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섯에 찾아온 남편의 선물과 자식들의 계절 (후반축약본)
< 나를 찾아온 12평의 안식처 >
내 나이 여든여섯, 남편이 천국으로 간 지 8년 후,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보훈처에서 나온 사람들은 내 남편이 6.25 참전용사이자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영웅이라서, 그동안 받지 못한 혜택을 이제라도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동안 2년 정도 일주일에 두 번 가사 도우미가 찾아온 것이 전부였는데, 거기에 더해 근처에 있는 12평 영구임대아파트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2년마다 전세금이 올라 부담이던 나에게 그것은 하늘에 있는 남편이 보내준 뒤늦은 선물 같았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우리 아이들이 찬성할까? 번듯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아이들이 수급자들이 사는 임대아파트로 들어가는 엄마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을까?' 나와 남편은 평생 베풀며 살았고, 자식들과 이젠 손주까지 꼬박꼬박 나라에 세금을 내며 당당하게 살아왔다. 과거 국제시장에서 큰 부도를 겪었을 때, 지팡이를 짚고 지나가던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시장 사람들이 모아준 성금 5 만원 외에는 누구에게도 손을 벌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아파트엔 행실이 험한 사람들도 섞여 있다는 소문에 겁이 나기도 했다.
내 말을 들은 두 아들은 "어머니, 너무 좁은 곳으로 가지 마시고 그냥 여기서 사세요"라며 만류했다. 딸에게도 조심스레 의중을 물으니 한참을 생각하다 "어머니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라며 내 선택을 지지해 주었다. 자식들에게 더 이상 전세금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대쪽 같던 남편이 생전에 마다했던 혜택을 이제는 내가 받아도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다행히 배정받은 곳은 바다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남향집이었다. 그때 살던 집보다 좁긴 해도 여전히 볕이 잘 들었고 전망은 바다가 더 가까이 보여 더 좋았다. 아이들도 와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몇 년 전 베란다에서 미끄러져 허리 수술을 했던 터라 높은 축대가 조금 걱정이었지만, 바로 밑에 제법 큰 마트가 있고 셔틀차량도 운행하니 괜찮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매일 노인대학에서 배운 체조를 하며 다리 근육을 다져왔다. 8월의 뙤약볕 아래, 직접 사람을 불러 도배와 칠을 새로 하고 이사를 마쳤다. 여기가 나의 마지막 집이 될 것이다. 나는 보훈처 도우미를 말벗으로만 대하며 내 힘으로 집안일을 해내려 애썼다. 그녀는 내 집에 오면 쉬는 시간 같고 좋은 교육을 받는 시간이 되어 좋다고 웃곤 했다.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나는 명절음식을 내려놓기로 했다. 4년간 남편 추도예배를 드릴 때도 그 후 몇 년 동안도 내가 늘 음식을 장만했다. 그러나 이젠 집이 좁아지기도 했고 나도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젠 50줄에 들어선 두 며느리에게 나에게 와서 먹을 음식을 조금씩 만들어 오도록 했다. 나는 밥과 국만 준비했다,
< 딸의 은퇴와 아들의 승진, 겹쳐온 경사 >
서울 사는 딸은 다섯 식구가 27평 좁은 집에서 10년을 부대끼며 살면서 아이들에게 제 방 하나 못 준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딸이 간절한 기도 끝에 넓은 집을 마련하게 되면서, 35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는 명예퇴직을 결정했다. 둘째 손녀의 로스쿨 졸업이 1년 남았고 막내 손녀는 갓 취직한 시점이었지만, 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사명감으로 지키던 교단을 후회 없이 내려오기로 했다.
2017년 2월, 딸의 명예퇴직에 이어 경사가 또 있었다. 공채 기자로 시작해 29년을 한결같이 뛰었던 막내아들이 상무이사로 승진한 것이다. 보도국장을 거쳐 부산 시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한 결과였다. 힘들 땐 오히려 대학원 다니고 중국어를 공부하고 책도 2권이나 집필하며 자신을 잘 다스리던 자랑스러운 아들. 내 눈엔 사장감으로도 손색이 없었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사장 소식에 조금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축하를 건넸다.
