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보수동 대가족을 먹여 살린 살림의 미학

쌀 한 가마니 반과 김장 100 포기, 그 정성의 기록

by 남쪽열매

​< 새벽 3시, 기도로 여는 하루 >

​나의 하루는 남들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초저녁잠이 많아 밤 11시 전에는 꼭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귀가 밝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눈을 떴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3시면 눈이 떠진다.)

​남편과 나는 매일 새벽, 한 달에 한 번 수금을 위해 지방에 내려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온 가족이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 구역예배까지 참석했다. 주일에는 국제시장 점포도 문을 닫았다. 아무리 대목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수요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선 6시면 점포 문을 닫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교회에 갔다. 도매업을 했기에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고 저녁엔 일찍 퇴근할 수 있어 가능했던 삶이었다. 여름이면 온 가족이 금정산이나 거창으로 사경회를 떠났는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가족 휴가였다.


<지프차 택시 타고 떠난 다섯 식구의 나들이>


이따금 우리 다섯 식구만의 오붓한 소풍도 갔다. 그때는 '시발택시'라는 지프차 모양의 택시를 불러 타고 갔다. 딱 다섯 명이 탈 수 있는 크기였다. 동래에 새로 생긴 금강원 놀이동산과 동물원, 식물원을 구경하러 다니곤 했다.

여름이면 광안리, 해운대, 다대포 송도까지 해수욕장을 두루 다녔다.

한 해는 아이들 땀띠가 심했는데, 남편이 한 달 내내 주중에 매일같이 아이들을 송도해수욕장에 데려가 물놀이와 모래찜질을 시키고 멍게, 해삼을 사 먹였다.

신나게 놀다 보니 한 달 뒤 땀띠가 깨끗이 나았는데, 아이들에게는 약보다 좋은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 장정들의 아침을 차리는 집념의 살림 >

​새벽 예배를 마치고 오면 아침 6시. 그때부터 7시까지 시장으로 나가는 장정들의 아침을 차려냈다. 우리 집 식탁에는 늘 3명에서 7명의 장정이 함께했다. 한 달에 쌀 한 가마니 반이 뚝딱 없어지던 시절이었다.


​음식은 반드시 내 손을 거쳐야 직성이 풀렸다.

두되 반의 콩을 삶아 예쁘게 메주를 만들어 간장과 된장을 담갔고, 태양초 고추를 하나하나 닦아 고추장을 만들었다.


< 온 동네에 진동하던 멸치 젓국 다리는 냄새 >

3월이면 자갈치시장에서 싱싱한 생멸치를 큰 상자로 두 상자씩 샀다. 한 상자는 두동이 분량이었다.


물 세동이가 들어가는 큰 항아리 두 개에 생멸치를 소금으로 버무려 밀봉해 5개월간 푹 삭혔다. 9월이 되면 멸치 액젓을 따로 떠두고, 나머지 육젓은 찜통에 물과 함께 넣어 푹 삶은 후 채에 바쳐 멸치 젓국을 다렸다. 이때는 온 동네가 멸치 다리는 냄새로 가득 찼다.


그 정성으로 김장철이면 배추 100 포기를 절였다. 남편이 좋아하는 동치미와 새끼 조기를 듬뿍 넣은 김치를 큰 항아리에 가득 채웠다. 총각김치, 깍두기 그리고 짠 김치도 담았다. 짠 김치는 충청도식 김치인데 무를 소금에 절여 놓았다가 봄부터 여름까지 먹는 김치이다. 동치미는 구정 전에 먹어야 하는데, 짠 김치는 그 후에 먹을 수 있는 요긴한 김치이다. 김치를 버무릴 때는 빨리 먹을 것은 삼삼하게, 설 지나고 먹을 것은 간간하게 양념을 넣고 버무린다.


김장 날은 돼지수육과 겉절이로 저녁을 먹었다. 다들 어찌 그리도 잘 먹던지! 내가 만드는 김치를 모두 참 좋아했다. 그리고 집집마다 넉넉히 나누어 주었다.


