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도 꺾지 못한 나의 꿋꿋한 40대
< 고단했던 쌔리골 산동네, 우리 가족의 성소(聖所)! >
보수동을 떠나 괴정으로 이사 오고 14개월이 지났을 무렵, 내 나이 마흔다섯에 남편이 쉰이 되던 해에 삶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남편의 지인이던 서 사장이 자유시장에 상가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아내와 아들에게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며 남편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월 2만 5천 원을 줄 테니 도와달라는 제안에, 마침 신경통이 기적처럼 나은 남편은 그 청을 수락했다. 남편이 새 일을 시작하자 나도 고되었던 8개월간의 보따리 장사를 그만두고 비로소 집안 살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해에 큰아들은 고3, 딸은 고1, 막내는 중1이었다. 쌔리골에 와서도 새벽엔 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곤 온 식구의 도시락을 정성껏 싸며 건강을 챙기고, 집안 살림과 교회 예배도 거르지 않았으며 독립한 형제들의 안부도 살뜰히 보살폈다.
남편과 나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우리 집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했다. 사실 남편이 이 집을 보기 전, 나는 꿈에서 이 집을 먼저 보았다. 수도도 없는 초라한 집이었지만 예수님이 떠오르는 인자한 분이 상수도를 놓아주시는 꿈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예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동네가 캄캄해도 무서워하지 마라"라고 다독였다. 나중에는 동사무소를 통해 전봇대와 가로등도 세워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면 한겨울에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우리에게 운동하라고 이곳을 주셨나 보다" 하고 말했고, 아이들도 내 말에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아이들은, 숨차게 올라와 마주하는 탁 트인 공터에서, 건너편 산동네의 야경이 참 아름답다며 감탄하곤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함께 잠시 숨을 돌리며 빛나는 밤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 장남의 입시의 아쉬움과 그의 효심 >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려운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제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주 강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차가웠다. 채무자들은 우리 아이들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고, 서 사장조차 큰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월급 외의 돈에 손을 댈까 의심하는 눈치여서 참으로 민망하고 속이 상했다.
그 영향이었는지 효심 깊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큰아들은 학비 부담이 적은 2년제 부산교대에 지원했다. 합격이 당연시되는 성적이었으나, 그해 정부가 교대 정원을 크게 줄여 경쟁률이 예상치 못하게 치솟았다. 결국 아들은 합격하지 못했고, 대학 관계자는 "운이 없었다"는 말만 남겼다.
당시 우리 형편에 재수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컸던 아들은 결국 방송통신대학교를 선택했다. 낮에는 아버지를 돕고 밤에는 공부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남편과 나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서 사장 가게에서 2년을 인내하며 일한 끝에, 우리는 그곳의 재고를 인수하여 자유시장에 우리만의 소박한 가게를 차려 독립할 수 있었다.
< 시련의 불길 속에 타버린 가게 >
가게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큰아들이 군에 입대했다. 그때는 복무기간이 3년이었다. 이듬해에는 딸이 부산대 사범대에 합격하여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당시 첫 학기 등록금이 12만 3천 원이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런데 큰아들이 첫 휴가를 나온 그해 11월, 또 한 번의 거센 파도가 우리를 덮쳤다.
아침에 일어나 TV를 켜니 "자유시장에 큰 불이 났다."며 계속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서둘러 시장에 달려갔지만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결국 시장 전체가 다 타버리고 말았다.
국제시장에 있을 때는 15년 동안 화재보험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는데, 정작 자유시장에서는 보험을 들들 지 못한 상태였다. 다른 상인들이 보험금을 받을 때 우리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막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행히 정부가 세명의 연대보증으로 200만 원씩 대출을 지원해 준다고 했다. 남편은 평소 신뢰하던 상인들과 서로 보증을 서서 사업 자금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춥고 어설픈 가설시장에 물건을 들여놓고,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스타킹 독점판매의 행운 >
시장의 화재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으나 그 끝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은인을 보내주셨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양말공장 사장님이 업종을 바꿔 스타킹을 생산하기로 하면서, 남편의 성품과 장사 수완을 믿고 스타킹 독점 판매를 제안한 것이다. 생산된 물건을 오직 우리에게만 공급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가설시장의 작은 가게를 지켰고, 남편은 전국으로 스타킹을 보내느라 정신없이 뛰었다. 특히 광주 충장로의 큰 거래처들과 다시 인연을 맺으면서 스타킹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남편은 미적 감각이 뛰어나 과거 넥타이 도안을 직접 그려 큰 인기를 끌었을 만큼 재주가 좋았다.
