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흔다섯, 믿음이 일궈낸 기적(최종회)

시련 끝에 찾아온 눈물겨운 축복들(전반축약본)

by 남쪽열매

※ 이 글은 종이책 출간을 위해 전반부가 기존분량의 1/4로 축약되었습니다. 축약된 내용은 추후 종이책에 온전히 담길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 멈춰버린 일상과 10장의 졸업장 >

2020년 코로나19로 10년을 한결같이 다니던 노인대학이 문을 닫았다. 졸업장이 10장이나 되는데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니 마음이 참 허전했다. 복지관에서 매일 점심거리를 나눠주었지만, 사람 온기가 그리운 적적함은 쉽게 달래 지지 않았다.


< 세 손녀가 꾸민 해운대 바다 위 깜짝 생일 파티 >

그해 여름, 세 손녀가 회비를 모아 해운대 바닷가 콘도를 마련했다. 돌고래와 하트 풍선으로 파티장을 꾸며놓고 90세 생일을 깜짝 축하해 주었다. "할머니, 사랑해요!" 하며 차례로 안아주던 그 순간, 나는 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할머니였다.


< 억울함을 씻어낸 승소와 가족의 겹경사 >

2021년에는 기쁜 소식이 연달아 쏟아졌다. 큰손자가 국내 최대 자동차 회사 공채에 합격하더니, 4월엔 3년 2개월의 긴 싸움 끝에 막내아들의 부당해고 소송 승소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들과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억울함을 씻어낸 그날의 통쾌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8월엔 객원교수 기간을 채운 후 전임교수 공채에도 합격하니, 그야말로 축복이 넘치는 한 해였다.


< 자식들의 발자취를 따라 넓어진 테레비(TV) 속 세상 >

방송기자인 막내아들, 기독교 테레비 설립을 주도한 사위, 종편 방송국 PD가 된 첫째 손녀 덕분에 나는 매일 뉴스를 꼼꼼히 챙겨보게 되었다. 어떨 때는 젊은 자식들보다 내가 먼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아 깜짝 놀라게 할 때도 있었다.


<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가 된 딸 >

2022년, 회갑이 넘은 딸이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에 합격해 유치원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미소 띤 딸의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 팔베개를 하고 누워 구수한 이야기를 듣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 큰아들의 고난과 형제들의 우애 >

그해 4월, 큰아들이 직장 스트레스로 쓰러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뇌경색으로 오른쪽 몸이 불편해진 아들 곁에서, 딸은 그 자리에서 병원비를 보냈고 막내아들과 손녀들도 힘을 보탰다. 고난 앞에서 말없이 서로의 손을 맞잡는 자식들이 눈물겹게 대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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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와 자서전의 시작 >

2023년 여름, 네 번째 해운대 여행이 끝나고 나는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 딸은 한 학기 동안 유치원에 다니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활동을 했다. 내가 확진이 되니 혼자 남아 서울에 올라가지 않고 간병을 도맡았다.

내가 확진받기 전 나와 함께 밥 먹고 안아주고 했던 둘째 손녀가 서울에 올라가서 확진 판정이 났지만 딸은 나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지 못했다. 혼자 투병하고 있을 손녀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내가 회복이 되고도 식사도 잘 못하고 기운을 차리지 못하자, 딸은 하반기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휴직하고 매달 부산에 내려와 나를 돌보았다.

이때 나는 기운이 없는 중에도 나의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했다. 늘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딸은 그때 마음으로 나의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딸은 같이 지내며 내가 좋아할 만한 먹거리를 찾아 제공해 주며 정성을 다했다. 딸이지만 참 고마웠다.


< 코로나 시기의 새로운 친구, 영탁 >

적적한 코로나 기간, 나에게 큰 위로와 즐거움이 되어준 것은 '미스터트롯'이었다. 딸이 알려주어 보기 시작했는데, 화면 속 가수들의 절절한 사연에 함께 울고 웃으며 어느덧 푹 빠져버렸다. 그즈음에는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면 나는 온통 미스터트롯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 정도로 '미스터트롯'은 내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특히 대중음악 기획사에서 젊은 가수들의 음반을 담당하는 막내손녀의 마음이 느껴져 무대를 더 눈여겨보았다. '우리 손녀도 저렇게 애쓰는 가수들을 뒤에서 챙기겠구나' 싶은 마음에, 내 손녀가 저 실력자들을 가려내는 심사위원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려보기도 했다.


수많은 가수 중에서도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이는 영탁이었다. 딸이 누가 제일 좋냐고 물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영탁이라고 답했다. 그의 시원시원한 노래 실력과 환하고 밝은 웃음은 아흔 노년의 삶에 큰 위로가 되었다.


