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네 여섯 식구도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어느 날, 넷째가 우리 집에 왔다.
그녀는 본가에 네 명의 식구를 두고 왔는데, 우리 집에서 20일간이나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남편인 형부에게 드디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형부, 남편이 아직 취직을 못했어요.. 더 이상 이력서 낼 곳도 없대요...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워요... 부산에 남편을 보내면 안 될까요?"
그 당시 우리는 남편의 피나는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사업이 다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서 이미 늘어난 식구들을 위해 보수동 골목 안 전셋집 근처에 우리 집을 새로 살 수 있었다.
대지가 75평에 지어진 단층집인데, 마당을 사이에 두고 위채와 아래채로 나뉘어 있었다.
위채에는 우리 다섯 식구가 살았고, 아래채에는 남동생과 조카들, 그리고 가사를 배우는 소녀의 방이 있었다.
그 집에 2년쯤 살다가 헐고 2층 집으로 다시 지었는데, 동생의 이 말을 들은 것은 아직 새집을 짓기 전이었다.
그리고 아직 사업이 완전히 자리 잡히기 전이기도 했다.
동생은 여자로선 막내이다.
결혼해서 고향 근처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남편과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막내 처제인 내 동생이 인정 많은 내 남편에게 부탁한 것이다.
" 애들 아빠를 부산에서 받아주세요."라고.
이것은 동생네 생활비를 책임져달라는 뜻이었다.
"처제, 얼마를 보내주면 생활이 되겠어?"
동생의 대답을 들은 남편은 안쓰러운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결혼과 장롱>
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흥이 많고 낙천적이며 곱상했다. 결혼 적령기가 되자, 고향 근처에 사는 말수가 적고 선비 같은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통해 중매가 들어왔다.
1남 3녀의 외아들로 농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했다. 그 지역은 본래 모시로 유명하다. 시아버님도 모시와 관련된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 얼마 뒤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딸로서는 막내인 그 동생이 결혼할 때, 나는 혼수를 정성껏 준비해 주었다. 남편도 막내 처제에게 후회 없이 잘해주라며 나에게 결혼 준비 자금을 넉넉히 주었다.
나는 혼수로 동생이 해달라던 장롱 외에도 그릇, 옷과 옷감, 요 와 이불, 그리고 자주 갈아 끼울 수 있게 여분의 이불 홑청(이불솜을 씌우는 겉싸개) 등등 남부럽지 않게 바리바리 준비해서 고향으로 보냈다. 제부가 쓸 잉크병과 펜 놓는 그릇까지.
참, 한 가지 아직도 기억나는 전해 들은 말이 있다.
동생 시댁을 안 가보고 혼수를 장만하는 바람에,
시골 초가집의 처마가 낮아 장롱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방문을 위로 크게 키우는 공사 후 신혼 방에 장롱을 넣을 수 있었단다. 당시엔 흙집이어서 흙벽을 잘라내어 키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나와 남편은 동생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풍성한 결혼식을 치르도록 힘썼다.
오직 잘 살기를 바라는 엄마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제부는 결혼하고 좀 있다가 군대에 갔다. 제대 후 취직을 해야 하는데,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인지 농사지을 마음은 없었나 보다.
동생 말에 의하면 공무원이나 사무직으로 취직하려 했는데 계속 잘 안되었단다. 그 당시 동생의 가족은 몇 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지 외에 시어머니와 딸 둘, 그리고 부부, 총 5명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동생이 제부의 부산행을 형부에게 부탁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결혼하고 8년이 지나 부산으로 이사 올 때 보니, 혼수로 보낸 이불, 옷감 등이 다 아이들 옷과 시어머니 옷 등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생의 옷들은 거의 낡아 입을 수 없을 정도로 해져 있었다.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 남편은 또 얼마나 처제를 안쓰러워했겠는가!
<제부의 부산행, 그리고 1년 후>
동생네는 제부가 먼저 부산 우리 집으로 왔다.
1년을 우리 집에서 남동생, 조카와 함께 숙식하며 국제시장에서 일을 배웠다. 물론 생활비는 우리 가 본가로 보내주었다.
제부가 부산 온 후 동생은 아들을 낳았다. 나는 아기 지저귀 등 필요한 용품들을 넉넉히 준비해서 동생에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제부에게 한 달에 두 번은 꼭 휴가를 보내주었다.
젊은 부부에 대한 남편의 배려였다.
제부는 말이 없고 느긋하고 사교적이지 않아 장사에 소질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집과 자존심은 강한 사람이었다. 이를 주변에서 지켜본 남편 친구들은 " 김 사장, 그 사람은 장사할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하며 걱정했다.
