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벼랑 끝에서 만난 인연과 남편 살리기 8개월

보수동에서 괴정 쌔리골 도심 속 산골짜기집으로

by 남쪽열매

​< 35만 원과 고스란히 남은 나의 사채 >

​1973년, 남편의 사업 실패로 보수동 집을 정리했다. 참 단단하고 쓸모 있게 지은 집이었는데, 은행에 넘어가기 전 서둘러 파느라, 시세보다 훨씬 싸게 지인의 동생에게 넘겼다.

그 후 어느 날, 빚을 다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여보, 이것만 남았어. 35만 원... 이걸로 집도 얻고 당분간 먹고살아야 해."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 그럼, 내가 친구들과 교회 집사님들에게 빌린 돈은 어떻게 갚아요? "

" 그건..."

나는 그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만, '35만 원만 남았다'는 말에 '내가 어려울 때 기꺼이 돈을 빌려준 그들의 얼굴을 이젠 어떻게 보지? 친구들이 다 빚쟁이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서운함과 걱정이 밀려왔지만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우선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말했다.

" 집은 당신이 서둘러 알아보세요!"


< 빚쟁이와 빚 갚기 >

우리가 서둘러 싸게 팔았던 그 집은 몇 달 뒤 두배로 값이 올랐다. 지인의 동생은 그 집을 팔아 서울로 이주하여 새 사업장과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금만 더 버틸 수 있었다면 내 사채도 해결했을 텐데..."

내 앞으로 된 사채 때문에 나와 남편은 많은 수치와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친하던 그들이 남편에게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뿐 아니라, 어떤 이는 남편의 바지에 수도 없이 침을 뱉으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우리는 빚진 죄인으로서 그저 묵묵히 감내하며 사죄했고 끝까지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이들에게는 "빚쟁이가 와도 깍듯이 인사해라."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부모의 일이니 너희는 예의를 갖추고, 무슨 일이 있든지 신경 쓰지 말고 너희 할 공부에 집중해라."라고 당부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내 말에 순종했고 묵묵히 자기들의 할 일에 집중하며 그 시기를 이겨냈다. 부모를 믿고 따른 아이들이 늘 고마웠다.

자기들로 인해 우리 부부가 신경 쓸 일은 절대로 만들지 않았다. 한창 사춘기 예민한 시기였는데도.


나는 그 후 15년 가까이 묵묵히 그 빚을 갚아나갔다. 오직 '하나님 앞에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마음으로,

사업정리 할 때도 빚잔치 하지 않고 물건값을 다 쳐서 갚아 주었듯이, 그들에게 소중한 돈을 나를 믿고 빌려준 그 마음에 감사하며 사채도 그렇게 갚아 나갔다.


우리의 이런 태도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왜 빚을 찾아내서까지 갚아주냐? 사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내 형제들도 내 형편을 잘 몰랐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때의 우리 행동에 후회가 없다.


<쌔리골 산꼭대기 공터 계단 위 뒷집 >

​ 남편은 아이들의 통학로를 걱정해 다대포 대신 시에서 지은 오래된 구호 주택인 괴정 산꼭대기 쌔리골을 택했다. 22만 원을 주고 산 그 집은 도로에서 15분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초등학교를 지나 갓 밭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아파트가 있는 왼쪽 평지 길과 경사를 둥글게 올라가야 하는 오른쪽 길이 나왔다.

왼쪽 길을 조금 가면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그 길은 겨울에도 꼭 등에 땀이 나게 하는 10분 정도 걸리는 계단 길이고 지름길이다.


오른쪽으로 가는 가파른 경사길은 택시가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완만한 경사길이 나오고 약수터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서 약수터길인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돌아가면 넓은 공터가 있다. 택시가 여기서 돌아가는 곳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의 절반 좀 안 되는 넓이라서 쓰레기차도 여기까지 올라와 모아둔 쓰레기를 수거해 돌아나간다..