<평소의 상차림>

나는 다른 요리도 빠르고 맛있게 잘했다. 그리고 남편이 종종 외식을 시켜 주었는데, 그때는 곰곰이 맛을 봤다가 집에 와서 만들어보곤 했다. 처음으로 일식집에서 감자샐러드와 유부초밥을 먹어본 후에는 집에서도 계속 만들어 먹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누구나 좋아해서 자주 만들었다.


국은 남편이 맑은 국을 좋아했고, 생선은 조기 구기, 갈치구이, 빨간생선조림, 고등어조림, 김치찌개, 생태국, 북엇국, 대구 지리에 민어탕까지 자갈치시장에서 사다가 굽고 조리고 찌고 끓여서 먹였다. 갖은 나물과 멸치볶음, 북어무침 오징어채 부침, 그리고 콩자반은 늘 식탁에 있었다.


<명절 풍경>

명절이면 며칠 전부터 음식 준비를 했다. 설날이 다가오면 가래떡을 빼놓고 적당히 굳혀 썰어놓는다. 그리곤 정육점에 가서 사골을 넉넉히 샀다. 기억으론 7만 원어치를 사면 온 식구가 다 실컷 먹었던 것 같다. 사골에 사태 등의 고기 살을 넣고 같이 푹 끓여서 들통에 담기를 3번 한다. 그것을 섞으면 묵처럼 진하고 뿌연 사골국이 된다. 거기에 떡국떡을 넣고 계란과 김과 양념한 살코기 등의 고명을 올려 명절 기간 내내 온 식구들을 먹였다. 내가 좀 힘들고 돈이 들어도 1년에 적어도 두 번은 꼭 사골곰국을 만들어 먹였다.


다음엔 큰 조기를 굽고, 갖은 나물을 무치고 잡채를 만든다. 불고기와 갈비찜도 양념장에 잘 재어둔다. 여럿이 둘러앉아 동그랑땡과 동태 전을 부치고, 튀김도 큰 고구마를 10개 정도, 야채와 오징어 등도 푸짐하게 튀겨 채반에 깨끗한 달력을 깔고 가지런히 담아놓았다.

또 남편이 좋아하는 인절미를 비롯해서 모두 배기 등을 떡집에 맡기고, 약밥, 유과, 강정, 식혜, 수정과 등은 내가 직접 만들었다.

추석에는 애들까지 다 같이 모여 밤새워 송편을 만들기도 했다. 동지엔 동지팥죽도 큰 솥에 만들어야 했고, 호박범벅도 한번 먹이려면 넉넉히 푸짐하게 만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다양한 음식을 엄청난 양으로 만들어서 먹였다. 내가 요리하고 있으면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맛을 본다. 그렇게 맛본다고 먹는 양 만해도 보통 집의 명절 음식 정도의 양이었을 거다.

그래도 나는 맛보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먹고 싶을 때 실컷 먹이라고 남편은 늘 말했다. 나도 그렇게 줄 수 있는 게 좋았다.

그 시절, 준비하느라 힘들었어도 동생들이 함께 만드니 즐겁기도 했고, 맛있게 먹는 식구들을 보면 늘 기분이 좋고 새 힘이 났다.


명절마다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넓은 안방에 모여 윷놀이를 했다. 누군가 커다랗게 윷판을 그리고 흑백 바둑알 등으로 말을 준비하는 동안, 한쪽에서는 고이 챙겨둔 윷가락을 가져왔다. 그때는 우리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윷가락을 사용했다. 어른 아이, 남녀 할 것 없이 편을 가르고 나면 집안은 금세 북적이는 경기장 같았다.


그 소란스러운 잔치 한복판에서,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아이들과 형제들의 얼굴을 살폈다.

언니의 구수한 입담은 모두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고, 흥이 넘치는 막내 여동생이 윷을 던지며 외치는 기합소리는 우리를 긴장시켰다가 이내 탄성을 내뱉게 했다.


"뭐여? 또 개여? 워째 맨날 개만 나온디야?"