제부가 우리 집에서 큰 조카와 한방을 쓰며 지낸 지 1년이 되자 동생이 부산에 와서 울먹이며 말했다.
"형부, 혼자서는 시골에서 못 살겠어요. 우리 가족도 부산에 오면 안 될까요?"라고.
그 사이에 또 넷째를 임신 한 처제의 눈물에 내 남편은 또 허락해 주었다. 지인들의 만류도 못 들은 척하고
나는 인정 많고, 평양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는 남편의 결정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 저희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다섯 식구가 올라와 여섯 명의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동생이 살집을 새로 장만해야 했다.
1년도 안되어 일곱 식구가 될 예정이었다.
대식구다!
제부는 전 재산이 3만 원이라고 내놓았다.
나는 동네를 잘 아는 교회 사모님께 집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제부가 내놓은 3만 원에 우리가 4만 6천 원을 보태어 7만 6천 원에 적당한 전셋집을 구했다. 물론 살림도 새로 다 장만해 넣어 주었다.
부산은 피난시절의 임시수도였다.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많다 보니 산 위에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산 중턱에 도로를 내게 되었다. 일명 산복 도로다.
그 산복 도로와 평지 사이에 있는 곳에 있던 집이었는데 30평에 방이 4개였다. 그 정도 크기의 집을 평지에서는 비싸서 도저히 얻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사 온 지 1년 후에는 살고 있던 전셋집을 13만 원에 자가로 구매하게 도울 수 있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에 새로운 산복 도로가 그 집을 지나면서 생기게 되었다. 그때, 보상받고 남은 땅에 2층으로 집을 지어 그곳에서 교회 다니며, 아이들 다 잘 기르고, 결혼으로 분가시키고 손주들도 키워가며 지금까지 두 부부가 잘 살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2 되 주전자로 배달된 내가 끓인 미역국>
임신한 몸으로 부산으로 이사 온 동생은 우리 집이 새로 지어지고 난 후 출산했다. 훤하게 잘 생긴 아들이었다. 부부가 다 인물이 좋으니 아이도 예뻤다.
나는 매일 저녁에 동생을 위한 미역국을 끓였다
그 당시 대략 1966년 즈음에는 가정집에서는 주로 연탄 불로 조리를 했다. 그러나 많은 식구에게 새벽부터 저녁까지 식사를 빠르게 제공해야 하니 연탄 불로는 감당이 안 되었다.
그래서 가스통에 연결된 화구가 있는 조리기구를 샀다. 가정에서 쓰는 경우는 드물었고 주로 식당에서 많이 쓰는 도구였다.
나는 동생을 위한 미역국을 온 식구가 먹을 양으로 넉넉히 끓였다. 그랬더니 남편은 식당용 큰 가스불 조리기구를 사다 주었다.
나는 이렇게 미역국을 끓였다.
동네 방앗간에서 좋은 깨로 직접 짜온 참기름에, 동네 정육점에 부탁해서 구한 좋은 소고기를 큰솥에 잔뜩 넣고 달달 볶는다.
거기에 자갈치시장에서 사 온 최상의 산모용 미역을 넉넉히 불려 고기와 함께 더 볶는다.
그 솥에 물을 가득 붓고 직접 달인 국간장을 넣고 간을 한 후 한참을 푹 끓인다.
집안 가득 구수한 미역국 냄새가 가득 퍼질 때쯤, 펄펄 끓는 미역국을 끄고 식혀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식힌 미역국을 2 되(약 3.6L) 용량의 주전자에 담는다. 그 당시 가사 배우는 소녀가 힘이 좋았다. 그 아이가 매일 동생 집으로 미역국을 들고 배달했다. 2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제부는 우리 집에 와서 먹더라도 동생의 시어머니와 애들 셋까지 먹어야 하니 넉넉히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소녀가 아침에 너무 바빴다.
당시에 일 배운다고 고향에서 온 조카가 한 명 더 몇 달째 우리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조카였다.
그날은 동생 미역국을 그 조카가 배달해 주게 되었다.
다녀오더니 그가 나보고 말했다.
"고모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이 큰 살림을 사는 중에도, 어떻게 매일 미역국을 그렇게 끓여서, 20일이나 동생에게 보내시나요?"
내가 극성맞아 보였나? 나는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했다.
몸조리 후에 동생은 자주 우리 집에 왔고 음식은 항상 넉넉히 해서 여러 집이 나눠먹었다. 내 딸이 초등학생 때, 우리 집에 놀러 온 동생의 아기를 종종 돌보기도 했는데, 딸 옷에 응가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