여기서 지름길인 계단길과 만난다. 그 공터에서 보이는 2층높이의 계단을 올라가면 앞뒤로 여섯 가구의 집이 있다. 우리 집은 가운데 뒤집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부엌을 가운데 두고 방만 두 개 있는 빈집으로, 뒤에는 축대와의 사이에 두세 걸음 정도의 공터가 있었다. 그곳엔 상수도도 전화선도, 개별 화장실조차 없었다.

공동 산수도가 있는 물탱크에 가서 식수등의 물을 길어와야 했다.

수리를 해야만 들어가 살 수 있는 그곳은 도시 속의 산골이었다.


​<윤 목수의 의리와 도둑맞은 건축자재>

​집을 수리하려니 인건비만 8만 원이 든다고 했다. 이제 남은 돈 5만 원은 생활비로 써야 하니 자재를 구할 길이 막막했다.

걱정에 잠겨 있던 남편이 우연히 버스에서 보수동 집을 지어주었던 윤 목수를 만났다.

남편이 과거 공사 때 그를 넉넉히 대접했던 덕분인지, 그는 우리 형편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무상으로 자재를 대주겠노라 약속했다.

우리 부부는 천사를 만난 기분이었다.


​얼마 뒤 윤목수는 약속대로 쌔리골 공터에 시멘트 30포대, 벽돌 500장, 모래 2톤을 내려놓고 갔다.

그런데, 다음 날 가보니 자재의 절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가난한 동네 주민들이 밤새 훔쳐간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은 것이라도 지키기 위해 천막을 덮고 단도리하며 공사를 이어나갔다.

부엌을 삐걱대긴 했지만 마루로 개조하고, 집 뒤 공터에 세 번째 방과 재래식 연탄 부엌을 달아 내었다. 부엌 옆 축대 앞에 수도 없는 빨래터를 만들었다. 비로소 아쉬운 대로 다섯 식구가 생활할 공간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화장실은 옆집을 지나 공터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수리해서 그냥 쓸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남편의 노력으로 수도가 들어왔고 이사 온 지 6년 만에 2차 수리를 했다. 집 뒤 축대 위 언덕에 개별 물탱크를 설치하고 나서야 싱크대와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 수 있었다. 또 난방도 아궁이 난방에서 연탄보일러를 통한 난방으로 개조했다.

세 방을 데워준 하루 여섯 장의 연탄은 우리 가족의 몸을 녹여주었을 뿐 아니라 마음도 감사함으로 채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로부터 6년 뒤인 1985년, 자녀들의 결혼에 맞춰 마지막 수리를 했다. 큰 아들이 같이 살겠다고 해서 낮은 지붕을 위로 올려 며느리의 장롱이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다락도 작게라도 만들어 책 등 묵은 짐을 올려놓고, 낡은 슬레이트 지붕도 새로 갈았다.


​< 나뭇가지 지팡이와 시장사람들의 성금>

​이사 온 지 두 달째, 그동안 남편은 625 참전 때의 허리부상으로 인한 신경통이 재발되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되어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있었다. 나는 고이 간직한 금브로치 두 개를 하나씩 팔아 식구들의 삼시 세끼를 챙기고 아이들 학비도 납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집 뒤 언덕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꺾고 다듬어 지팡이를 만들어, 남편의 손에 쥐여주었다.

​"국제시장 2공구 동생네 가게에 가서 병원비라도 좀 받아오세요." ​


남편은 사업을 정리하면서 자기 그늘 아래 있던 식구들에게 일터를 다 나누어주었다.

남동생은 내 어머니가 남기신 논밭을 팔아 양품점을 냈고, 넥타이 제품을 하던 제부는 남편 지인의 양말 공장에 취직시켰다.

