 >

장림으로 이사한 후에도 우리 부부의 발걸음은 여전히 대신동 모교회로 향했다. 괴정 쌔리골에서 보낸 27년 세월이 그러했듯, 형편이 어렵고 삶이 고단할수록 우리 삶의 중심은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을 향했다.

특히 내게 새벽기도는 하루를 여는 빛과 같았다. 한복 기술자로 일하며 시작한 이 기도는 남편이 지방 출장 중일 때를 제외하곤 늘 함께였다. 쌔리골 시절, 남편은 신경통으로 다리가 마비되었던 때를 빼고는 그 먼 대티터널을 걸어 대신동까지 새벽 예배를 다녔다.


교회에서는 남편에게 여러 차례 장로 장립을 권유했다. 보수동 시절부터 목사님은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는 남편이 장로로 봉사해 주길 바라셨지만, 남편은 세 번이나 이를 겸허히 사양했다.

"지방 출장이 잦아 새벽기도에 매일 동참할 수 없는데, 어떻게 교인들의 모범이 되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남들은 서로 하고 싶어 하는 직분인데 왜 자꾸 사양하느냐는 나의 물음에 남편은 담담히 답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장로라는 직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오.”


사업 부도로 쌔리골로 이사했을 때도 권유는 이어졌으나, 남편은 "빚쟁이 신분으로 장로가 되는 것은 교우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런 남편의 뿌리 깊은 신앙을 신뢰하며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직분은 없었지만 남편은 이미 장로 그 이상으로 헌신했다. 교회의 중요한 일에 늘 그가 함께했고, 수 천명이나 되는 어린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 14년간 교통봉사부장으로 봉사했다.

60명의 부원들과 교회 앞 큰길에서부터 그 주변 길목마다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켰다. 토요일에는 부원들을 모아 교육을 시켰고, 주일에는 새벽기도 마치고 또 모여 교육시켰으며 집에 와서 아침식사를 한 후 주일학생 예배시간에 맞춰 다시 교회에 나가 교통지도를 했다.


나는 구역장으로서 형제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는 데 마음을 쏟았다. 이젠 형편이 여유가 없어 물질로 도울 순 없었지만, 늘 기도로 심방하며 그들의 가정을 하나님께 맡겼다.

우리 아이들 역시 중학생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믿음 안에서 자랐다. 큰아들은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전도해 올 정도로 열심이었다.


돈이 없으면 걸어 다녔고, 옷은 깨끗이 빨아 단정하게 입히며, 오직 아이들 공부와 건강한 먹거리만 생각하며 살았던 그 시절에도 우리의 신앙만큼은 한결같이 풍요로웠다.


어느덧 남편의 나이 일흔다섯. 현역으로 일하며 장림에서 대신동까지 오가는 길이 점차 힘에 부쳤다. 어느 주일, 새벽기도를 다니던 집 근처 교회에 등록하려고 사진도 찍고 이름도 남겼으나, 집에 돌아온 남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결국 발길을 돌렸다.

“여보, 아무래도 원래 다니던 곳으로 갑시다.”

그 한마디에 우리는 다시 대신동으로 향했다.


1991년, 남편이 경비 일을 시작하며, 혼자 걷기 위험해진 터널 길 대신, 주방 한쪽에서 홀로 드려야 했던 나의 새벽 제단은, 장림으로 이사와 가까운 교회를 만나 비로소 다시 활짝 열리게 되었다. 몸은 고단해도 마음만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했던, 우리 부부의 70대였다.


< 서울을 향한 나의 마음, 기도로 키운 딸과 손녀들>

나의 하나뿐인 딸은 대학 졸업 후 수학교사로 발령받아 3년 뒤 결혼했다. 그 후 5년 동안 우리 집에서 주말부부로 지내며 두 손녀를 낳았다. 사위가 있는 대전으로 전출을 간 뒤에는 거기서 막내 손녀를 얻었다.

육아 휴직을 하고 아이 키우느라 시댁 식구들과 부대끼며 고된 시집살이를 견뎠고, 복직 1년 후 뜻밖에 사위가 서울 본사로 발령받으며 딸도 서울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두 번의 지역 이동이 순조로웠던 건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었다.


1993년 여름방학이 되자, 발령을 기다리던 딸은 세 손녀를 내게 맡기고 보충 수업을 마친 뒤에야 서울로 향했다. 학교발령이 나고 학교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 전세계약을 했다는데 한 달 후에야 입주가 가능하다고 했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낯선 곳에서 혼자 출퇴근하며 지내는 딸이 안쓰러웠지만 한 달 동안 머물 방을 내어준 딸의 외삼촌댁이 나는 너무 고마웠다.

그때, 딸이 전화로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 어머니, 출근길이 멀어도 동네가 참 예뻐요. '세 아이와 차도 없이 살려면 나들이도 어려울 텐데, 동네가 아름다우면 좋겠다'고 기도 했는데, 아파트 주변에 나무가 많아 단풍 든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요! 하나님이 정해둔 우리 집인 것 같아요!”


딸은 서울로의 이사를 마친 뒤, 부산에서 지내던 초등학생 첫째와 유치원생 둘째를 먼저 데려갔고, 나는 세 살배기 막내를 한 달 더 데리고 있다가 추석 즈음 서울로 데려다주었다. 올케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간 딸의 집은 딸의 말대로 아름다운 동네에 있었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파도, 식탁도, 침대도, 심지어 커튼 하나 없이 휑한 20평 아파트였다.

