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국 신사 남편과 카네이션 클럽의 지혜

삼 남매의 성장을 지켜본 보수동의 나날들

by 남쪽열매

< 나의 보물 삼 남매와 , '제또끼' 장남 >

1964년, 큰아들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나는 학부모가 되었다. 첫아들은 나를 많이 닮았다. 입이 짧아 가려먹고 키가 좀 작은 편인 것이 나를 닮았는데, 별명이 '제또끼(제트기)' 일 정도로 달리기를 잘했던 나의 기질을 이어받아 운동도 등산도 곧잘 했다. 내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인정 많은 아들이었다. 당시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박스로 사다 놓고 별미로 끓여 주곤 했다. 입 짧은 큰애가 라면과 계란말이를 즐겨 먹었는데, 동생들은 형이 더 먹는 것에 불평하지 않았다. 내가 미리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했지만, 내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의 말을 귀담아듣는 예의 바른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 예절교육과 차별 없는 간식그릇 >

우리는 아이들이 어른에게 반드시 존댓말을 쓰게 했다. 부모는 아버지 어머니로 불렀고, 형도 '형님'이라 불렀다.

부산에 와보니 어른에게 반말하는 아이들이 많아 놀랐다. 나는 파평 윤 씨 집안에서 자라며 예절 교육을 엄하게 받았다. 내가 받은 교육을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가르쳤다. 존댓말부터였다. 아이들은 예의 바르고 말씨가 곱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또한 나는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았다. 아들 역할을 하며 자란 나였기에,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었다. 간식을 줄 때도 똑같은 그릇 세 개를 사서 같은 양으로 나누어 담아 각자 먹고 싶을 때 편히 먹도록 했다.

식구가 많은 집이라 자칫 누군가 소외될 수 있었기에, 아이들 몫을 미리 떼어 각자의 그릇에 나누어 주고, 나머지를 장정들과 소녀들이 잘 나누어 먹게 했다. 누구도 서운하지 않게 미리 구별 지어 주었다.


< 주일학교와 국민학교, 빠지지 않는 습관 >

우리 아이들은 일찍부터 교회 유년주일학교에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일학교는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줄 알고 지냈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주일학교처럼 국민학교도 빠지면 안 되는 곳으로 교육시켰고 아이들은 잘 따랐다.


< 삼 남매의 성장 >

그 당시 국민학교는 선행학습이 필수가 아니었다. 첫째 아들이 입학할 때는 자기 이름 쓰고 읽을 줄 알고, 부모 이름만 알면 되는 줄 알았다. 나머지는 입학해서 배우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둘째는 오빠 교과서를 보고 흥미를 가졌다. 이모부나 외삼촌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글씨를 깨우쳤다. 혼자서 미리 공부를 한 것이다. 뭐든 빨리 배우는 것 같았다. 차분하고 생각이 깊고 배우는 것을 좋아했으며, 남동생을 사랑하며 잘 돌보는 어른스러운 딸이었다.

막내는 인물이 훤하고 성격은 유순했다. 형도 좋아했지만 누나를 특히 잘 따랐다. 누나와 소꿉놀이, 병원놀이 등을 하고 함께 책도 읽으며 공부도 하고 잘 놀았다. 혼자 있을 때는 백과사전을 유난히 즐겨 읽었고 한자 옥편을 펴놓고 보는 것도 좋아했다. 세 살 때인가, 여섯 살 된 누나가 자기 한복을 동생에게 입혀주며 예쁘다고 귀여워하니까 좋아하며 가만히 있었는데. 그 모습이 여자 아이처럼 예뻤다.


< 책으로 가득한 집 >

남편은 아이들을 위해 전집을 사다 주었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한 권, 두권 사 오더니 나중에는 전집으로 사 왔다. 그 시절 처음으로 전집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위인전집부터 동화전집, 그림이 많았던 계몽사 학생용 백과사전 10권, 동아출판사 일반용 백과사전 30권, 문학전집등 나중엔 철학전집과 영어로 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여 권까지 사 왔고, 아이들과 남편은 즐겨 읽었다. 집에 책이 가득했다.


< 정서 안정, 엄마의 교육 철학 >

학교에 입학하더니 공부도 잘하고 인기가 있었다. 그 당시는 미리 과외공부를 시키지도 않았고, 나는 공부하라는 말로 부담을 준 적도 없다. 다만 내가 엄마로서 할 일은 생활습관 교육과 음식등으로 건강을 잘 챙기고, 마음이 편안하도록 좋은 집안분위기를 만들어주며 학교생활과 신앙생활을 철저히 잘하도록 만 가르쳤다. 그래서인지 우리 아이들은 가정통신문에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는 평가가 늘 있었다.


< 남녀차별이 있던 시절 >

그 당시에는 학교에도 남녀차별이 있었다. 한 반에 60~70명이 있었고 거의 반반이 남녀로 나뉘었다. 남녀 짝꿍을 하면 한 명 정도만 짝이 없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급장은 항상 남자 중에서 뽑았고, 부급장은 남, 녀 각 1명씩 뽑았다. 큰아들은 자기는 안 한다고 친구를 뽑아주는 아이였고, 둘째는 여자라서 늘 부급장, 막내는 남자 중에도 늘 급장으로 뽑혔다. 둘째가 6학년이 되어서는 전교임원모임에서 부회장으로 뽑혔다. 남자가 회장이고.


< 기운 교복과 건강한 마음 >

둘째는 키가 쑥쑥 커서 반에서도 손에 꼽힐정도로 키가 크고 늘씬했다.