큰 조카에겐 마산등 경상도 거래처를 떼어주었으며, 여동생 부부에겐 광주 거래처와 국제시장 가게를 그대로 이어받아 장사하게 했다. 거래하던 공장들도 남편과의 인연으로 그들에게 물건을 계속 대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 집에 수금한 돈이나 장사한 돈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다, 우리 없이 하는 사업이다 보니 그들의 사업은 오래지 않아 접게 되었고 각자 새직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내 형제들은 우리 그늘에서 벗어나 모두 독립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마지못해 그 지팡이를 짚고 시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남편은 빈 손으로 돌아왔다. 동생이 장사가 안된다며 500원을 내밀기에 차마 받아올 수 없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나는 눈물이 났다. 그의 마음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때 생각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고 말없이 돌아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자존심 강한 남편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은 걸 눈치챈, 동갑내기 친구였던 강 사장이었다.

그는 우리 가게가 있던 1, 2공구 상인들을 독려해 성금을 모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남편을 멀리서만 보았던 잘 모르는 3공구 사람들까지도 돈을 보탰다.


​성금을 전해 받은 남편은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과거 번영회장을 맡아 시장 상인들을 위해 봉사했던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내가 아주 헛살지는 않았구나."

남편은 그날 이후로 힘을 얻었다. 비로소 그 지팡이를 짚고 집 밖으로 나가 동사무소를 드나들며 동네 개선을 위해 앞장서기 시작했다.


​도심 근처임에도 버려진 땅 같았던 쌔리골에 남편의 노력으로 수도와 전화가 들어오던 날,

온 동네는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다들 남편에게 크게 고마워했다.


​<최후의 결단, 8개월의 보따리 장사>

이사 온 지 6개월이 지나자 수중에 돈이 바닥났다. 남편은 아직도 신경통과 사업 실패의 충격으로 사업을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나는 남편이 완전히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며 생활비를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 보따리를 들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내가 벌어서 삼 남매를 키울 자신은 없었다. 어떻게든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따리 장사는 가장을 일으키기 위한 나의 최후의 수단이었다. 장사라곤 해본 적 없는 내가 집에 재고로 남은 고급 란제리 몇 개를 넣은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쌔리골 산길을 내려와 괴정시장 쪽으로 걸어가다 우연히 지인을 만났다. 우리 사정을 들은 그녀는 남자 점퍼가 하나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와 점퍼를 챙겨 그녀에게 판 것이 내 보따리 장사의 시작이었다.


그다음엔 괴정시장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이 자신의 양계장에서 계란 300알을 줄 테니 팔아보라고 했다. 생전 처음 계란 열 판을 머리에 이고 대티터널을 걸어 보수동까지 갔다.

보수동 지인은 선뜻 자기 집을 내주며 사람들이 계란을 살 수 있게 불러주었다. 주문이 오면 나는 멀리 동래 온천장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다니며 계란을 팔았다.

때로는 좋은 깨로 참기름을 짜서 지인들을 찾아다녔다. 가슴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으나 나는 그저 잠잠히 견뎠다.


<남편의 회복과 새로운 시작> 그렇게 내가 장사하며 기도로 살아내고 있을 때, 남편은 점점 건강을 되찾았다. 8개월이 지날 무렵 남편은 기적처럼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게 회복되었다.

나의 고생을 지켜보던 남편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얻으면서 육신의 병도 함께 물러간 것 같았다.


그즈음에 쌔리골 집을 소개해 주었던 서 사장이 제안을 하나 해왔다. 남편에게 월급 2만 5천 원을 줄 테니, 자유시장 본인의 가게에서 자기 아내와 아들에게 장사를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 제안을 수락했고, 나의 고단했던 보따리 장사도 드디어 끝이 났다. 나는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져서 너무나 감사했다. 하나님과 남편에게.

​<5년 뒤의 자백과 고백>

​쌔리골에 산 지 5년쯤 지났을 때,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와 자백을 했다. 그중 하나는 5년 전 훔쳐간 시멘트와 벽돌로 연탄 창고를 지어, 비가 와도 연탄이 젖지 않아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며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상수도와 전화선이 들어오던 날 잔치를 벌였던 동네 사람들, 그리고 자재를 가져갔던 이웃들까지... 그 모진 세월을 기도와 인내와 단도리로 버틴 덕분에 우리는 쌔리골에서 비로소 사람 사는 모양새를 갖추며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