그런 남편의 성실함과 능력을 눈여겨본 상인들은 그에게 시장의 일꾼이 되어달라 권유했다. 남편은 자유시장 재건축을 위한 부회장 및 정화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사심 없이 봉사하는 데 기꺼이 쏟아부었다.
그렇게 3년을 오직 앞만 보고 달린 끝에 우리는 화재로 잃었던 것보다 훨씬 큰 결실을 맺었다. 그 덕분에 쌔리골 집도 다시 고칠 수 있었다. 부엌에 싱크대를 들여놓고 한쪽에 작은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었으며, 연탄보일러로 난방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빨래는 늘 바깥 추운 수도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해야 했다. 그때는 동네에 물을 관리하는 '물장사'가 있어서 요일에 따라 물을 분배해 주던 시절이었다. 겨울이면 수도가 자주 얼어 뜨거운 물을 부어 녹이느라 아침이면 나는 무척이나 분주했다.
하지만 나는 물만 잘 나오면 신이 나서 빨래를 했고, 작은 앞마당 빨랫줄에 척척 널며 찬송을 불렀다. 주신 환경에 감사하며 소박한 행복을 일구어내던 시간이었다.
< 부모라는 이름의 헌신, 너의 꿈을 위해 >
가설시장에서 장사가 번창할 무렵, 막내아들이 고려대학교에 합격했다. 어려서부터 기자의 꿈을 가진 막내아들은 꼭 서울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동아일보기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신문을 늘 읽었고 다 읽은 신문도 꼭 반듯하게 접어두던, 신문을 사랑하고 기자를 존경하던 아이였다.
남편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 부산대 장학생으로 갈 것을 권유하며 마지막까지 설득했으나, 아들은 끝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날, 부산대학교 입학원서접수 마지막날, 남편과 막내아들 사이의 소리 없는 기싸움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남편이 갖다 준 부산대 원서를 가지고 아버지 가게에 나와 앉은 아들은, 원서마감시간이 될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마감시간이 되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착하고 배려심 많은 막둥이가 그렇게 자기 꿈에 대해 고집이 셀 줄은 미처 몰랐다. 남편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아마도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길을 잘 인도해 달라고 맡기는 간절한 기도를. 결국 우리는 뜻을 이룬 아들의 합격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학비마련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보증을 섰던 젊은 사장들이 무책임하게 자취를 감추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은행은 연대보증인이 사라졌으니 대출금을 즉시 상환하라고 압박해 왔다. 겨우 일어선 자리에 또다시 빚더미가 얹어진 것이다.
거기에 아들의 1학년 기숙사비 포함 등록금 150만 원이 시급했던 시기, 우리는 다시 200만 원의 빚을 내어 이자를 미리 제하고 180만 원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기숙사비 포함 등록금을 내고 아들에게 입학 기념 양복 한 벌을 해 입혔다. 회색 양복이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멋지고 사랑스럽던지! 우리 부부는 아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 입학식에 참석한 후 돌아왔다. 수중에는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아들이 너무나 대견했다. 그리고 그가 이룰 꿈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록 빚으로 시작한 대학 생활이었지만, 자식을 번듯하게 키워내겠다는 부모의 책임감과,
그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이 기쁘게 살아갈 원동력이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걱정보다는 믿음으로 소망가운데 다시 삶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것이 주신 환경 속에서 묵묵히 믿음을 지키며 희망을 잃지 않고 가족과 주변을 사랑하며 살아낸 나의 40대였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