"어머니, 살면서 하나씩 장만하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씩씩하게 웃으며 정성껏 밥을 차려내는 딸을 보며 나는 먹먹한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하나님, 서울로 이끄신 분도 당신이시니 이 가정을 온전히 맡깁니다. “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딸은 교사라는 사명감을 안고 직장과 육아, 가사를 홀로 감당해야 했다. 모아둔 돈도 없이 융자를 얻어 전셋집을 마련한 터라 도우미를 쓸 형편도 되지 않았다. 세 아이를 돌봐야 하는 딸은 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걸어서 출퇴근을 했고, 사위는 차 살 여유가 없어 지하철로 왕복 두 시간이 넘는 삼성동까지 오갔다.


내게 세 손녀는 모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보물들이다. 아들딸 차별 없이 키웠듯이 손주들에게도 그랬다.

첫째는 해산 후 육아휴직이 끝난 7개월부터 내가 맡아 키웠고, 둘째는 출산과 2개월의 산후조리에서 딸의 복직 후 아이의 양육까지 내 손을 거쳤다. 막내 때는 출산 후 대전에 올라가 아이들을 데려와 두 달간 정성껏 산후조리하고 세 아이를 돌본 후 돌려보냈다.

그러니 나는 비록 몸은 부산에 있어도 내 마음은 늘 서울을 향해 있었다.


특히 서울로 올라간 다음 해인 1994년부터는 김장을 내가 해서 부쳐주었다. 내가 맛있게 담근 김치를 비닐에 넣어 꽁꽁 묶고, 아이스박스에 담은 후 테이프로 단단히 두른 소포를 남편이나 큰아들이 우체국에 가져가서 서울로 부쳤다. 집에 와서 가져가는 택배가 없던 시절이었다.


봄에는 아파트 뒷산에서 쑥을 캐어 그냥 보내거나, 데쳐서 냉동시킨 후 또는 쑥털털이나 쑥백설기등의 쑥떡을 만들어 보냈다. 남편이 좋아하는 쑥털털이를 손녀들도 참 좋아했다.

장림으로 이사 가서 몇 년 지난 후, 아파트 주변 언덕에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는 고추나, 가지, 호박등도 보내주었다.


딸과 손녀들은 부산을 떠난 후 명절에는 부산에 오지 못했다. 딸이 맏며느리라 명절 내내 시댁에서 손님을 맞아야 했다. 그 대신 방학 때마다 부산에 와서 놀다가 갔다. 쌔리골 좁은 집에서도 장림의 넓은 집에서도 늘 편안한 마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따르는 아이들이었다.


어버이날에는 꼭 우리에게 줄 카네이션도 따로 만들어 가져오는 사랑이 깊은 아이들이었다. 또, 저희들이 다녀가고 나면 우리가 쓸쓸하다고 집안 여기저기 메모지에 글을 써서 붙여두고 갔다.

어떤 때는 편지를 써서 숨겨두고는 메모지를 따라 찾게 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자상하고 따뜻한 내 손녀들!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어서는 집 근처 까프푸에 같이 가서 장을 보기도 했는데 '언제 이렇게 이쁘게 잘 컸나' 싶어 혼자 옛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재잘거리는 손녀들의 웃음소리는 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2005년에는 큰손녀가 언론정보학부에 합격하며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막내아들과 함께 서울에 가서 첫 손녀의 대학교를 둘러보았다. 작은 외삼촌처럼 기자가 되겠다던 꿈을 이루겠다고 했다.

첫 손녀가 4살 때 막내아들은 방송국기자가 되어 티비 뉴스시간에 나왔었다. 손녀는 "방송에 나오는 모습도 멋있었지만, 집으로 퇴근한 후 직장얘기를 들려주는 외삼촌은 참 행복해 보였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기도 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하며.


< 자랑스럽고 다정한 막내아들 >

2000년, 막내아들은 결혼 후 7살과 4살인 두 아들의 아빠였고 해운대에 넓은 집도 사서 이사를 했다. 직장에서도 방송국 기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회사의 주역이 되어갔다.

1994년 관훈클럽을 통해 미국으로 1년 연수를 다녀온 후 해외취재도 자주 다니며 취재와 뉴스뿐 아니라 좋은 프로그램도 만들어 상을 받는 등 훌륭히 성장해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두 손자는 전업주부인 며느리가 있어 나는 간섭하지 않았다. 나는 아침마다 아들의 가족을 위해 기도했고, 명절에 우리 집에 오면 남편은 간절히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는데, 그때마다 두 손자가 외치는 “아멘!” 은 우리 부부 마음에 기쁨과 희망의 메아리가 되었다.


2005년, 장림에 이사 온 지 5년이 다 되어가자 우리 부부는 장남내외와 상의를 했다. 그 집을 사서 계속 함께 살지 분가를 할지 아들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물었다. 나는 아들이 늦게 재혼했으니 둘이서 재밌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늘 있었기 때문에, 분가하겠다는 아들의 말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후 한 동안, 혼자 있는 시간에는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났다.


둘의 사랑이 변치 않고 서로를 위해주니 보기에 좋았다. 아들부부는 우리 부부를 위해 다대포에 바다가 보이는 18평 아담한 아파트를 찾아주었다. 같이 가보았는데 전망이 좋고 남향이라 해가 잘 들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의 70대도 절반을 넘기며 비로소 우리 부부만의 오붓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쉼과 같았다. 다만 그 쉼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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