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한 생명을 지켜낸 50일간의 비밀요새

'아내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가정의 문을 다시 열다.

by 남쪽열매

< 쓸쓸한 성탄절 >

보수동으로 이사 온 후, 막내아들을 임신하고 출산하기까지 나는 아직 마음 둘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처에 세 곳의 교회가 있어 주일에 한 번씩 다녀보기도 했지만, 왠지 마음이 끌리는 곳이 없었다.


​1962년, 막내를 낳고 한 달이 훌쩍 넘어 어느덧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좌천동 시절처럼 성탄 예배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네 살 된 딸아이의 손을 잡고 무작정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하나님, 오늘은 어느 교회로 가야 합니까?"

'

< 인연의 시작, 그 작은 아주머니 >

​그때였다.

"예수 믿으시오."

단정하게 쪽진 머리에 수수한 한복 차림을 한 자그마한 아주머니가 내 손에 전도지를 쥐어주었다. 시장 근처에 있는 교회라고 했다.

늘 자갈치나 국제시장 쪽만 다녀서 생소한 곳이었지만, 그분의 곱상한 얼굴과 진솔한 말투에 이끌려 수요일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자세히 보니 꾸밈이 없어 오십 줄은 되어 보였다. 그분이 목사님의 사모님이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사모라는 내색 한 번 없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던 그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첫 예배의 감흥 >

교회는 2층 집을 예배당으로 쓰는 개척교회였다.​설교는 길고 진지하며 힘이 있었는데, 한 시간을 훌쩍 넘기며 내 마음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마음은 더없이 따뜻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 새벽의 적막을 깨는 긴장감> ​

​1965년 3월의 어느 봄날,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만 간간이 들리던 깊은 통금의 시간, 정적을 깨고 우리 집 대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시계 침이 2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아니,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귀 밝은 나는 식구들이 깰까 봐 서둘러 대문으로 달려갔다.

​"누구세요?"

"나야..."

힘겹고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사모님? 사모님 맞으세요?"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담요를 뒤집어쓴 채 비스듬히 몸을 겨우 벽에 지탱하고 서 있는 초라한 여인이었다. 한때 내게 전도지를 쥐어주던 고운 얼굴은 간데없고, 고통과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담을 넘어야 했던 처절한 사연>

​사모님은 담을 넘다 허리를 다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목사님이 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려고 해! 나 찾으러 오면 절대 없다고 해야 해, 제발!"

그 한마디에 나는 너무 놀랐고, 그녀의 불안하고 초라한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세상의 눈길을 피해 그녀가 선택한 곳이 우리 집이었다는 사실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온 가족이 합심한 보호작전>

​그때부터 우리 집의 평범한 일상은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사모님이 머물 아래채 큰방을 비우기 위해 온 가족이 방을 옮기는 불편을 감수했다.

나는 아이들부터 장정들까지 불러 모아 엄격하게 함구령을 내렸다.

"이곳에 사모님이 계시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알겠니?"

교회 사람들이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지만, 신기하게도 식구 많은 우리 집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일까? 아니 하나님의 보호하심이었겠지.


​< 7일간의 헌신적인 간병 > ​ 허리뼈가 부러진 채 눕지도 못하는 사모님을 위해 나는 이불을 층층이 쌓아 배에 받쳐주었다. 그 자세로 엎드려 대소변을 받아내고 식사를 챙기는 고된 일주일이 흘렀다. 그 와중에도 사모님은 나에게 배변수발받는 걸 불편하다며 거절해서 가사 거들던 소녀가 수발을 들었다. 착하게도 불평 한번 안 했던 그 아이가 참 고마웠다.


나는 그 당시 참 바빴다. 남편이 사업을 확장하며 충무동에 새로운 가게를 열었고, 나와 큰 조카가 교대로 근무하며 운영하도록 했다. 그래서 아침식사에 동행한 후 사업장으로 나갔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돌아왔다.


나는 조용한 잠자리와 영양가 있는 식사를 제공하고 맘 편하게 요양하시도록 가족들에게도 교육시켰다, 그리곤 간절히 기도하며 빨리 낫기를 기다렸다. 고맙게도 식구들도 모두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네 살 난 막내아들까지도.

1주일이 지나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남편이 보호자가 되어 부축해서 병원에 가보니, 놀랍게도 그 일주일 사이 부러진 뼈에서 진이 나와 뼈가 다시 붙어 있었다. 의사는 기적에 가깝다면서 누군가 기도를 많이 한 것 같다고 신기해했다. 그 의사는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온 가족이 지극정성으로 간병했던 시간들이 기적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 순전히, 목회자 한 가정을 위하여 >

물론 그 후로도 한동안 누워 온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 혼자 화장실도 다닐 수 있게 거의 회복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식사를 챙기고 사업장에 나가려는데 사모님이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윤집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멈칫하며 말했다.

