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쌔리골 골짜기의 봄날

나의 50대, 채워지는 석류알

by 남쪽열매

​<벌써 쉰! 수학 선생님이 된 딸과 카투사 막내아들>

​1981년, 막내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며 한시름 놓고 보니 내 나이 어느덧 쉰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큰아들은 제대 후 아버지를 도와 가게일에 열심이었고, 딸은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 되어 열심히 미래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이듬해 2월, 딸은 부산대학교 수학교육과를 졸업하면서 가까운 여중으로 발령을 받았다. 어엿한 수학 선생님이 된 것이다.


딸이 대학에 다닐 때의 일이 떠오른다. 공부하다 잠든 딸의 책상 위에는 영어로 된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수학책인데 왜 제목이 영어지?' 의아해하며 펼쳐보니 숫자와 기호를 제외하곤 한글 한 자 없이 어려운 영어만 가득했다.

이 어려운 학문을 묵묵히 정복해 나가는 딸의 뒷모습이 그날따라 얼마나 대견하고 대단해 보였는지 모른다. 부모 속 한 번 썩이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간 딸이었기에, 분명 좋은 선생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막내아들은 대학교 3학년을 다니다 군대에 갔다. 육군이지만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카투사로 입대했다. 남들보다 좀 편하게 근무한다고 하니 다행스러웠는데 휴가도 자주 나와서 좋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다시 쌔리골 골짜기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새로운 내일을 준비했다.


​<두 아이의 결혼과 막내의 제대>

​1984년, 내 나이 쉰넷이고 남편은 쉰아홉이 되던 해였다. 그해 11월 큰아들이 먼저 장가를 갔고, 이듬해 3월 1일 딸아이까지 시집을 보냈다.

척박한 쌔리골 골짜기까지 찾아온 자식들의 경사를 치르고 나니, 비로소 부모로서의 큰 숙제를 다 마친 듯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해 막내아들까지 3년 가까운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복학했으니, 그야말로 집안에 볕이 드는 기분이었다.


​ 딸은 교직 생활 3년 동안 받은 월급봉투를 늘 통째로 우리 부부에게 맡기곤 했다. 본인은 교통비 정도의 용돈만 타 쓰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당시 공무원 신분이었던 딸의 가계수표는 남편의 사업 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늘 검소하고 단정했던 딸을 위해 나는 빚을 내서라도 후회 없이 혼수를 준비해 보냈다. 비록 사돈 댁의 형편이 생각보다 어려워 딸이 고생하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신앙심 깊은 사위와 딸의 믿음을 믿어보기로 했다.


​<할머니가 된 나, 그리고 예기치 못한 시련>

​1986년 1월, 드디어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 남편의 환갑 해에 얻은 첫 손녀였다. 대전의 대학병원에서 만난 손녀는 건강하고 사랑스러웠다. 손자를 기대했던 사돈은 섭섭한 눈치였다.

6개월 넘게 직장 다니며 입덧으로 고생하고, 의사의 제왕절개 권유도 마다하며 난산 끝에 자연분만을 해낸 딸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짠해 눈물이 났다.

내가 부산에서 산후조리를 해주고 싶었지만 대전 시댁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를 원하셨기에, 안사돈께 맡기고 부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2개월의 출산휴가와 4개월의 육아휴직을 보내고 딸은 부산에 돌아와 복직했다. 그 후 첫 손녀를 키우며 나는 힘든 것보다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새로운 기쁨의 시간들을 보냈다.


​삶은 늘 평탄하게만 흐르지 않았다. 결혼 후 분가하지 않고 함께 살던 큰아들 내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며느리의 건강 문제로 순탄치 않은 시간이 이어졌고, 결국 2년 남짓한 결혼 생활을 끝으로 부득이 이혼을 하게 되었다. 아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쌔리골의 칼바람보다 더 시리고 아팠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된 아들을 위해 묵묵히 따뜻한 밥상을 차려내며 그 아픈 시간을 함께 견뎠다.


​< 막내의 합격과 둘째 손녀, 다시 피어난 웃음꽃>

1988년 새해를 열며 ​졸업을 앞둔 막내아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신문기자를 꿈꾸던 아들이 우여곡절 끝에 부산 MBC 신입사원 공채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앞으로는 방송기자의 전망이 더 밝다"며 고심 끝에 지원했던 아들이 합격 통보를 받은 것이다. 1988년 1월 10일! 막내아들의 방송국 기자로의 첫 출근은 우리 가족의 경사였다! 특히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어 우리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날, 출근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눈물 섞인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해 6월 나는 둘째 손녀를 품에 안았다. 이번엔 집에서 가까운 부산 위생병원에서 출산했고 내가 직접 딸의 산후조리를 해줄 수 있어 기뻤다. 갓 태어난 손녀는 잘생긴 남자아이처럼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예뻤다. 인상적인 것은 발그레한 얼굴에 표정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임신 당시 수두가 유행해서 걱정했는데 무사히 건강한 아이를 출산해서 더없이 감사했다.

첫째 손녀는 어느덧 세 살이 되어 종달새처럼 말을 잘했다. 동생을 샘낼까 봐 걱정하기도 했는데 동생을 끔찍이도 예뻐해 주는 아이였다. 동생사랑이 내 딸을 쏙 빼닮았다. 집안에는 생기가 넘쳐났다.


​<담담히 돌아보는 나의 50대>

​방송국에서 퇴근한 아들이 아장아장 걷는 첫 조카를 품에 안고 웃음을 터뜨리고, 곤히 자는 갓난아이 둘째 조카를 보며 하루의 피로를 잊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 내 마음의 평안은 집안 가득 한없이 퍼져나갔다.


부도로 빈손이 되어 들어왔던 쌔리골. 그곳에서 불이 나 전 재산을 잃기도 했고, 빚을 내어 자식들을 공부시키기도 했으며, 자식의 아픔에 가슴을 치며 울기도 했다.

하지만 가파른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흘린 땀과 눈물과 기도는 결국 우리 삶에 열매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막내는 6개월의 긴 수습기간을 마치고 편집부기자를 거쳐 사회부기자가 된 후에야 TV에서 뉴스를 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쉰아홉 인 나와 네 살 된 종달새 첫 손녀 그리고 우리 가족의 큰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나의 50대는 그렇게 꽉 찬 석류처럼 붉게 익어갔고, 고난 뒤에 찾아온 감사의 열매들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