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온 가족이 함께 넘은 언덕과 값진 열매

나의 60대

by 남쪽열매

< 딸의 결단과 대전에서의 고단한 시작 >

​딸아이는 결혼 후 5년이 넘도록 주말부부로 살며 친정인 우리 집에서 두 아이를 길렀다. 사위가 부산으로 전근 오기만을 고대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았고, 딸은 친정에서 그랬듯 시댁에도 월급봉투를 통째로 드리고 용돈을 받아 쓰곤 했다. 사위 역시 월급을 본가에 다 드렸는지, 임신한 딸에게 영양제 하나, 과일 하나 마음 편히 사주지 못할 정도로 절약하며 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댁 새집을 지으며 생긴 빚을 갚느라 그랬다는데, 당시엔 그게 참 서운했다. 하지만, 나는 사위가 올 때마다 백년손님이라며 정성껏 대접했다. 딸은 출산 후에도 보너스 때면 꼭 시댁에 생활비를 보낼 정도로 마음이 깊었다. 우리 부부가 늘 베풀며 사는 모습만 보고 자라 저리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가 싶어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1990년, 대전이 광역시가 되면서 딸은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겠다며 대전으로의 전근을 결정했다. 시댁에 들어간다니 걱정이 앞섰지만, 딸은 주말부부 5년을 청산하고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워보겠다며 용기를 냈다. 손녀들을 돌보며 안방에서 함께 잠들던 그 따뜻한 시간을 뒤로하고 딸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애처롭기만 했다. 그 후 나는 허전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내 심장이 찢어질 듯 힘들었다.


대전에서의 시작도 험난했다. 새집을 짓는 동안 공주 한전 사택에서 대전까지 공암고갯길을 빙빙 돌아 출퇴근하던 딸은, 그 와중에 도둑이 들어 내가 해준 산호 반지와 딸의 결혼 다이아반지 등 전 재산 같은 예물을 모두 잃었다. 우리는 그저 "사람 안 상한 게 어디냐"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그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


다음 해 셋째를 낳은 딸은 딸 셋의 엄마가 되었다. 외동딸이 시집가서 아들만 바라는 집안에 딸만 셋을 낳았으니 그 마음고생은 얼마나 컸을까!

본래 부산에서 몸 풀고 내가 몸조리를 해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예정일보다 2주나 빨리 대전에서 출산을 했다는 소식에 우리 부부는 한달음에 달려가 딸과 손녀들을 부산으로 데리고 왔다.


손녀딸은 너무나 야무지고 똘똘해 보이고 예뻤다. 그러나 내 딸은 몸이 한없이 약해있었다. 한의원에 데려갔더니 한 70대의 몸상태라며 한약을 세재는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어떻게 기른 귀한 딸인데 이렇게 몸이 약해지다니...


나는 있는 힘껏 정성을 다해 딸의 출산 후 몸조리를 해주었다. 나와 남편은 세손녀를 맘껏 사랑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두 손녀도 동생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몸조리가 끝나도 딸은 다리에 힘이 없고, 모시고 사는 시어머니가 세 아이를 돌봐줄 자신이 없다 해서 1년 육아휴직을 하기로 하고 대전으로 돌아갔다.


딸은 1993년 대전에 간지 3년 반 만에 뜻밖에 사위가 서울본사로 발령이 났다. 대전에서 부모님 모시고 끝까지 살겠다던 효자였는데, 일 잘하는 사위가 필요했던 상사의 강권으로 본사발령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딸도 대전시교육청에 서울로의 전근을 요청했는데 아주 운이 좋게 바로 발령이 나서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빚을 내어 전셋집을 구하고 세 아이를 키워야 되니 힘들게 살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이 또한 그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리라 믿고 감사했다.


< 큰아들의 풍파와 재기, 그리고 남편의 새로운 길 >

​큰아들의 삶은 유독 풍파가 잦았다. 집안을 일으키려 아들은 시장에서 장사한 돈을, 며느리는 인쇄소 다니며 번 돈을 모아 적금을 부었지만,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며 아들은 그 소중한 적금을 모두 아낌없이 내어주고 빈손이 되었다. 이후 아들은 독립하여 장사를 시작했으나 결국 정리하게 되었고, 사업 빚을 갚기 위해 1988년부터 1년여간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배 위에서 매달 보내온 50만 원의 월급은 우리 집안을 다시 세우는 눈물겨운 초석이었다. 배에서 내린 후 아들은 성창기업과 가스회사를 거쳐 란제리 도매상가 관리자로 취직했고, 그곳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으며 지금의 큰며느리를 만나 비로소 평안한 가정을 다시 꾸렸다.


