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에서 온 동생 가족과 광주 충장로의 불황
< 바로 아래 동생 가족도 부산으로 >
1970년, 내 바로 아래 동생이자 어머니의 셋째 딸이 서천에서 부산으로 왔다. 동생 곁에는 남편과 어린 아들, 그리고 홀시어머니가 있었다. 그때 내 나이 마흔, 남편은 마흔다섯이었고 우리 세 아이는 열네 살, 열두 살, 아홉 살로 한창 자랄 때였다.
동생은 무엇보다 여섯 살 아들의 교육을 위해 부산으로 오고 싶어 했다. 남편에게 몇 차례나 간절한 편지를 보내왔고, 평소 마음이 따뜻했던 남편은 무리인 줄 알면서도 그 간곡함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네 식구가 우리 집으로 왔고, 남동생이 신혼시절 살다 분가한 2층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우리를 아끼는 지인들은 "그동안 거둔 식구가 이미 너무 많은데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만류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그들 손에는 단돈 8만 원뿐이었다. 모두가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 새로운 사업 >
남편은 동생 가족의 자립을 위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하던 사업에 더해 '넥타이 제조'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동생이 모시 짜는 기술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제부가 도안을 그려 천을 자르면 동생이 바느질해 넥타이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 사업은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오직 동생 부부가 스스로 설 수 있게 하려고 남편이 고안해 낸 것이었다. 여유 자금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걱정이 앞섰지만, "할 수 있다"라고 장담하는 동생 부부를 믿어보기로 한 남편은 계획을 밀어붙였다.
남편은 기술자를 불러 두 달 반 동안 월 3만 원씩 봉급을 주며 제부에게 재단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우리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아 재봉틀을 사고, 천을 주문 제작하고, 직원도 두 명 더 고용했다. 동생이 거주하는 우리 집 2층에 작업실도 마련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드디어 제품을 만들었고 우리는 거래처인 광주로 다른 물품들과 함께 넥타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 늘어나는 반품에 휘청거린 희망 >
그런데, 물건을 보내도 광주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경기가 나빠 물건이 안 팔린다는 소리만 들리고, 물건값 대신 날짜가 한참 남은 어음만 보내왔다. 남편은 공장에 줄 천 대금을 막느라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엎친데 덮친다'라고 1년쯤 지나니 물건이 자꾸 되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원인이 기가 막혔다. 제부의 손이 거칠어, 넥타이를 만들 때 그 손마디에 고운 비단 천이 긁혀 하자가 생겼던 거다. 그 상처 입은 넥타이들이 고스란히 빚이 되어 돌아왔다.
수금을 하러 광주에 내려가면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래처 사장들이 돈을 안 주려고 가게 명의를 딴 사람으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내 물건이 빤히 진열되어 있는데도 '주인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에 돈 한 푼 못 받고 돌아서야 했다.
< 사채로 막으려 했지만... >
늘 혼자 수표 막으러 다니며 끙끙 앓던 남편이 어느 날 내게 물었다.
"당신 혹시... 여유 돈 좀 있어? 급히 막아야 할 수표가 있는데..."
나는 평생 남편 몰래 딴 주머니 차 본 적이 없다. 남편이 내 형제들을 지극정성으로 돕는데, 내가 따로 돈을 챙기면 안 된다고 믿었다.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십일조 드리고 살림 살면 모을 돈이 어디 있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민 끝에 학부형으로 만나 친구가 된 지인에게 넌지시 형편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평소 우리 부부의 성실함을 믿어준 그녀가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때는 잠시만 버티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사채를 얻어 남편에게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2부, 3부 이자를 줘가며 2년 가까이 버텼지만, 사업은 점점 어려워졌다.
< 기름파동과 어수선한 세상, 그리고 그림자 >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가 겪은 고통은 단순히 제부의 실수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라 전체가 기름파동(석유파동)이라며 물가가 무섭게 치솟고, 세상이 참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나라에서 사채를 못 쓰게 막아버리니 시장에 돈이 돌지 않았고, 외상으로 물건 주던 상인들이 줄줄이 넘어갔다.
우리 남편처럼 법 없어도 살 사람들은 그 거친 파도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남을 도우려 시작한 일이 도리어 우리 집 기둥뿌리를 흔들고 있었다.
이러다간 새 사업 시작하며 담보로 잡았던 우리 집이, 은행에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토록 당당하던 남편의 어깨도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
그 모진 불황의 그림자가 우리 부부 앞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 참고 : 당시의 시대적 상황 >
* 8.3 사채동결(1972년) : 당시 기업과 상인들은 은행보다 사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2년 8월 3일, 정부가 기업의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 '사채동결 긴급명령'을 내리면서 시중의 돈의 흐름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돈이 돌지 않자 물건을 외상으로 주고받던 충장로의 도소매 상인들 사이에서 연달아 부도가 발생했다.
거래처들이 어음을 끊어주고는 제때 결제하지 못해, 정작 성실하게 물건을 공급하던 공장이나 중간 도매상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 유신 선포와 긴축(1972년):10월 유신 선포 이후 사회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통행금지와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 등 청년 문화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자, 밤늦게까지 이어지던 시장의 활기가 꺾였고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되었다.
* 제1차 석유파동(1973년): 오일쇼크로 물가가 폭등하자 넥타이나 고급 란제리 같은 잡화 소비가 급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