<첫 손녀의 꽃소식>
4월 말, 첫째 손녀에게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전화가 왔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실 나는 이미 꿈을 통해 손녀의 좋은 인연을 예감하고 있었다. 당장 보고 싶었지만 "엄마에게 먼저 보여드리고 그다음에 부산으로 오너라" 하며 일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들의 방송국에 사건이 터졌다.
< 심장을 떨리게 한 시련과 화폭에 담긴 나의 의분 >
5월, 정권이 바뀌자 방송국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방송국 강성노조는 새로 온 사장뿐만 아니라 내 아들까지 한데 묶어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오직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들이 아들에게 칼날을 들이댔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몰리는 아들을 보며 내 심장은 사정없이 떨렸다.
출퇴근길에 아들이 겪은 수모와 기막힌 상황들을 듣고는 어이가 없고 눈물이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뿐이었다. 탄원과 눈물의 기도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시린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딸은 손녀의 혼사가 환경 차이로 힘들까 봐 걱정했지만, 내 마음은 억울하게 내몰린 아들에 대한 걱정과 회사를 향한 분노로 가득했다. "하나님,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라며 울며 매달려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나 아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네 억울함을 반드시 갚아주실 거다. 사람이 막아도 하나님이 여시는 길은 아무도 막지 못한단다." 나는 30년 공든 탑이 무너진 것 같은 이 허망함 속에서도 눈물로 제단을 쌓으며 아들의 명예 회복과 새로운 길을 위해 기도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던 그 무렵, 노인대학 미술수업 시간에 헝겊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렸다. 평소 같으면 내가 좋아하는 예쁜 꽃을 그렸을 텐데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안의 속상함과 억울함 그리고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붓끝에 강하게 실려 나왔다. 붉고 노란빛의 불꽃같은 그림이 화폭을 채웠다. 나중에 그 그림을 본 딸은 "어머니께서 얼마나 깊게 화가 나셨는지 다 보이네요!"라며 그 탄식이 담긴 헝겊 그림을 소중히 챙겨갔다.
< 30년 헌신 뒤에 남겨진 퇴장과 절망할 틈도 없이 열어주신 새로운 길>
2018년 2월, 아들이 30년을 헌신한 방송국에서 결국 퇴직했다. 3년 임기인 상무이사직을 1년 만에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회사를 떠나 집에 도착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부산에 있는 4년제 대학교 교수가 급히 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의 전화였다. 새 학기 준비가 끝난 시점이라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원래담당인 교수가 개인 사정으로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의료는 한 달에 60만 원 밖에 안 되었지만 그때 아들은 직감했다. '아, 하나님께서 내가 근심에 빠질 시간이 없도록 일을 주셨구나.'라고. 그리고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 당시 아들은 회사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언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시기가 참 잘 맞았다. 아들은 3월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2학기부터는 한국연구재단이 선발하는 객원교수가 되어 1학기때 강의했던 대학교의 같은 과인 방송영상 학과에서 3년간 근무하게 되었다.
※ 이후의 내용은 종이책 출간을 위해 기존분량의 1/5로 축약되었습니다. 축약된 내용은 종이책에 온전히 담길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 후로도 쉬지 않고 익어가는 삶의 열매들 >
아들의 퇴직 며칠 뒤, 로스쿨을 마친 둘째 손녀가 해운대로 가족여행을 준비했다. 그 자리에서 30년 근속을 마친 아들에게 케이크로 축하를 건넸다, 마땅히 회사에서 받았어야 할 박수를 조카들에게서 받는 아들을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이듬해 가을엔 용기를 내어 여든여덟의 나이로 첫 손녀의 서울 결혼식에 올라갔다. 천사처럼 눈부신 손녀의 모습에 그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온 세월이 한꺼번에 눈앞을 스쳐갔다.
그다음 해엔 둘째 손녀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국회 입법조사관의 길을 택했다.
아들의 시련으로 심장이 떨리던 날부터 손녀들의 장성한 모습까지, 나의 80대 후반도 이토록 다양한 삶의 무늬들로 촘촘히 채워졌다. 12평 작은 집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가 이제는 손녀들의 앞날도 환히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 이 글은 어머니의 기억을 기반으로 기록한 이야기입니다.