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60대
< 딸의 결단과 대전에서의 고단한 시작 >
딸아이는 결혼 후 5년이 넘도록 주말부부로 살며 친정인 우리 집에서 두 아이를 길렀다. 사위가 부산으로 전근 오기만을 고대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았고, 딸은 친정에서 그랬듯 시댁에도 월급봉투를 통째로 드리고 용돈을 받아 쓰곤 했다. 사위 역시 월급을 본가에 다 드렸는지, 임신한 딸에게 영양제 하나, 과일 하나 마음 편히 사주지 못할 정도로 절약하며 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댁 새집을 지으며 생긴 빚을 갚느라 그랬다는데, 당시엔 그게 참 서운했다. 하지만, 나는 사위가 올 때마다 백년손님이라며 정성껏 대접했다. 딸은 출산 후에도 보너스 때면 꼭 시댁에 생활비를 보낼 정도로 마음이 깊었다. 우리 부부가 늘 베풀며 사는 모습만 보고 자라 저리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가 싶어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1990년, 대전이 광역시가 되면서 딸은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겠다며 대전으로의 전근을 결정했다. 시댁에 들어간다니 걱정이 앞섰지만, 딸은 주말부부 5년을 청산하고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워보겠다며 용기를 냈다. 손녀들을 돌보며 안방에서 함께 잠들던 그 따뜻한 시간을 뒤로하고 딸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애처롭기만 했다. 그 후 나는 허전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내 심장이 찢어질 듯 힘들었다.
대전에서의 시작도 험난했다. 새집을 짓는 동안 공주 한전 사택에서 대전까지 공암고갯길을 빙빙 돌아 출퇴근하던 딸은, 그 와중에 도둑이 들어 내가 해준 산호 반지와 딸의 결혼 다이아반지 등 전 재산 같은 예물을 모두 잃었다. 우리는 그저 "사람 안 상한 게 어디냐"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그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
다음 해 셋째를 낳은 딸은 딸 셋의 엄마가 되었다. 외동딸이 시집가서 아들만 바라는 집안에 딸만 셋을 낳았으니 그 마음고생은 얼마나 컸을까!
본래 부산에서 몸 풀고 내가 몸조리를 해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예정일보다 2주나 빨리 대전에서 출산을 했다는 소식에 우리 부부는 한달음에 달려가 딸과 손녀들을 부산으로 데리고 왔다.
손녀딸은 너무나 야무지고 똘똘해 보이고 예뻤다. 그러나 내 딸은 몸이 한없이 약해있었다. 한의원에 데려갔더니 한 70대의 몸상태라며 한약을 세재는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어떻게 기른 귀한 딸인데 이렇게 몸이 약해지다니...
나는 있는 힘껏 정성을 다해 딸의 출산 후 몸조리를 해주었다. 나와 남편은 세손녀를 맘껏 사랑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두 손녀도 동생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몸조리가 끝나도 딸은 다리에 힘이 없고, 모시고 사는 시어머니가 세 아이를 돌봐줄 자신이 없다 해서 1년 육아휴직을 하기로 하고 대전으로 돌아갔다.
딸은 1993년 대전에 간지 3년 반 만에 뜻밖에 사위가 서울본사로 발령이 났다. 대전에서 부모님 모시고 끝까지 살겠다던 효자였는데, 일 잘하는 사위가 필요했던 상사의 강권으로 본사발령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딸도 대전시교육청에 서울로의 전근을 요청했는데 아주 운이 좋게 바로 발령이 나서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빚을 내어 전셋집을 구하고 세 아이를 키워야 되니 힘들게 살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이 또한 그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리라 믿고 감사했다.
< 큰아들의 풍파와 재기, 그리고 남편의 새로운 길 >
큰아들의 삶은 유독 풍파가 잦았다. 집안을 일으키려 아들은 시장에서 장사한 돈을, 며느리는 인쇄소 다니며 번 돈을 모아 적금을 부었지만,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며 아들은 그 소중한 적금을 모두 아낌없이 내어주고 빈손이 되었다. 이후 아들은 독립하여 장사를 시작했으나 결국 정리하게 되었고, 사업 빚을 갚기 위해 1988년부터 1년여간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배 위에서 매달 보내온 50만 원의 월급은 우리 집안을 다시 세우는 눈물겨운 초석이었다. 배에서 내린 후 아들은 성창기업과 가스회사를 거쳐 란제리 도매상가 관리자로 취직했고, 그곳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으며 지금의 큰며느리를 만나 비로소 평안한 가정을 다시 꾸렸다.
