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쌔리골 27년의 끝자락, 예상 밖의 폭풍

남편의 울타리와 내게 주신 지혜로 이루어 낸 평온

by 남쪽열매

<1973년 괴정 쌔리골, 절집과 이웃이 되다.>

​마흔셋이던 1973년, 우리 부부가 쌔리골에 짐을 풀었을 때는 이미 옆집에 ‘절집’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살림집에 법당을 넣은 아주 작은 절인데 초파일이면 신도들이 북적이곤 했다..


정부에서 저소득층을 위해 지어진 동네라고 들었고, 주인이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절집 식구들과 좌우로 여섯 가구가 이웃하며 27년의 세월을 보냈다. 처음에 이사 온 사람들은 무료로 들어왔고 우리는 돈을 내고 들어와 살았다.


아이들이 한창 크고 학교 다닐 시기에 들어와 살다 보니 의도치 않게 오랜 세월을 머물렀다. 손주들까지 이곳에서 몇 년씩 함께 지내다 보니 많은 추억이 어려있는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 들이닥친 폭풍, 나를 지켜준 남편의 든든한 등>

​평화롭던 일상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깨졌다. 원소유주인 할아버지의 손주가 나타나 35 가구가 사는 땅을 ‘할매’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할매란 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인데 마을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한 그 녀를 간단히 그렇게 불렀다. 어느 날부터인가 새 주인인 '할매'가 집집이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1988년, 쌔리골 생활 15년이 흐른 어느 날, 내가 갓난 둘째 손녀와 함께 집에 있을 때 '땅주인 할매'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녀는 목소리가 크고 걸걸해서 심장이 약한 나는 구심을 먹고 진정시켜야 했다. 이주비 50만 원을 줄 테니 최대한 빨리 무조건 집을 비우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딸과 아들이 교사와 기자로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돈을 모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계속 빚을 갚았고 또 사업하는데 계속 자금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퇴근 후, 내 말을 전해 들은 ​남편은 '할매'가 다시 우리 집을 찾아와 위협적으로 행동해서 나와 어린 손녀들이 놀랄까 봐 노심초사했다.

" 내 아내와 아이들이 놀라니 집 근처엔 얼씬도 마시오. 할 말이 있으면 나하고 하시오." 라며, 남편은 할매와 조 씨의 접근을 철저히 막아서며 모든 험한 대화를 본인이 도맡았다. 혹여나 내가 마음 다칠까 봐 홀로 그 압박을 견뎌내며 문 앞을 지키던 남편의 든든한 뒷모습은 그 어떤 성벽보다 깊은 위로였다.


< 조 씨와 예의로 풀어낸 대화의 실타래 >

할매가 그 당시 바로 옆에 짓고 있던 신설 전문대학에 우리 동네 땅을 팔기로 한 후에는, 학교 측 땅 매입 담당대리인 조 씨까지 와서 집을 비우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편이 밖에서 울타리가 되어주는 동안, 나는 조 씨와 할매 측을 향해 조용하지만 단호한 대화를 시작했다.


전문대학 대리인이라는 조 씨는 법을 들먹이며 우리를 몰아붙였지만, 우리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부유함도 가난함도 겪어본 우리 부부였기에, 내 이익을 위해 남을 적으로 돌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땅주인의 권리는 인정하되, 27년 세월을 지켜온 우리의 정당한 권리와 사정을 우리 부부는 예의를 갖춰 설명했다.


할매는 1년 안에 35 가구를 모두 이주시키려고 서둘렀지만 쉽지 않았다. 딸과 손녀들이 대전으로 간 1990년에는 많은 집들이 이주비 50만 원을 받고 떠났다. 우리는 그렇게 나와서는 갈 곳이 없었다.

그 후 우리는 6년을 할매와 조율하고 4년은 할매의 땅을 매수한 조 씨와 200만 원으로 전세계약을 맺어 1년씩 갱신하며 지냈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투쟁이 아닌 ‘연구와 조율’로 그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남편의 굳건한 태도와 나의 유연한 협상에 할머니도 조 씨도 결국 마음을 열었다.


< 머무름으로 전한 마지막 고마움 >

​우리가 이사를 가기 약 4년 전인 1996년 무렵, 동네에는 우리 집을 포함해 단 세 채의 집만이 남겨져 있었다. 적막함이 감돌 법도 한 그 시기, 우리 바로 옆 절집에 사는 비구니스님과의 인연은 유독 각별했다.


​스님은 땅주인 '할매'로부터 땅을 샀다. 당시 그 땅은 대학 측에 언제든 팔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스님은 우리 부부가 이사를 갈 때까지 끝내 그 자리를 지켰다.