​남편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자유시장 장사를 아들에게 물려주기 직전, 예기치 않은 위기를 맞았으나 사위의 배려로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그 무렵 남편은 시장 부근 부동산 사장의 요청으로 매매 계약서 작성을 돕다가 본격적으로 부동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일이 마무리된 후, 65세 되던 해에 남편은 아파트 경비 일을 시작했다. 80세가 될 때까지 15년 동안이나 경비대장으로 성실히 근무하며 노년의 긍지를 지켜준 남편이 참 고맙고 든든했다.


< 20년의 고투와 빚더미에서 얻은 자유함 >

​1973년부터 시작된 사업 부도 빚은 무려 15년 동안 우리를 괴롭혔으나, 1988년 마침내 그 사채의 사슬을 끊어냈다. 또한 1981년부터 생긴 막내아들 학자금과 사업 관련 부채 역시 11년의 사투 끝에 1992년 모두 상환했다. 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와 남편은 뼈를 깎는 노력을 했고, 자식들은 제 살을 떼어내듯 힘을 보탰다.


큰아들은 장사하며 또 배를 타며 번돈을 우리에게 보탰​고, 딸아이는 결혼 전 3년 동안 봉급을 모두 주고 약간의 용돈을 받아썼으며, 방송국에 들어간 막내아들도 4년 반 동안 봉급 봉투를 뜯지도 않은 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제 월급 한 푼 쓰지 않고 오직 특근비로만 생활했다. 남편은 누구에게도 의지하는 마음 없이 늘 자립의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나도 절약에 또 절약하며 알뜰하게 가정을 꾸리고 틈틈이 시장일도 도왔다.

온 가족의 하나 된 삶의 태도 덕분에 1992년 8월, 비로소 모든 채무에서 해방되었다. 빚을 청산한 후 우리는 비로소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 고생 끝에 찾아온 가문의 영광과 보람 >

1993년 1월, 막내를 장가보내던 날, 나는 평생의 숙제를 마친 듯한 홀가분함과 자유함을 느꼈다.

​ 기자로서 성실히 일하던 막내아들이 1997년에서 1998년에 걸쳐 관훈클럽 장학금으로 미국 대학교로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만삭인 아내는 아들이 떠난 후 출산을 했고, 몸조리 후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장한 아들과 내조하는 며느리와 어린 손자들을 위해 간절히 축복의 기도를 드렸다

1997년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크게 위험에 빠지고 기업체들이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힘든 가정도 많이 생겨났다. 나는 오래전 우리가 겪은 광주 충장로시장 부도사태 때가 생각나 마음이 더 안타까웠다. 나는 나라와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들을 위해 날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외환위기 때 미국연수를 떠난 막내아들 네 식구가 어려움을 겪지 않기를 기도했다. 서울 간 딸은 사위가 직장이 바뀌고 또 박사학위공부를 하는 동안, 혼자 직장과 가사 그리고 세 아이의 육아를 다 책임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서울의 딸과 세손녀들에게 마음이 가있었다. 가서 도와주고 싶지만 갈 수가 없으니, 부디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를 기도하며, 혼자 있어 무섭다고 자주 전화하던 막내손녀를 말로 다독여줄 뿐이었다.


내가 68세가 되는 1998년에는, 부산에서 네 살 때 나와 함께 유치원을 오가며 종달새처럼 조잘대던 첫 손녀가 서울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곱디고운 둘째 손녀는 초등학교 4학년, 귀엽고 씩씩한 막내 손녀는 초등학교 신입생이 되어 입학 사진을 보내왔다.

막내의 아들인 우리 집 장손은 부산에서 유치원에 입학했고, 막내 손자는 이제 막 두 살박이 아기가 되었다.


자유시장에서의 성공과 위기, 그리고 재기...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도 마당의 꽃나무를 가꾸고 강아지 두 마리를 돌보며 손주들을 사랑으로 키워낸 나의 60대. 인내했던 그 시간은 이제 제 몫을 다하는 세 자녀와 건강하게 자라는 손주들이라는 가장 값진 보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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