< 첫 손자의 결혼식, 그리고 예기치 못한 시련 >

2024년 12월 중순의 어느 토요일, 서울에서 첫 손자의 결혼식이 열렸다. 당시 99세이신 시어머니의 병환으로 혹여 딸네 가족이 참석하지 못할까 봐, 나는 매일 두 번씩 간절히 기도했다. 기력이 없는 나도, 몸이 아픈 큰아들도 갈 수 없는 처지였기에 딸네만큼은 꼭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결혼식은 복되게 치러졌다. 신랑 신부가 참으로 잘 어울렸고, 주례 없이 진행된 예식에서 막내아들이 멋지게 축사를 마쳤으며, 딸네 온 가족이 참석해 잔치를 빛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편과 함께 축의금 관리를 맡았던 첫째 손녀는 예식 도중 전화를 걸어와,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전해주며 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아침, 갑작스러운 어지럼증과 구토가 몰려와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손을 뻗어 딸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놀란 딸이 비행기를 타고 급히 내려오는 사이, 막내아들이 달려와 내 곁에서 찬송가를 틀어주며 정성껏 수발을 들었다.

눈을 뜨기조차 힘든 와중에, 서울에서 엄마를 걱정해 함께 내려온 둘째 손녀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직장 출근 때문에 단 4시간만 머물다 자정에야 서울 집에 도착했다는 손녀의 기특한 마음이, 아픈 중에도 눈물겹게 고마웠다.


결국 다음 날 딸과 함께 119 구급차에 몸을 실었고, 소식을 들은 막내아들과 며느리도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다. 몸이 아픈 큰아들과 며느리도 오겠다고 했지만 딸이 안심시키며 말렸다. 여러 검사 끝에 내려진 병명은 '이석증'이었다.


< 휠체어 위에서 만난 천국과 기쁨 >

한참을 응급실에 있었으나 병원에서는 입원이 안 된다며 약만 지어 돌려보냈고, 아이들에게는 나 때문에 고생길이 열렸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몸은 비록 고달파도 마음은 평안했고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이틀 뒤, 아이들과 다시 찾은 병원에서 휠체어에 몸을 싣고 검사실을 오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남편이 아플 때는 내가 혼자 간병하며 휠체어를 밀고 다녔는데, 이제는 내가 자녀들에게 이렇게 대접을 받는구나!'

자식들에게 짐이 된다는 미안함보다 고마운 마음이 앞서 입가에는 감사의 찬송이 절로 흘러나왔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싶을 만큼 평온했다.


눈을 감으면 눈앞이 온통 아름다운 꽃밭이었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었다. 그런 내 마음이 겉으로도 배어 나왔는지, 간호사들과 옆에 있던 이들이 환자인 나를 볼 때마다 "할머니, 참 예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속으로 기쁘게 찬송을 부르는 내 모습이 그들의 눈에도 비쳤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간 식사도 제대로 못한 탓에 살이 빠지고 근육마저 소실되어 혼자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기력을 회복하지 못할까 봐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딸과 막내아들이 교대로 5일씩 곁을 지키며 나를 보살펴 주었다.


교수인 아들은 내 끼니를 챙겨주는 것은 물론, 설거지도 깔끔하게 해서 그릇들을 가지런히 세워두고 쓰레기 정리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가만히 지켜보니 신기하게도 누나와 남동생이 설거지를 해놓은 모양새가 꼭 닮아 있었다. 서로 설거지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릇이 놓인 풍경을 보며 대견한 마음이 들다가도, 설거지 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 정직한 신앙 양심으로 요양등급을 받기까지, 35일의 기적 >

오래전부터 재가 요양 서비스를 신청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나는 계속 거부해 왔다. 내 살림을 남에게 맡기기 싫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등급을 받기 위해 아픈 척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신앙 양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복지관 친구들이 나를 '권사님'이라 부를 때마다 손사래를 쳤지만, 그들은 내 행실이 분명 권사님이라며 계속 그렇게 불렀다. 그런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나에게 딸은 "어머니는 충분히 권사가 될 자격이 있으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라며 위로해 주었다. 가족 식사 때마다 내게 기도를 부탁하며 존경을 표하는 자식들 앞에서, 나는 더욱더 '거짓 환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심하게 앓아눕게 되자 딸이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마음처럼 거짓 없이, 정직하게 지금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세요." 딸의 진심 어린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고, 딸은 요양 등급 심사를 신청해 둔 뒤 서울로 올라갔다.

사흘 뒤, 딸이 서울에서 일을 보는 동안 나는 막내아들과 함께 심사를 받았다. 그날 나는 정직하게 현재 내 몸 상태를 있는 그대로 말하고 보여주었다.


