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우리 집 밥상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남동생과 언니의 아들들, 부산으로

by 남쪽열매

보수동 2층 양옥집에서 보낸 9년 동안, 우리 집 식탁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함께 밥을 먹고 하루를 나누는 '식구'가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 막내, 남동생 >


가장 먼저 부산으로 온 사람은 막내인 남동생이었다. 내가 둘째를 낳고 1년쯤 지났을 때, 남편이 동생을 부산에서 공부시키겠다며 데려왔다.


남동생은 중학교 2학년부터 다시 시작해서 고등학교까지 마쳤고, 남편은 대학 진학을 권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동생은 대학 진학에 뜻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겠다며 여자친구를 데려왔다.


갑작스럽고 낯선 동생의 태도에 나는 크게 놀랐다. 그날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생겨 '구심'을 늘 가지고 다녀야 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는 그의 뜻을 존중했다. 결혼을 시켜주었고 우리 집 2층에 신혼방을 차려 같이 살았다. 그 후 조카의 출산을 돕고, 분가해서 살며 세 아이의 아빠가 되기까지, 부모의 마음으로 그 가정을 돌보았다. 열 살이나 어린, 태어날 때부터 유독 각별했던 동생이었기에, 남편과 나의 기대와 애정은 그만큼 깊고 아낌없었다.


남동생은 조용하고 다정한 성격에, 사람을 좋아했다. 인물도 아버지를 닮아 준수하고 서글서글해서 장사도 꽤 잘했다.


아이들도 외삼촌을 잘 따랐다.

최근 어느 날 딸이 말했다,

"어머니, 제 인생 첫 기억은 네 살 때인데, 어머니가 병원에서 용성이 낳은 날 저녁이에요. 외삼촌이 누워서 오빠랑 나에게 팔베개를 해 주었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날은, 내가 병원에서 밤새 진통을 겪고 다음 날 막내아들 용성이를 낳은 날이다. 학교를 마친 남동생이 병원에 들러 아기를 보고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남편은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광주에 내려가 있었고, 내 출산 일도 잊은 채 목표한 수금액을 채우려 분주했던 그때.

나는 두 아이를 남동생과 집안일을 돕는 아이에게 맡긴 채 병원에 누워있었다.


초라한 전셋집에는 첫째 아들 장성이와 둘째인 딸 남실이가 집안일 돕는 언니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아기를 보고 돌아온 내 남동생이 애들과 같은 방에 있었다.

딸이 기억하는 그날은 쓸쓸한 공기와 어스름한 불빛이 감도는 어둑한 초저녁이었단다..

내 남동생은 아이들에게 팔베개를 해준, 몸을 모로 누워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단다.

"내일이면 엄마가 동생 데리고 오실 거야."라며 아이들을 토닥여 주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쓸쓸함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외삼촌 덕분에 잠을 잘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딸은 회상했다.

"어머니, 그때 제가 네 살, 오빠가 여섯 살 때니까. 외삼촌은 겨우 스물두 살이었겠네요?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인데... 의젓했던 것 같아요."

누추한 전셋집에서 조카 둘을 제 팔에 누이고 토닥여 주던 남동생의 모습이 내 아이의 첫 기억이라니!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참 다행이다 싶다.


그 외에도 내 딸이 국민학교 2학년쯤인가엔 내 딸의 방학 숙제로 식물채집을 같이했단다. 야생화를 뿌리째 뽑아 흙을 살살 털어냈다.

그것을 정성껏 스케치북에 붙이고, 그 옆에 똑 같이 그렸다. 그 후 그림 도감에서 이름을 찾고 특징 등의 설명도 기록했단다.

외삼촌이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쓴다고 내게 자랑하며 보여주었다는데, 나는 바쁜 일이 많던 때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남동생은 아버지를 9살에 여의고 어머니와 4명의 누나와 자형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결국, 지병으로 40대 중반에 먼저 천국으로 떠났다... 모두가 그리도 기다리다 만난 남동생이었는데, 그리 빨리 갈 줄은 정말 몰랐다... 나의 아픈 손가락.


그러나, 남은 가족들은 남편과 아빠의 빈자리를 잘 이겨내고, 자기 몫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동생도 천국에서 행복하기를 늘 기도한다.


< 언니의 세 아들과 늦둥이 딸 >


이어 언니의 큰아들이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내가 막내아들 용성이를 낳고 1년쯤 지난 후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았다. 남편은 국제시장과 광주 거래처에 동행하며 일을 가르쳤다. 밤에는 천자문과 주산 등도 직접 가르치며. 삶을 살아낼 힘을 주었다.

그 후 조카는 같은 교회에 다니던 아가씨와 중매로 결혼해 세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는 우리가 나눠준 사업을 접고 출판업을 하며 부산에서 터를 잡고 잘 지냈다.

그는 명절마다 꼭 찾아와 고마움을 표현했다. 남편이 아들처럼 보살펴준 것에 대한 감사표현인 것 같다.

아쉽게도 그는 회갑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천국에 갔다. 그렇게 단단하고 건강했는데. 그의 세 아들 중에는 목회자도 있고 그 아내도 신앙이 좋아 꿋꿋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언니의 둘째와 셋째 아들도 이 시기에 부산에 왔다. 둘째는 형과 함께 아래채 방에서 머물렀는데, 국제시장에서 일을 배우며 어른이 되어 갔다.

셋째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에 와 지인의 사업체에서 숙식하며 보조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청춘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세 살 난 늦둥이 딸을 데리고 약 8개월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다. 큰아들이 군에 입대한 뒤였다. 고향에서는 나이 든 남편이 넷째 아들과 다섯째인 딸을 돌보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그 가족의 생활비를 매달 책임졌다.


그 시절,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삶의 무게가 있었다. 나와 남편은 그 무게를 조금씩, 때로는 힘겹게 나누어 들었다. 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