남편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자유시장 장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직전,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맞았으나 사위의 배려로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그 무렵 남편은 시장 부근 부동산 사장의 요청으로 매매 계약서 작성을 돕다가 본격적으로 부동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일이 마무리된 후, 65세 되던 해에 남편은 아파트 경비 일을 시작했다. 80세가 될 때까지 15년 동안이나 경비대장으로 성실히 근무하며 노년의 긍지를 지켜준 남편이 참 고맙고 든든했다.
< 20년의 고투와 빚더미에서 얻은 자유함 >
1973년부터 시작된 사업 부도 빚은 무려 15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으나, 1988년 마침내 그 사채의 사슬을 끊어냈다. 또한 1981년부터 생긴 막내아들 학자금과 사업 관련 부채 역시 11년의 사투 끝에 1992년 모두 상환했다. 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와 남편은 뼈를 깎는 노력을 했고, 자식들은 제 살을 떼어내듯 힘을 보탰다.
큰아들은 장사하며 또 배를 타며 번돈을 우리에게 보탰고, 딸아이는 결혼 전 3년 동안 봉급을 모두 주고 약간의 용돈을 받아썼으며, 방송국에 들어간 막내아들도 4년 반 동안 봉급 봉투를 뜯지도 않은 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제 월급 한 푼 쓰지 않고 오직 특근비로만 생활했다. 남편은 누구에게도 의지하는 마음 없이 늘 자립의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나도 절약에 또 절약하며 알뜰하게 가정을 꾸리고 틈틈이 시장일도 도왔다.
온 가족의 하나 된 삶의 태도 덕분에 1992년 8월, 비로소 모든 채무에서 해방되었다. 빚을 청산한 후 우리는 비로소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 고생 끝에 찾아온 가문의 영광과 보람 >
1993년 1월, 막내를 장가보내던 날, 나는 평생의 숙제를 마친 듯한 홀가분함과 자유함을 느꼈다.
기자로서 성실히 일하던 막내아들이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쳐 관훈클럽 장학금으로 미국 대학교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만삭인 아내는 아들이 떠난 후 출산을 했고, 몸조리 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장한 아들과 내조하는 며느리와 어린 손자들을 위해 간절히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1997년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크게 위험에 빠지고 기업체들이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힘든 가정도 많이 생겨났다. 나는 오래전 우리가 겪은 광주 충장로시장 부도사태 때가 생각나 마음이 더 안타까웠다. 나는 나라와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을 위해 날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외환위기 때 미국연수를 떠난 막내아들 네 식구가 어려움을 겪지 않기를 기도했다. 서울 간 딸은 사위가 직장이 바뀌고 또 박사학위공부를 하는 동안, 혼자 직장과 가사 그리고 세 아이의 육아를 다 책임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서울의 딸과 세손녀들에게 마음이 가있었다. 가서 도와주고 싶지만 갈 수가 없으니, 부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를 기도하며, 혼자 있어 무섭다고 자주 전화하던 막내손녀를 말로 다독여줄 뿐이었다.
내가 68세가 되는 1998년에는, 부산에서 네 살 때 나와 함께 유치원을 오가며 종달새처럼 조잘대던 첫 손녀가 서울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곱디고운 둘째 손녀는 초등학교 4학년, 귀엽고 씩씩한 막내 손녀는 초등학교 신입생이 되어 입학 사진을 보내왔다.
막내의 아들인 우리 집 장손은 부산에서 유치원에 입학했고, 막내 손자는 이제 막 두 살박이 아기가 되었다.
자유시장에서의 성공과 위기, 그리고 재기...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도 마당의 꽃나무를 가꾸고 강아지 두 마리를 돌보며 손주들을 사랑으로 키워낸 나의 60대. 인내했던 그 시간은 이제 제 몫을 다하는 세 자녀와 건강하게 자라는 손주들이라는 가장 값진 보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