" 갔다 와서 들을게요. 지금 가게에 나가봐야 해요." 사모님은 나를 앉히며 말했다.

"지금 들어줘. 나가지 말고..." 그렇게 시작된 그 녀의 이야기는 자신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그녀가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열흘이 넘도록 듣게 되었다.


그 사연은 대략 이랬다.

방앗간을 운영하며 농사를 짓던 부유한 아버지의 외동딸이 3남 2녀의 장남이었던 가난한 청년을 만났다.

둘은 결혼했고 남편은 장인을 도와 농사와 방앗간일을 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전도로 부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남편은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기도를 많이 했다. 말씀이 깨달아지고 신기한 능력도 주어졌다. 은사를 받은 것이다.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고 그 설교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소문을 들은 부산에 사는 분의 초빙을 받아 부산에 있는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교회에서도 많은 교인들이 그의 설교에 감동하며 은혜를 받아 날로 인기가 많아졌다. 그러니 그 교회 있기가 불편해졌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따르는 집사 몇 명이 개척교회 핵심 구역장이 되었고 그 교회가 바로 내가 다니는 교회이다.


사모가 된 아내는 매일같이 산에 가서 기도했다. 개척하기 전 교회에 200명을 전도하기도 했다. 전도와 기도에 몰두하다 보니 외모를 꾸밀 맘도 없었다. 그런 사모를 구역장들이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장성한 자녀들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 말을 남편인 목사님도 받아들였고 그것을 눈치챈 사모님이 담을 넘은 것이었다.

내가 겪은 사모님은 전혀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기도와 전도에 열심이었고 다른 것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그분의 전도 덕분에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니까.


사모님의 사연을 들은 나는 처음엔 믿기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일단 아픈 사람을 끝까지 잘 낫게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해 볼수록 어머니와 사모의 자리를 되찾아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한가정을 지켜야 하고 그것이 한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구역장들이나 자녀들도 잘 몰라서 오해한 것이라고 여겼다.


< 목사님과의 약속 >

사모님이 우리 집에 온 지 50일이 지나니 산으로 기도하러 가겠다고 했다. "그동안 50일간 산기도 하고 왔다."라고 집에 말하겠다는 것이다. 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먹을 것을 챙겨드렸다. 단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라고만 말했다.

사모님은 고집부리며 산에 기도하러 갔다.

그러나 산에서 하룻밤 지내고 나서 "무서운 것을 봤어. 네 말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 하며 헐레벌떡 서둘러 내려왔다. 나는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일 돕는 아이를 통해 사모님을 댁에 모셔다 드렸다.


다음 날, 나는 수요저녁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예배를 마친 후 혼자 남아 목사님과의 대화를 요청했다. 사모님에 대한 내 뜻을 전달하려고 맘을 단단히 먹었다.

여기서 나는 "사모님은 그동안 제가 우리 집에서 모시고 치료해 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믿지 않았다. 우리 집 식구가 많으니 거기 있었을 리 없다고 반박했다. 몇 번을 말해도 믿지 않았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경찰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시면 보호자가 제 남편 김집사로 되어있을 거예요. 허리가 부러졌었고, 1주일 만에 기적적으로 붙었다고 했어요."라고 하며 답답한 마음에 방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제야 "그럼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봐." 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죽 말했다. 그리고 나는 목사님께 "저와 약속해 주세요." 하며 세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사모님이 정신병이 아니라고 인정하세요.

둘째, 교회밖에 사모님의 사택을 지어 주세요.

셋째, 자녀들이 어머니를 오해하지 않고 어머니로 공경하게 말해주세요."였다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목사님은 내 말을 듣고 성실히 약속을 이행하셨다. 사모님은 안정된 생활을 하셨고, 잘못한 이들은 다 회개를 했다. 그 후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성인 오천 명, 주일학교 육천 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되었다.

나는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나와 남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 가정의 평화는 어머니가 제자리에 평안가운데 있어야 되고, 남편은 그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나와 우리 가족의 헌신은 단순히 한 사람을 숨겨준 것이 아니라, 무너져가던 한 가정의 명예와 사랑을 복원한 기적이었다. 50년 전 보수동의 그 작은 집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요새였다.

이렇게 보수동에서의 12년, 초라한 전셋집 3년과 2층 양옥집 9년의 삶은 참 많은 일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