어느 날 스님이 우리 부부에게 고백하듯 털어놓은 속내는 참으로 인간적이고 고마웠다.

​"우리가 먼저 이사를 가버리면, 할머니 부부가 무서울 거예요. 할머니 댁이 이사 갈 때까지 저도 여기서 기다렸다가 같이 팔고 나갈게요. 두 분은 참 점잖고 좋은 분들이라 곁에서 조금이라도 돕고 싶습니다." ​

우리 집 식구들이 워낙 조용하고 점잖게 생활해 주어 늘 마음이 편안하다던 스님. 그 고마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스님은 우리가 이사를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든든한 이웃으로 곁을 지켜주었다.


<​대가 없이 내어준 넉넉한 마음>

​종교는 달랐지만, 우리 부부도 이미 스님에게 우리가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절터 계단 아래에 있던 텃밭은 본래 돌밭이던 것을 우리 부부가 하나하나 돌을 걷어내며 일군 곳이었지만, 스님이 농사짓고 싶다고 해서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무료로 그냥 내어드렸다. 그 밭은 우리 부부가 그곳에서 농사지은 채소로 김장까지 하며 풍성한 식탁을 차릴 수 있었던 요긴한 밭이었다. ​3년 뒤, 스님은 감탄하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땅을 잘 가꾸셨어요? 덕분에 3년 동안 거름을 안 줘도 농사가 아주 잘 되네요."


또, ​수세식 화장실을 집 안에 들이기 전까지, 우리가 쓰던 바깥 화장실은 구조상 절집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우리는 깨끗이 수리한 그 화장실을 스님께 무료로 내어드렸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내어준 텃밭과 화장실, 스님은 그 배려를 마음 깊이 고마워하셨다.


1996년부터 이사 가기 전까지의 그 4년은,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겨운 온기를 확인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신앙은 달랐지만 우리와 스님의 따뜻한 동행은 그 시절 우리 집 앞마당에 핀 꽃처럼 아름답게 기억에 남아 있다.


​<2000년, 장림동 32평 아파트를 계약하다>

​2000년, 드디어 27년의 쌔리골 생활을 평화롭게 잘 마무리했다. 할매가 보상금으로 500만 원을 내놓았다.

조 씨에게서 돌려받은 전세금 200만 원, 그리고 은행에서 2년 거치 3년 상환이라는 좋은 조건으로 500만 원의 융자를 받은 돈, 자녀들의 정성, 거기에 우리 부부가 알뜰히 조금씩 모은 돈 등을 합해 장림동 32평 아파트 전세를 얻었다.


이사 가던 날, 우리는 쌔리골의 흙을 털며 서로를 다독였다. “여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남편의 짧고 깊은 한마디에 지난 12년의 집으로 인한 마음고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사 후 번듯한 아파트 거실에 앉아 대전에 있는 딸과 분가한 아들에게 전화를 걸 때,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자식들에게 남기는 위대한 유산: 부드러운 단호함>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그 험한 상황을 소란 없이 해결했느냐고. 우리의 답은 하나다. 상대방을 배려하되 스스로의 품위를 잃지 않는 것. 남편의 헌신적인 보호와 나의 지혜로운 대처가 합쳐져 27년의 마침표를 장림의 안식처로 찍을 수 있었다.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진심과 예의가 결국 승리한다는 인생의 진리였다. 이제 우리는 그 당당한 자부심으로 평온한 내일을 맞이한다.

​<뒷마당 언덕에 심은 생명의 기록>

쌔리골 우리 집은 ​단순히 비워내야 할 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우리 손주들의 성장 기록이 나무로 뿌리내린 삶의 터전이었다. 딸이 첫 손녀를 낳았을 때, 나와 남편은 3년 된 묘목을 사다 뒷언덕에 정성껏 심었다. 아이가 자라 다섯 살이 되던 해, 7년생이 된 나무는 기특하게도 첫 열매를 맺었다. 그해 수확한 감이 무려 220개나 되었다.


​그 기쁨을 시작으로 둘째 손녀가 태어날 때는 대추나무를, 막내 손녀가 태어날 때는 석류나무를 심었다. 아이들이 방학마다 부산으로 내려와 키를 잴 때면, 나무들도 질세라 가지를 뻗어 탐스러운 열매를 선물했다. 아이들의 태어남과 성장이 나무의 결마다 새겨져 있었으니, 쌔리골은 우리 가족에게 살아있는 박물관과도 같았다.


​<검은 어미 개 '구로'와 산딸기 향기>

​마당 한편에는 검은 어미 개 ‘구로’와 새끼 강아지들이 있었다. 강아지 네 마리 중 두 마리를 먼저 입양 보내고, 남은 두 마리를 애지중지 길러 이사 가던 날 좋은 곳으로 입양 보냈던 기억이 선하다.