툭 던지는 언니의 한 마디에 구경하던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나도 어느새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언니 비켜요. 나 던질 껴!

모나와라~슉!! 워메, 모나왔어!

자, 또 던진 다이~ 워메, 이번엔 윷이여! 윷!"

막내 여동생은 박수를 치며 윷가락을 높이 던졌고,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윷놀이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자기 팀이 지기라도 하면 속상해서 입이 쑥 나와있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이긴 팀이 판돈으로 과자를 잔뜩 사 와서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었던가? 아이들의 뾰로통한 얼굴이 금세 환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넉넉해졌다.


어느 설날에는 밤새 윷놀이를 즐기다 보니 어느덧 새벽이 밝아와, 그 길로 다 같이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기도 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가족들의 온기는 여전히 따스하게 남아 있었다.


​< 살림은 마음을 닦는 일 >

​나는 살림이 단정해야 마음도 단정해진다고 믿었다.

수저 하나도 제 위치에 놓아야 했고, 음식은 잘 어울리는 그릇에 보기 좋게 예쁘게 담아냈다. 행주는 하루가 끝나면 깨끗하게 삶아 널어두었다.


​빨래를 널 때도 나만의 규칙이 있었다. 양말은 짝을 맞춰 널고, 속옷은 뒤에, 겉옷은 앞에 나란히 줄을 세웠다. 그 당시 속옷은 면이어서 꼭 폭폭 삶아 입혔다.


설거지한 그릇을 엎어둘 때도 물이 잘 빠지도록 가지런히 두었고, 물기가 빠지면 마른행주로 닦아 찬장에 넣었다. 우리 집 일을 돕던 소녀들에게도 야단치는 법 없이, 내가 직접 빤 걸레를 건네며 몸소 본을 보였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정성껏 해서 먹이고, 옷은 단정한 옷들을 철마다 적절히 사주며, 빨래는 깨끗이 세탁해서 반듯이 개어 각자의 옷장에 넣어주었다.

몸은 규칙적으로 공중목욕탕에 보내 청결하게 했고 거주하는 방도 깨끗이 청소해 두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식구가 많아도 큰소리로 싸우거나 떠들지 않았다. 우리 부부부터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필요하면 조용조용 대화하며 해결했다.


바깥일은 남편이 집안일은 내가 주도했다.


남편은 체질상 술을 전혀 못했다. 그래도 매년 포도주를 담았는데 주로 동생이나 조카들이 조금씩 먹는 정도였다. 그때는 교회에서 술과 담배를 금하던 시대다. 포도주는 성찬식 때 쓰기 위해 매년 교회에서 담갔는데 그때 우리 집에도 좀 담갔던 것이다. 포도를 큰 광주리로 2개를 사 오면 먼저 온 식구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고 먹게 했다. 남은 한 광주리로 소주 없이 설탕만 버무려 포도주를 담갔다. 다들 참 맛있다고 했다


​< 꽃과 나무, 그리고 강아지들이 머물던 마당 >

​대가족을 살피고 세 아이를 키우느라 특별한 취미를 가질 여유는 없었지만, 마당 한편에 화단을 가꾸는 즐거움은 놓지 않았다. 채송화, 나팔꽃, 샐비어, 맨드라미가 계절마다 피어났고 붉은 색깔의 화초 호박과 바가지 만드는 박과 수세미 열매가 익어갔다.


​우리 집 마당엔 늘 강아지들이 있었다. 진돗개부터 셰퍼드, 스피츠, 귀여운 똥개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식구가 많으니 먹이도 늘 풍성했다.


예방접종과 목욕도 거르지 않았다. 개를 목욕시킨 날이면, 아이들은 깨끗해진 강아지를 방으로 데려와 복작거리며 놀곤 했다.


화초를 키워도 잘 자라고, 강아지를 키워도 잘 컸다.

물론 우리 식구들도 모두 건강하게 잘 지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었다. 은혜였다. 남편이 가훈으로 여기는 "화목"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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