나의 딸은 1학년 때 맞춘 교복을 3학년까지 입고, 키가 커서 새로 맞추었다. 2년쯤 지나니 교복의 소매와 옷의 기장이 거의 한 뼘 가량 짧아졌다. 또 소매는 닳아서 해어졌다. 그 교복을 내가 기우고 다른 헝겊으로 수선해서 졸업할 때까지 입었는데 내 딸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검소하고 마음이 건강했다.


< 잊지 못할 졸업식 >

딸은 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전교임원으로서의 공로상 트로피를 받았고, 6년 개근상, 우등상등 여러 상을 휩쓸었다. 남편은 학부모 대표로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하는 순서를 부탁받았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겸손하게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모범이 되게 잘 키우고, 여유 있는 집인데도 교복을 기워 입힌 엄마와 그 옷을 당당하게 입고 다니며 열심히 학교생활을 한 딸, 그리고 정중하게 감사를 표현한 남편을 언급하며 칭찬과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보람 있었다.

< 학부모 임원 활동과 '삼위일체'교육관 >

아이들이 학급 임원을 맡으며 시작한 <카네이션 클럽> 은 나의 유일한 사회활동이었다. 70여 명의 엄마가 모여 부족한 학교시설을 돕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찾아 나눔과 봉사를 실천했다. 어르신 150분께 속옷을 선물하고 소고기뭇국을 끓여 대접하던 시간은 참으로 보람찼다.

우리 아이들이 다닌 학교는 근처 큰 학교에서 분가한 지 얼마 안 되어 부족한 게 많았기에 학부모의 활동이 꼭 필요했다. 큰 아이 때 결성된 이 모임은 막내가 4학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우리의 방문을 무척 반기고 고마워했다. 참 의미 있고 멋진 시간들이었으며, 그때 만난 인연 중에는 평생을 함께한 각별한 친구도 있다.

당시 우리 집에는 귀한 커피가 있었다. 술을 못하는 남편이 좋아했고 손님대접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 항상 커피와 프리마와 설탕을 1:1:3으로 넣어 30잔 분량의 커피를 만들어 교무실에 보냈다. 오후의 피곤한 시간에 모든 선생님께 대접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아이가 잘 크려면 부모와 교사와 아이가 한마음, 즉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박봉에도 우리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쳐주시는 선생님께 늘 감사했고, 아이들 앞에서도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내 아이만 잘 봐달라고 갖다 바치는 뇌물이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존경의 표시임을 아이들에게도 분명히 가르쳤다.


​<나의 남편, 멋쟁이 영국 신사 >

​나의 남편은 당시 보기 드문 지성인이자 멋쟁이였다. 평양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철학 전집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즐겨 읽고, 영어 실력도 유창해 결혼 전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바둑을 좋아해 동생과 제부, 나중엔 두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주며 여가를 즐겼고, 말도 재밌게 하지만 조용히 사색을 즐길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점잖게 흥이 많은 사람이었다. 독일제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배호의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거울 앞에서 면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국민학교 들어간 딸이 피아노를 배울 때는 오르간을 사다 주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잘 싸우지 않았고, 혹 다투더라도 애들이 다 잠든 뒤에 대화로 풀었다.


그는 여행과 사진 찍는 것도 좋아했다. 우리는 성경 말씀처럼 우리 삶이 '본향을 향해가는 나그네 인생'이라 생각했다. 주신 축복은 나누라고 맡기신 것이라 믿었기에 욕심 없이 베풀며 살았다.

국제시장번영회 회장을 맡아 전국의 명산으로 회원들을 인솔하고 매너가 좋아 사람들 사이에서 ‘영국 신사’라 불렸다.

나는 그가 어디서든 단정해 보이도록 옷을 정성껏 다려 주었고, 나 역시 남편의 사업장 근처를 지나갈 때면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남편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고학년이 될 무렵 대학원에 들어가 새로운 공부를 했다. 경영대학원에서 당시에는 새로웠던 경영진단사과정을 2기로 졸업했다. 요즘으로 하면 경영컨설턴트 과정이라고 한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졸업식에 가서 축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 < 새로운 문물과 나눔의 향기 >

​신제품을 좋아했던 남편 덕에 우리 집엔 전화기, 금성텔레비전과 냉장고, 그리고 전기오븐 같은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이웃들이 우리 집에 모여 김일선수의 레슬링을 구경했고, 우리 전화기를 이웃집이 쓰기도 했다.


​오븐을 처음 들여온 날, 온 가족이 모여 계란 흰자를 거품 내어 카스텔라를 구웠다. 그 고소한 향기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맛이 되었다.


​나는 늘 그것들을 동생들과 넉넉히 나누었다.

함께 나누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

남편은 식구 중 누가 아프면 바로 병원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할 만큼 세심했다.


< 은혜의 시간들 >​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큰 살림을 다 했나?' 싶지만, 잠시 10분만 눈을 붙여도 피로가 풀렸던 것은 이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식구들에게 밥을 한 끼도 거른 적이 없다. 새벽 기차를 타는 조카나 제부, 동생에게도 1인용 냄비에 갓 지은 따끈한 밥을 꼭 먹여 보냈다. 밥 먹는 동안 곁에 앉아 대화하며 그들의 형편을 살피고 또 교육도 시켰다.

그 시간들 그리고 꽃과 나무와 강아지가 가득했던 마당. 그 모든 풍경이 남편이 가훈으로 여겼던 '화목' 그 자체였다. 보수동 2층 양옥집에서의 9년은 그렇게 정성과 나눔, 그리고 사랑으로 꽉 찬 시간들이었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