​이른 아침이면 남편은 두 손녀의 손을 잡고 산에 올랐다.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을 떠 오며 길가에 핀 산딸기를 따 먹던 손녀들의 입가는 늘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약수터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은 손녀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천연 수영장이 되어주었고, 그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쌔리골의 적막을 기분 좋게 깨우곤 했다.


<할아버지의 꿀 떨어지는 눈빛과 세 손녀의 웃음소리>

남편은 예쁜 신발만 보면 손녀들에게 사다 주는 게 취미였다. 그 신발을 신어본 첫 손녀는

"우와! 너무 예뻐요 할아버지!" 하며 할아버지 품에 안겨 할아버지 볼에 뽀뽀를 아끼지 않으며 좋아했다. 남편은 "허허 허허 그렇게 좋아?" 하며 한마디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더구나 그 신발을 현관에 반듯하게 벗어 놓는 것을 본 남편은 "선물을 귀하게 여길 줄 안다."며 기특해했다.


얌전하면서도 고운 둘째 손녀는 할아버지 넓은 등을 미끄럼틀 삼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는 걸 좋아했고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말을 아직 못 하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언니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중에 언니가 일어나니 조용히 그러나 빨리 그 장난감을 언니에게 주었다. 언니 장난감이 좋아서 일부러 일찍 일어나 놀고 돌려주는 생각 깊은 둘째 손녀의 성품은 싸우지 않고 늘 사이좋게 지내는 세 자매의 모습으로 자라났다.


막내손녀도 딸 몸조리 때와 딸이 서울 올라간 후 잠시 데리고 있으며 정이 깊어졌다. 특히 내가 안고 머리를 감길 때면 그렇게 겁을 내었고, 바다에 같이 갔을 때 물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했다. 그럴 때면 내가 꼭 안아주는 걸 좋아했다.

서울에 이사 간 후 저학년 때, 학교 갔다 오면 "집에 혼자 있어 무섭다."라고 나에게 자주 전화가 왔다. 나는 시간을 가지고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무서워하지 말아라."며 다독였다.


나는 뽀얗게 고아낸 장어국물을 손녀들에게도 주었는데 어찌나 꿀꺽꿀꺽 잘 먹던지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참 행복했었다. 날로 총명해지는 건강하고 예쁘고 다정한 세 손녀를 키우며 우리 부부는 어려움 속에서도 마냥 기쁘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비 오는 날의 협주곡, 쌔리골의 낭만>

​비가 오는 날의 쌔리골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비가 쏟아지면 약수터 물이 공터 아래로 폭포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며 떨어졌는데, 그 웅장한 물소리가 집 안까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면 산 아래로 펼쳐지는 야경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리듬을 만들면, 딸아이가 즐겨 듣던 기타 협주곡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빗줄기가 앞마당 웅덩이에 그려내는 수많은 동심원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던 그 평화로운 순간들.

비록 집을 둘러싼 현실의 풍파는 거셌지만, 우리 가족은 그 안에서 자연이 주는 위로를 만끽하며 마음의 근육을 키워나갔다.


​< 보수동 헌책방과 고물상으로 보내진 책들 그리고 간직할 것은...> ​

2000년, 27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장림동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서가를 가득 채웠던 수많은 전공 서적과 교양서적들은 보수동 헌책방이나 고물상으로 실려 나갔다.

눈에 보이는 이삿짐은 차곡차곡 챙겼지만, 그곳에 심어둔 나무와 강아지와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비 오는 날의 음악 소리는 차마 다 실어 올 수 없었다.


대신 나는 그것들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위대한 유산'으로 고이 간직하기로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부드러운 단호함' 그리고 작은 나무 한 그루와 빗소리에서도 행복을 찾아낼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 이 쌔리골에서의 삶이 준 선물이 되리라 믿어졌다.


캄캄한 하굣길, 고3 누나가 무서울까 봐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가던 중3 남동생의 기특한 뒷모습. 함께 돌아오는 학교 뒷길 포장마차에서 동생에게 따끈한 호떡을 사주던 누나의 다정한 마음.

대학생이 된 딸의 첫 늦은 귀가에, 집 앞 계단 위에 서서 내려다보며 안절부절 기다리던 50대 남편의 모습.

80년대 초 주사파 대학생 데모가 빈번할 때, 서울에서 대학교 다니는 아들이 걱정되어 딸과 함께 새벽까지 토론하며 대화하던 아버지의 마음.


우리 가족이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낸 쌔리골의 27년은 우리 부부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불편했지만 가장 뜨겁고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수업이었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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