딸이 다시 내려온 후에는 아들과 셋이서 주치의를 찾아가 소견서를 접수해야 했다.

주치의는 혼자 서 있기도 힘든 아흔네 살의 나를 보며 "치매가 아니라서 요양 등급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했다. 오랫동안 나를 진료해 온, 믿었던 의사의 건조한 말이 의외였고 그런 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구차하게 부탁하지 않았다. 의사의 소견대로 서류가 접수되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실망한 내가 "의사도 안 될 것 같다는데 어쩌니..." 하고 걱정하자, 딸은 담담하고 믿음직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나머지는 하나님의 뜻에 맡겨요." 아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딸은 2주간 곁에 머물며 매일 나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신나게 편곡된 찬송가를 틀어놓고 손뼉 치며 흥겹게 노래했고, 성경과 예수님에 관한 책도 읽어주었다. 그렇게 2주간의 정성 어린 간병을 마치고 딸이 서울로 돌아간 바로 다음 날, 드디어 기다리던 결과가 나왔다.


요양 등급 심사에 통과하여 나라의 지원을 받는 요양사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고생을 덜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눈물 나게 감사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서울에 있던 딸은 그날부터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급히 병원을 찾았고, 시술을 권유받았다. 나를 간병하느라 무리가 간 것 같아 마음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러나 딸은 나 때문에 시술을 미루고 우선 한의원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사이 나는 막내아들과 함께 요양사를 구하기 시작했다. 마침 내가 다니던 복지관 소속 요양사가 연결되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내 마음에 쏙 들었다. 2025년 1월 20일, 등급을 신청한 지 딱 한 달 만에 드디어 전문적인 돌봄을 받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 후 35일 동안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고, 기적같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주변에서 모두 하나같이 안 될 거라던 일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현실이 된 것이다. 그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무렵, 한의원 치료로 조금씩 차도를 보이던 딸에게 또 다른 이별의 소식이 찾아왔다. 구정 연휴 중 100세 되신 시어머니께서 소천하신 것이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딸은 아픈 몸을 이끌고 대전으로 내려가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다시 부산으로 내려온 딸은 나의 건강을 살피고, 요양사와 반가운 첫인사를 나누었다.


< 아흔여섯, 딸의 글 속에서 다시 피어나다 >

2025년, 딸은 또 나를 위해 이야기 할머니 활동을 휴직하고, 매달 내 옆에서 닷새가량씩 머물며 나의 회복에 정성을 다했다.

어느 날, 딸이 나에 대한 자서전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딸이 아주 어릴 적부터 내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딸은 늘 잘 들어주었고 때론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과연 그런 내 이야기가 책이 되어 나올 수 있을까?' 하며 반신반의했는데, 실제로 글이 되어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2026년 새해가 되자마자 딸이

"브런치라는 글 쓰는 곳에서 제가 작가가 되었어요!"라는 말을 했다.

비로소 나는 실감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딸의 글쓰기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힘들지 않게 해 주시고 끝까지 잘 마무리하게 도와주세요."


그 기도 후, 나와 딸은 같은 날 각자 신기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우리가 함께 해온 글 쓰는 작업이 의미가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싸인 같았다. 그리고 딸은 브런치라는 곳에 나의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사랑의 기적이었다>

​아흔넷에 시작한 기억의 되새김이 쉽지만은 않았다. 곁에서 또는 서울에서 글을 쓰는 딸은 나보다 더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씩 내 맘에 쏙 들게 글로 풀어낸 것을 읽어줄 때는 뿌듯하고 고맙고 신기했다.

나의 태몽에서 시작해 35일간 물 흐르듯 맞아떨어진 기적들을 되새기며 나는 다시 깨닫는다. 내 삶의 모든 굴곡이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지치고 쓰러져도 소망을 끝까지 붙잡고 정직하게 산 삶은, 비록 어려움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끝내 기쁨으로 풍성하게 채워진다는 것을 이제야 고백한다. 나의 이 고백이 사랑하는 자손들에게는 가장 귀한 유산이 되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는 고난의 삶 속에서 만나는 '작은 반짝이는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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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

그동안 애정 어린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라이킷과 팔로우로 격려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연재된 글들은 사진 등을 보완하여 곧 '브런치북'으로 묶어 선보일 예정입니다.

연재에서 다하지 못한 더 깊은 이야기와 기적 같은 순간들은 종이책에서 더 상세하고 따뜻하게 담아내려 합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념책자를 만들어 어머니께 먼저 선물해 드린 후, 정식 종이책 발간도 정성껏 추진할 계획입니다.


그동안 함께 울고 웃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